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뱀이 수면을 헤엄칠 땐 몸을 지그재그로 움직인다.
그처럼 체인 라이트닝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모래언덕이 줄지어 늘어선 지금과 같은 지형에선 본래의 위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때문에 어스는 파이어 볼과 파이어 버스터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 두 스킬만 사용해선 효과를 보기 힘들다.
굴곡이 심한 지형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공격 스킬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블링크를 접목할 수밖에 없었다.
쾅쾅쾅-!
지상을 향해 쏘아진 불덩어리가 일으키는 폭음과 충격파로 인해 지상은 눈사태를 보듯 모래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스의 이동 방식이 비행이었다면 무기라도 투척할 텐데, 발견했나 싶으면 엉뚱한데서 불덩이를 떨어뜨리고 다시 발견하면 또 사라지길 반복하자 파빌사그들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앞서 원정대를 공격했던 다른 무리의 파빌사그처럼 놈들 역시 소득 없이 같은 길을 따랐다.
도주였다.
뭉쳐서 달아나면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놈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쳤다.
어스는 놈들을 뒤쫓지 않았다.
몇 마리 더 잡자고 배 터져 죽을 수 없었으니까.
‘하아, 보스 사냥도 아니고.’
그의 푸념을 원정대가 들었다면 열에 열 모두 어이없어 할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어스의 전투는 땅 짚고 헤엄치는 것과 다름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실상 이러한 어려움이 있는데.
‘그새 포션을 몇 병이나 쓴 거야?’
포션이 간당간당하던 시절 겪었던 불안과 긴장감, 이를 반면교사로 삼은 어스는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일을 겪지 않도록 마나 회복 포션만큼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넉넉히 갖고 다녔다.
그러했기에 단 두 번의 전투에서 소비한 포션이 상당히 많았음에도 막상 걱정하는 기색은 그의 얼굴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더더욱 진해진 딸기 향만큼 배가 전보다 더 불룩해진 걸 빼면.
꺼억.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기를 허공에 뿌린 어스는 곧장 애태우고 있을 추기경에게 돌아갔다.
추기경을 만난 어스는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이번엔 원정대를 찾아 떠났다.
방향은 대충 알고 있었기에 그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추, 추기경님께서 살아계시다니! 룬이시여, 당신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어스가 가져온 소식에 가장 기뻐한 인물은 역시 리더만을 비롯한 성기사들이었다.
조금의 가식도 없는 진심을 그들의 표정과 행동에서 엿볼 수 있었다.
‘나도 에스터 추기경만큼 늙으면 레이몬드 사제 같은 모습의 여자가 좋아질까?’
미래의 일은 그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당장 자신만 해도 1년 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동일한 인물이 맞나 싶을 만큼 어떤 부분에선 크게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하물며 여성관이야.
‘루리아 누난 노인이 되도 레이몬드처럼 뚱뚱해질 것 같진 않은데.’
손에서 검을 내려놓고 방탕하게 생활한다면 그리 될 것 같긴 한데, 루리아의 성격을 보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어스가 가져온 반가운 소식에 원정대 공식 총사인 슈리에 후작은 추기경에게 보낼 인원을 편성하려고 했다.
성기사들 전원이 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원정대를 유지하기 위해선 불가했다.
대신 상급 익스퍼트들을 보내려 했고, 거기엔 리더만 단장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떠날 수 없었다.
“나 혼자 가면 되네. 그편이 나아.”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플린트 테리어가 나섰기 때문이었다.
“어스 경의 말을 들어보니 거리가 상당한데 언제 뛰어가고, 또 언제 추기경님을 모셔올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나라면 그곳까지 충분히 날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도착만 하면 한 사람은 충분히 텔레포트로 이동시킬 수 있으니 모든 걸 감안할 때 내가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만장일치로 추기경을 데려오는 일은 플린트 대마법사가 맡기로 하였다.
길을 나서기 전 플린트는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안정적인 귀환을 위한 마법진을 세우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스에게 위치추적 마법을 거는 일이었다.
“위치추적 마법의 지속 시간은 12시간이네. 그쯤이면 충분하겠는가?”
여기서 추기경이 있는 위치까지 거리는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레비테이션의 속도를 알지 못하는 어스로선 확신할 수 없었다.
“레비테이션의 속도는 말에 비유하면 어떻습니까?”
“순풍을 만나면 준마, 아니면 짐말 정도의 속도를 낼 수 있네.”
“그럼 12시간 내내 레비테이션 유지가 가능한가요?”
“내가 대마법사소릴 듣곤 있지만 자네처럼 보물급 유물을 가진 게 아니다 보니 서클 안정화에 필요한 최소한의 마나를 제외하면 최대 4시간 정도 비행이 가능하지 싶군.”
어스 입장에선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보물급이라 불릴 만한 유물이 자신에게 없었으니까.
플린트 대마법사가 그렇게 말한 건 그것이 아니고선 설명할 길이 없어서였다.
사문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플린트는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어스를 예의 주시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다른 마법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물은 뭐고, 가능하지 싶다는 또 무슨 개뼈다귀 뜯는 소리지?’
파빌사그 놈들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예측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 마나가 없는 마법사, 설사 대마법사일지라도 그땐 놈들의 먹잇감밖엔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걸 남일 말하듯 하고 있으니 어스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었다.
살만큼 살았다고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건가?
더구나 만에 하나 그가 죽기라도 하면 또 발걸음을 반복해야 한다.
어스 입장에선 이보다 짜증나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오늘은 포션을 그만 마시고 싶었으니까.
“음, 4시간 안쪽이라고 봐야겠네요.”
‘유물이 아닌가? 아니면, 포커페이슨가?’
어스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던 플린트는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유물이 아니면 대체 그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이란 말인가?
정말, 격세유전인가?
설마, 교단이 혼혈을 인정하기로 한 것일까?
갑자기?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어스의 시선에 플린트는 상념을 지웠다.
“흠흠. 그렇게 보는 게 좋을 것 같군.”
“알겠습니다. 그때까지 안 오시면 제가 움직이겠습니다.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했군요. 추기경님이 기다리고 계실 테니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어스가 몸을 일으키자 리더만 단장이 아공간 주머니를 건넸다.
“이건?”
“식량과 음식 그리고 천막이 들어 있네. 추기경님을 잘 부탁하네.”
안에 든 내용물만 전해 주고 아공간 주머니를 가져도 될까?
그 생각은 접어 두었다.
세상에 아공간 주머니가 이것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이번 일이 잘 풀리면 레이몬드 사제가 가만있을 사람도 아니고.
“물론입니다. 다음엔 추기경님을 모신 자리에서 봤으면 좋겠군요.”
“룬의 가호가 함께 하길.”
리더만을 비롯한 모든 성기사의 축원(?)을 받은 어스는 곧장 이동했다.
‘힐이라도 한 방 쏴 달라고 할걸.’
레이몬드 사제의 힐을 받고 2단계 상승한 칭호 승리의 노래, 이후 연공법을 꾸준히 수련하고 있음에도 아직 그 단계에 머물러 있는 어스로선 좋은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자책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책은 잠시였다.
자신이 향하는 곳, 그곳엔 교황 다음 서열의 추기경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추기경의 힐은 어떤 맛이려나.’
일분일초가 아까워진 어스였다.
* * *
자리를 비운 동안 추기경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았을까 걱정했던 어스는 무사한 모습의 추기경을 보자 그제야 안심했다.
“리더만 단장이?”
“예.”
아공간 주머니의 주인 각인은 해제하였기에 그 안의 내용물을 꺼내는 건 별도의 절차 없이도 가능했다.
간이 천막을 꺼내자 어스는 냉큼 이를 받아서 설치했다.
열심히, 땀을 쥐어짰다.
이렇게 하면 힐 한 방 받을 수 있을까 싶어 보란 듯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이런데도 힐을 안 준다면 추기경을 다시 생각할 것이다.
그의 연기가 통했는지 추기경이 그를 걱정하며 힐을 쏴주었다.
‘터져라! 제발!’
귀한 연공법을 얻었을 땐 천하를 다 가진 듯 기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수련이 귀찮았다.
사람이 나무도 아니고 어떻게 숨만 쉬고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연공법 수련은 멈추지 않았다.
위그드라실의 계승자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없는 것보단 당연히 낫다.
한 방울의 힐도 놓칠까 봐 연공법을 돌리며 몸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열어 놓았다.
대박이 터졌다.
-대량의 농축된 마나의 힘이 체내에 유입되었습니다.
-대량의 농축된 마나의 힘을 칭호 ‘승리의 노래’에 적용합니다.
-칭호 승리의 노래가 세 단계 발전합니다.
이에 언제 다시 추기경에게서 힐을 다시 받을 수 있을까 싶어 온 몸으로 힐을 외쳤다.
그게 통하였는지 에스터 추기경은 한 번 더 그에게 힐을 시전했다.
일국의 왕도 받기 힘들다는 추기경의 힐을 두 번이나 받는 영광을 누리다니.
대대손손 이 일을 기록하여 가보로 남겨야 하나 싶다.
알림은 없었다.
안타깝게도.
‘두당 효과는 한 번인가?’
성기사나 다른 사제를 통해 확인해볼 필요성이 있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재미없는 연공법 수련 대신 그 시간에 다른 유익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
“어떤가?”
“역시, 추기경님입니다. 감사합니다. 추기경님.”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
자애로운 눈길과 미소를 짓던 에스터 추기경은 피곤한지 몸을 뉘였다.
어스는 그녀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아이스 스피어를 놔드렸다.
‘시원하게 주무세요.’
* * *
블링크를 이용하여 이동하면 거리 감각이 무뎌진다.
제 아무리 블링크를 연속으로 사용한다고는 하지만 중력에 의한 하강은 피할 수 없다보니 같은 거리를 이동하더라도 스킬 시전 횟수가 제각각이었다.
레비테이션으로 날아오고 있을 플린트 역시 그러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어스는 플린트를 기다린 지 3시간이 되자마자 움직였다.
다섯 번의 블링크를 시전하자 플린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머, 멋지다!’
꼿꼿이 선 자세로 긴 백발과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한손엔 멋들어지게 생긴 지팡이까지 쥐고 있는 모습은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스는 그 앞에 서서 몇 마디 말이라도 주고받고 싶었지만 부유 마법은커녕 플라이도 없었기에 확인만하고 곧장 추기경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얼마 안 있어 드디어 플린트가 도착했다.
“추기경님의 무사함을 확인하니 마음이 놓입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플린트가 교단이 아닌 마탑 소속의 외인이어서인지? 아니면 에스터 추기경의 본래 성품인지 자신을 돕기 위해 먼 길을 날아온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대하는 태도는 어스와 사뭇 달랐다.
어스를 대할 때의 모습은 자애롭고 살가운 모습이었다면, 플린트를 대할 땐 사무적인 느낌이 강했다.
추기경과 짧게 인사한 플린트는 명상을 통해 휴식을 취한 뒤 텔레포트 좌표를 입력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법진은 꼭 두 개여야 하나요?”
“공간을 접어 목적지로 이동하는 방식이라 이동엔 조금의 오차도 발생해선 안 되네. 때문에 성가신 작업이지만 마법진은 필수네.”
“도착지 마법진에 문제가 있으면 그땐 어떻게 되나요?”
“그야 당연히 공간의 미아가 될…… 의외군 5서클 마법사인 경이 이런 질문을 하다니.”
“당연히 저도 알죠. 다만 마법을 펼치는 주체가 플린트님이라 다른 가 해서 드린 질문이었습니다.”
모르는 건 분명 부끄러운 건 아니다, 진짜 부끄러운 건 모르는 데 아는 척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스가 아는 척한 이유는 있지도 않은 스승을 팔다 보니 그 스승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매우 높아져 있기 때문이었다.
거짓은 변명을 낳는다고 했던가? 어스가 바로 그 짝이다.
마법진이 완성되자 플린트와 에스터 추기경이 먼저 떠났다.
안정적인 이동을 위해선 한명 이상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데려가는 사람이 교단 서열 2위 그룹의 한 사람인 추기경이었으니 더더욱 만전을 기할 수밖에.
졸지에 혼자 남은 어스는 숙영지까지 블링크를 연발해야 했다.
‘이러다 배 터져 죽겠네, 죽겠어.’
그나마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망정이지 아님 아직도 헤매고 다녔을 걸 생각하면 이렇게나마 끝난 게 천만다행이다.
이제 남은 건 보스.
무려 6띠 던전의 보스가 남았다.
이번엔 또 얼마나 많은 양의 포션을 사용하게 될지 생각만 해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