099화
글리시아 남작 영지에서 발견한 19개의 던전 모두 닫혔다.
뤼빅스 대륙 전체를 놓고 볼 때 이는 미미한 수치였으나, 행정구획에서 공식적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라 그 의미는 남달랐다.
중간 과정을 거치지 않고 국왕에게 곧장 보고될 만큼 비중 있는 사건이었다.
왕국의 권력자들은 물론 엉덩이가 무겁기로 유명한 거대 마탑까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 어스 경, 어서 오게. 어서 와. 하하.”
“절 찾으셨다고요?”
“맞네, 맞아. 이 몸이 그대를 찾았어. 그리고 이렇게 와줘서 고맙네.”
5띠 던전을 닫고 돌아온 지 오늘로 2일, 하루는 침대와 한 몸처럼 지내며 밥도 침대에서 먹었다.
이틀은 더 이처럼 지내고 싶었지만 레이몬드 사제가 간곡하게 만나길 요청하였기에 귀찮았지만 걸음 했다.
전에도 호들갑스러운 인물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더 호들갑스레 자신을 맞이하자 어스는 어리둥절했다.
“레이몬드 사제님이 부르시는데 당연히 와야죠.”
“자자, 앉으시게 얼른 앉으시게 귀하신 몸이 피곤하면 안 되잖은가. 하하.”
그걸 아는 사람이 만 하루 만에 다시 찾는단 말인가?
이기적인 뚱땡이 같으니라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그리 급히 찾으셨습니까?”
“좋은 소식을 전해주기 위함이지. 내가 직접 찾아갈까도 생각했지만 그러자니 눈치가 보여서 말이야.”
‘눈치? 저 인간이 이 영지에서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이 있나?’
글리시아의 규모가 작다 보니 신전의 규모도 적은 편이다.
반면 레이몬드 사제의 집은 신전을 움막으로 만들 정도로 크고 좋았다.
사제란 놈이 신전보다 더 좋은 집이라니.
“레이몬드 사제께 눈치를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혹시, 영주님?”
“설마.”
“그럼?”
“지금 자네로 인해 전국이 발칵 뒤집어졌어.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해. 조만간 자네 이름이 온 대륙을 진동할 걸세.”
어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전국은 뭐고, 대륙은 왜요?”
“왜긴 왜겠어? 이번 원정이 낳은 결과물이지. 지금 자네로 인해 교단 상부에서도 난릴세, 난리야. 하하하. 덕분에 자네를 추천한 내 입지가 확 커졌지 뭔가. 어때? 자네도 기쁘지?”
“이틀도 안 됐는데 소문이 퍼졌다고요?”
“그야 던전이 지금 대륙에서 가장 큰 관심사 아닌가?”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빨리 소문이 퍼진다는 게 저로선 이해할 수 없네요.”
“소문의 출처가 어딘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네. 중요한 건 추기경님께서 자네를 직접 부르셨단 거지.”
“추기경님께서요?”
교황 다음의 권력자가 바로 추기경이다.
룬 교단에서 추기경의 숫자는 72명, 이 중에서 레이몬드가 줄을 대고 있는 추기경은 한 명밖에 없다.
에스터 추기경이 바로 레이몬드가 잡고 있는 줄이다.
그리고 에스터 추기경은 어스의 직속상관이나 다름없다.
성기사 서품을 에스터 추기경 이름으로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레이몬드 입에서 추기경이 거론되자 어스는 신도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일국을 대표하는 왕이나 그에 버금가는 대영주도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만나 보기 힘든 사람이 바로 추기경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먼저 자신을 청했다고 하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부모님이 아시면 까무러치겠네.’
어스는 아니었지만 그의 부모님은 룬의 신도였다.
하지만 어스는 신앙심은 개미 눈물만큼도 없었다.
거기다 최근 신성력이 농축된 마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룬이 허구의 존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성기사라니 이보다 더한 모순이 어디 있을까 싶다.
이러하다 보니 당연히 이 소식이 반가울 리 만무하다.
“맞네, 바로 그 추기경께서 직접 내게 문자를 주시었네. 자네와 함께 오라고 말이야. 하하.”
레이몬드의 오두방정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동안 루리아랑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는데.’
이번 던전에서 얻은 건 많았지만 그만큼 심신도 지쳐있었기에 치료목적으로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랬는데.
“꼭 가야…… 하겠네요.”
안 간다고 하면 레이몬드와 척을 질 것 같았기에 어스는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 출발하는 건 어떤가?”
내키지 않다, 엄청.
“그러죠. 그런데 목적지는 어딘가요?”
“솔론 왕국의 왕도네.”
에스터 추기경이 솔론 왕국에 있을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어스에겐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였다.
“한 명 더 동행해도 될까요?”
“누구?”
“루리아 영애입니다.”
“그러게 얼마든지, 뭐든 다 하게. 자네 뒤엔 내가 있고, 내 뒤엔 우리 예하께서 계시는데 누가 감히 자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아서겠는가! 어스 경.”
“예.”
“우리 평생 함께 가세. 끈끈하게. 내 맘 알지? 참, 집사. 상자 가져오게 두 개 가져오게. 아니, 세 개 가져오게.”
상자 세 개면 1억 5천만 테스다.
창고 넘버 1이라면.
‘이 양반이랑 진짜 끈끈하게 가야 하나?’
어디서 어떻게 돈을 버는 건지는 모르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저 녀석은 살아 있는 돈 나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아낌없이 퍼주는.
* * *
어스와 루리아는 레이몬드 사제가 준비한 최고급 마차에 몸을 실었다.
오스완드 영주를 비롯해 영지의 주요 인물들이 최상의 예로 떠나는 어스를 배웅했다.
“영주님, 루리아 아가씨만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안 괜찮을 건 뭔가?”
“예?”
“난 오히려 지금의 저 경호도 내키지 않아.”
경호 인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런데 딸을 타국으로 보내는 아비가 오히려 경호 인력이 많다고 아쉬워하고 있으니 행정총관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별거 아닐세. 그보다 부산물 매각 추진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거대 상단에서 속속 매입 의사를 타진해오고 있습니다. 이번 거래만 성사된다면 몇 년은 재정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어스 경 덕분이지. 이런 큰 선물을 주다니.”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물며 한창 뜨거운 연애 초기가 아닌가.
더욱이 오스완드 영주가 자신을 밀어주는 느낌도 강했기에 어스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이번 원정에서 얻은 부산물 지분을 과감하게 포기했다.
바로 어제, 그러니까 레이몬드 사제의 집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러한 뜻을 정중히 전했다.
* * *
눈치가 아예 없지 않은지 레이몬드 사제는 두 대의 마차를 준비해 어스와 루리아만 같이 태웠다.
덕분에 어스는 단둘이 여행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승차감, 난방, 방음이 모두 갖추어진 마차도 좋았지만 그보단 그녀와 함께여서 좋았다.
‘이곳이 천국이지.’
루리아가 말수가 없다 보니 많은 말을 나누진 않았다.
그럼에도 전처럼 어색하거나 하는 따위의 일은 없었다.
어스는 수다쟁이가 되어 계속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루리아는 때론 짧게 때론 길게 그의 말에 대답해주었다.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좋은 기색 하나 없이.
그렇게 2시간 내내 신나서 떠들던 어스는 조금 피곤했는지 쿠션에 몸을 기대었다.
루리아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더니 준비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꽃향기 머금은 바람이 들어왔다.
그에 취하고, 도도하면서 차분한 독서녀의 분위기에 취해 어스는 잠이 들었다.
잠깐 잠이 들었다 싶었는데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마차는 들꽃이 만개한 강변에 정차한 상태였다.
식사는 세 명이서 했다.
식사가 끝나자 셋 중 하나가 빙그레 웃으며 빠져주었다.
‘우리 돈나무는 눈치도 좋아.’
뒤뚱거리며 멀어지는 레이몬드를 일별한 어스는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자 냉큼 루리아의 손을 잡았다.
이에 화들짝 놀란 루리아는 손을 뺐다.
어스는 놓아주지 않고 짓궂은 표정으로 웃었다.
“사, 사람들이 보잖아.”
“안 봐요. 우리 돈나무…… 아니. 레이몬드 사제가 그만한 눈치는 있어요. 봐요.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
어스의 말에 뒤를 돌아본 루리아는 그제야 안심한 듯 홍조가 살짝 가라앉았다.
그 홍조는 어스가 다시 지폈다.
활활.
다시 루리아의 손을 잡은 어스는 양지바른 풀밭에 돗자리를 펼치곤 루리아를 앉혔다.
“왜?”
“다리 베고 누워도 돼요?”
로맨스 소설을 보니 열에 열 모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언제고 자신도 꼭 해보리라 내내 벼르고 있었다.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마른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그의 모습에 루리아는 실소와 함께 허락했다.
루리아의 다리를 베고 누워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을 보자 세상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시크하고 예쁜 여친만으로도 충분하지 싶은데, 여기에 죽을 때까지 써도 다 쓰지 못할 정도의 재력과 능력까지.
이러니 세상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두어 시간 마차에서 잠을 자서인지 배가 부름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잠시 어스를 상대해 주던 루리아는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검황 전기.
요즘 루리아가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소설책이다.
루리아와의 사랑을 꽃피우기 위해 그간 열심히 정독한 로맨스 소설 덕분에 부족했던 읽고 쓰기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래서 지금은 전문용어가 아닌 이상 모르는 단어가 없었다.
‘연애편지는 참 어렵단 말이야.’
제대로 된 연애편지를 쓰기 위해 어스는 틈틈이 쓰고 있었지만 하나 같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매번 파이어 애로우로 태우곤 했다.
그렇게 사라진 편지지만 현재 1,000장이다.
완벽을 추구하다 보니 일어난 낭비였다.
어스는 루리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죽은 사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멍 때리고 있으니 좀이 쑤셨다.
서서히 찾아오는 불편함. 하지만 자신이 보채서 얻은 기회였기에 뽕은 제대로 뽑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꾹 참았다.
다른 생각, 다른 생각을 하자.
지금까지 미뤄서 그렇지 생각할 건 많았다.
당장 얼마 전 성공리에 끝마친 던전만 해도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었다.
-너는 인간인가?
-형상은 분명 인간인데 어째서 인간인 네게서 그분의 향기가 나는 거지?
-그분의 향기를 품고 있음에도 그분을 모르는…….
케이브맨 보스의 말이었다.
그땐 농축된 마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지만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그 때문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이 대체 어떤 분인지 이름이나 알려주고 가도 갈 것이지.’
그래도 이것 하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룬은 아니다.
그때 나풀대며 날아든 나비 하나가 어스의 심장 어림에 안착했다.
겁도 없이.
나비를 잡아 루리아에게 선물할까 싶었지만 어린아이 같은 행동일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렇지 않아도 외모 때문에 다들 어리게 보는데 거기다 그런 행동을 더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비는 이내 날아갔다.
하지만 어스의 눈길은 나비가 떠난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었다.
‘놈이 말했던 향기…… 혹시 문신 때문일까?’
위그드라실은 이종족인 엘프가 신으로 섬기는 존재다.
룬과 달리 그들의 신은 실체가 존재하였으며, 그들의 삶에도 영향을 끼쳤다.
먼 과거 이 땅에서 벌어진 종족 전쟁에서 인간은 그들의 신을 불살라버렸다.
그 선두에선 집단이 오늘날의 룬 교단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 집단의 일원인 성기사다.
이보다 더한 모순이 또 있을까?
이종족 신을 품고 있는 성기사라니.
‘되도록 몸을 드러내지 말자.’
반사적으로 앞섬을 추스르자 그의 행동에 루리아가 책을 덮었다.
어스는 몸을 일으킨 뒤 이번엔 자신의 다리를 툭툭 두드렸다.
“누나가 베요.”
* * *
오늘도 어제처럼 마차를 타고 솔론 왕국 왕도로 가는 길. 국경 근처에도 못 갔기에 갈 길은 멀다.
역마차와 상단의 왕래가 빈번한 관도였기에 별다른 일은 일체 없었다.
아니,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범접하기 힘든 고가의 고급 마차 두 대가 풍기는 고급스러움도 고급스러움이지만, 이를 호위하는 50기의 무장 기마병이 풍기는 위압감 때문에 사람이건 짐승이건 피하기에 급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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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마차가 제공하는 안락함을 만끽하던 어스의 표정이 돌연 환희로 물들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선물(?)이 막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두근두근.
철옹성(창/귀속).
1일 1회 무형 장벽 생성(반경 1미터/지속 1분).
파괴불가.
회수.
‘대, 대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