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파리스 왕국 남부 대도시 하밀을 시작으로 어스의 던전 원정은 7일 연속으로 이루어졌다.
던전 원정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어스의 행보에 감탄을 넘어 경악했다.
한편에선 교단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교단에서 그를 지나치게 혹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상은 그 반대였다.
“어스 경, 쉬엄쉬엄하게. 던전이 자네 원수라도 된단 말인가? 그러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러는 건가? 부귀영화도 몸 건강할 때의 이야기지 몸 아프면 다 소용없어.”
부하직원이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건 본인은 물론 직속 상사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레이몬드 주교는 어스의 건강을 우려하여 쉬기를 권유하고 있었다.
이 한 번이 아니다. 이미 앞서 여러 차례 권고했었다.
그럼에도 어스는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홀아비 물레방앗간 드나들 듯 던전을 찾았다.
“제 건강은 제가 챙길 테니까 걱정 마세요. 형님도 알다시피 제가 던전에 하루 종일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서너 시간이잖아요. 서너 시간 빡세게 일하고 남은 시간은 잘 먹고 잘 자는 거 아시면서.”
“사람이 과부하 상태면 자신의 상태에 둔감해진다는 말이 있어.”
“형님이 보시기에 제가 과부하 상태라는 건가요?”
어스가 반문하자 페어몬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이 짧게는 보름에서 길면 두 달까지 생소한 환경과 몬스터를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곳이 바로 던전이란 곳이다.
소드 마스터나 대마법사도 던전에 들어갔다 나오면 일주일 이상은 휴식을 취한다고 들었다.
하물며 수준이 그들보다 떨어지는 자들은 열흘 이상 휴식기를 가진다.
개인적인 이유로 그리고 상황에 의해 휴식기가 짧은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최소 사나흘은 쉬는 게 일반적이었다.
어스가 제아무리 괴물 마법사로 불린다지만 그건 별명일 뿐, 그도 인간이다.
“그리 보이진 않지만…….”
“걱정은 고맙지만 제 컨디션은 알아서 할 테니까 잔소리는 그만해요. 그리고 오늘은 형님 말처럼 쉴 테니까 안심하고요.”
“오! 정말인가? 정말 쉴 거야? 갑자기 왜?”
“언제는 쉬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하더니 그새 마음이 달라졌어요?”
“갑자기 말하니깐 그렇지. 아무튼 잘 생각했어. 그럼 텔레포트 마법진 타고 나랑 온천에 가지 않을 텐가?”
텔레포트 마법진을 가동하기 위해선 막대한 자원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텔레포트 마법진을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제한적이다.
교황을 포함하여 대주교까지다.
그 외 사람들이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10명 이상의 추기경의 허락을 받거나 혹은 공무일 때 가능하다.
어스의 경우는 당연히 공무다.
그랬던 어스도 그가 요 일주일간 보여준 행보로 인해 교단에선 특별히 어스에 한해 텔레포트 마법진의 개인적인 사용을 허락한다는 선물을 안겨주었다.
본인 포함 1인까지 대동할 수 있는 특혜를 허락한 것이다
참고로 주교로 승직한 레이몬드 역시 특별한 사유 없이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할 수 없다.
그것이 여행 목적이라면 더더욱 불가하다.
하지만 어스와 함께라면 언제든 이용할 수 있었다.
“다음에, 다음에 가도록 하죠. 오늘은 일이 있어요.”
“일? 무슨 일인가?”
“집에 볼일이 있어요.”
카멜 왕자는 일전에 약속한 저택을 어스에게 선물했다.
매우 만족스러운 집이었다.
그냥 받아도 되나 싶을 만큼 좋았다.
“볼일?”
“이사도 준비해야 하고 일전에 맡긴 일의 일처리도 있어 겸사겸사 가려고요.”
“그런 일이라면 할 수 없지. 그럼 온천은 다음에 가야겠네.”
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텔레포트 마법진이 있는 신전 지하로 향했다.
매일 다닌 곳이라 이젠 눈 감고도 갈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스 경. 이번에도 원정이십니까?”
“아뇨, 이번엔 집에 가려고요.”
당연히 텔레포트 마법진을 관리하는 신전 소속 마법사들과도 친숙한 관계로 발전했다.
“걱정했는데 쉬신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푹 쉬다 오세요.”
“늦어도 이틀 안에 올 거예요.”
“좀 더 쉬시지. 마법진을 가동하겠습니다.”
* * *
눈 깜빡할 사이에 헥터 왕국에 도착한 어스는 제일 먼저 중개인 한스의 집으로 향했다.
이동 중에 본 왕도는 아직까지 던전 브레이크의 영향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솔론 왕국이었다면 진작 정리되었을 텐데 아직도 이러네.’
왕족, 귀족, 관리 할 것 없이 죄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 보니 죽어나는 건 집도 직장도 잃어버린 피난민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스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이네요.”
“예.”
“그럼 바로 볼까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전날 어스는 한스에게 실력 있는 경호원을 부탁한 적이 있었지만 시국이 뒤숭숭하여 처음으로 한스는 난색을 지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이종족 노예였다.
어스를 대신하여 한스가 구입한 노예는 1남 2녀로 모두 엘프였다.
“이제부터 너희의 주인이 되실 분이다. 한 명씩 앞으로 나와서 자신을 소개하도록.”
한스는 사무적인 어조로 그들에게 말하였다.
세 노예를 보자마자 어스는 마음 한곳이 불편함을 느꼈다.
인간도 아닌 이종족 노예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전날, 수인족 노예를 봤을 때 그랬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엘프 노예들을 보자 이런 감정이 들었다.
대체 왜?
어스의 상념은 한스의 재촉을 받은 노예가 입을 열면서 깨졌다.
“새로운 주인님을 뵙습니다. 알엘이라고 합니다.”
알엘의 얼굴은 흉터 투성이었다.
숲의 아이 혹은 미의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의 용모가 그래서 많이 가려졌다.
알엘은 전전 주인에 의해 거세된 남자였다.
엘프 노예가 귀한 걸 생각할 때 이는 이해할 수 없는 조치였다.
종마처럼 사용해도 충분히 이득을 볼 수 있었으니까.
아무튼 그래서일까? 더더욱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니, 분노의 감정이 일었다.
“흠흠. 반가워. 능력은?”
“익스퍼트 상급입니다. 하급 불의 정령과 계약했습니다.”
인간 사회에선 보기 드문 능력자였다.
그가 만약 이종족이 아닌 인간이었다면 왕실 근위대도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며, 지방 영주 밑에 있었다면 기사단 단장이나 부단장 자리는 충분히 꿰찰 수 있는 인재였다.
그러한 자가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물건처럼 팔리고 있었다.
더해 마법 계약서와 병행된 세뇌에 의해 자유 의지도 없다.
그 때문에 새로운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에게 어떤 일을 시킬 것인지에 대한 일체의 궁금증조차 갖지 않았다.
‘마음이 묵직해지네. 잘 대해 줘야겠어.’
“에리엘입니다. 익스퍼트 초급입니다. 물의 중급 정령과 계약했습니다.”
알엘과 달리 에리엘은 멀쩡했다.
마지막으로 초이라는 이름의 엘프가 인사했다.
“초이입니다. 익스퍼트 초급입니다. 땅의 하급 정령과 계약했습니다.”
하나 첨언하자면 엘프라고 모두 정령과 계약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인간의 노예로 살아가는 엘프의 경우 극히 드물다.
이렇다보니 어스는 저들을 구입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액수를 지불해야만 했다.
총 1억 7천만 테스로, 이 정도면 헥터 왕국에서 어스네가 살고 있는 집 56채를 살 수 있는 액수다.
하지만 어스는 이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앞으로 잘 부탁해.”
* * *
어스가 이종족 노예를 대동하고 집에 나타나자 다들 그의 손님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엘프들이 후드를 벗자 약속이라도 한 듯 놀랐다.
이종족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사실 일반인이 이종족을 만나거나 보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어스는 그들에 대해 짧게 설명한 뒤 고용인 모녀들에게 일러 그들이 당분간 쉴 방을 내주도록 부탁했다.
엘프들은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을 봤음에도 인형처럼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이종족 노예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우리가 그들을 들이게 될 줄은 몰랐네.”
“불편해?”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의 경우 이종족에 대한 경멸과 혐오의 마음이 크다.
다행히 이 집에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없었다.
어스가 보기엔 그랬다.
“저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네.”
어스는 1층 응접실에 가족을 비롯하여 거너, 아그네스, 린다, 니코 그리고 푸리엘과 함께하고 있었다.
뜻밖에도 푸리엘은 엘프 노예들을 본 순간부터 냉기를 풀풀 날리고 있었다.
‘왜 저러지? 성기사들과 죽기 살기로 싸운 주제에 설마 골수 신앙인은 아닐 텐데.’
푸리엘의 태도가 신경 쓰였지만 일단 그 문제는 나중으로 미루었다.
“이사 준비는 끝났어?”
“네 말대로 가져 갈 수 없는 건 모두 처분했어. 일정이 잡히면 그때 마무리 하려고.”
어머니의 말에 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너 형, 가게는?”
“반값에 내놓아서인지 금방 팔리더라. 나 같아도 그 값이면 영혼을 저당 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사고 봤을 거야.”
“아쉬워할 필요 없어. 재물은 또 모으면 되는 거니까.”
이는 어스이기에 쉬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솔론 왕도까지 가려면 꽤 먼데 준비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어. 마차도 구입해야 하고 경호를…… 아! 이종족 노예들의 실력은 어때?”
국내도 아닌 국외로 이사하는 것이기에 다들 고민이 많아 보였다.
“신전에 있는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갈 거니까 여행에 필요한 준비는 필요 없어.”
“테, 텔레포트 마법진? 마탑이 아니고 신전에 그런 게 있다고?”
“이건 비밀이야. 어디 가서 떠들면 안 돼.”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놀람과 감탄으로 물든 장내에 유일하게 냉담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푸리엘이었다.
그녀와는 진지하게 대화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저들 모두 익스퍼트야. 그중 알엘은 익스퍼트 상급이고.”
“이, 익스퍼트 상급? 방금 익스퍼트 상급이라고 했어?”
“어.”
“미, 미친 어떻게 익스퍼트 상급의 실력자가 노…… 아.”
“거너 형은 물론 모두에게 말할 테니 내 말을 잘 들어줬으면 좋겠어. 그들의 신분이 노예라곤 하지만 도구처럼 막 다루지 않았으면 좋겠어. 물론 그런 사람은 없을 거라고 믿어.”
할 말을 끝낸 어스는 그들과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눈 뒤 푸리엘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보자마자 인상 쓰던데 내가 계약을 이행하지 않아서 그래? 그렇다면 그건 네가 이해해줘야 해. 나라고 계약을 이행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니잖아.”
“그 부분은 이해해요.”
“다행이네. 그런데 왜 뚱해 있는 거지? 나 때문이 아니면…… 혹시, 너 엘프들 때문에 그런 거야?”
룬 교단으로 인해 사람들이 이종족에게 갖고 있는 선입견은 몹시 차갑다.
그러한 정서가 팽배하다 보니 이종족을 벌레처럼 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종족 노예를 해치려 자는 없다.
그랬다간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물어내야 할 테니까.
푸리엘은 대답하지 않고 표정만 찡그렸다.
이를 멋대로 해석한 어스는 정색했다.
“네가 이종족을 혐오하는 건 네 마음이야. 하지만 내 집에 들어온 엘프들을 학대하는 건 용납할 수 없어. 만약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면 분명히 말할게. 그 순간 넌 네 집에서 나가야 할 거야.”
푸리엘 입장에서 어스의 경고는 황당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엘프인 자신이 엘프를 어찌 미워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어스의 태도는 마음에 들었다.
“난 어스 님의 약점을 쥐고 있는데 그럴 수 있나요?”
마음이 한결 풀어진 푸리엘은 답지 않은 농담을 던졌다.
“마법 계약의 무서움을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알죠, 잘.”
“여하튼 내 말 명심해 줘.”
“그러죠. 그럼 그들의 지휘권은 내게 주는 건가요? 어차피 어스 님을 경호할 수 없으니 차선책으로 어스 님의 가족을 경호하죠.”
그렇게까지 하며 자신의 곁에 남으려는 푸리엘의 저의가 궁금하다.
그러나 본인이 입을 열기 전까지 강제할 수 없었다.
이 또한 마법 계약서의 내용 중 하나다.
“그래도 괜찮겠어?”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하겠어요.”
그렇다고 1억 7천만 테스나 주고 구입한 노예들을 그녀에게 맡길 생각은 없었다.
‘그럼 누구에게 맡기지?’
생각나는 사람은 거너, 아그네스, 린다였다.
푸리엘보단 그쪽이 더 믿을 수 있다.
다만 감독관이 너무 많으면 엘프 노예들에게 혼선이 빚어질 수 있기에 그 점은 피해야 했다.
그럼 셋 중 한 명인데.
‘린다 누난…… 음, 성격상 무리야, 무리.’
린다는 배제했다.
그럼 거너와 아그네스 둘 중 하나만 남았다.
‘부탁하면 들어주긴 할 테지만, 두 사람에겐 부담이지 않을까?’
처음부터 가족의 경호원으로 고용하였다면 모를까 그들이 원하는 진로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맞아 떨어져서 데려온 사람들이기에 어스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푸리엘뿐인가?’
어스는 결정을 내렸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그녀를 신뢰할 수 없다.
그러니.
“감독관이 되고 싶으면 이것부터 작성하자.”
어스는 마법 계약서를 꺼내들었다.
팔랑팔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