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마치 정복자라도 된 듯 당당한 표정으로 베로니카 단장이 돌아간 뒤 어스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가족과 함께 잠적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지하의 텔레포트 마법진이면 농장 외곽에 배치된 감시의 눈길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대비할 수 있었으니 결정만 내리면 피신은 문제없었다.
하지만 그리한다면 연인과 지인에게 해가 될 게 분명했다.
또한 아도니스에 대한 정보도 확실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뤼빅스에 사는 이종족이나 혼혈들이 겪고 있는 일들이 아도니스에서도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으니까.
고블린 무리의 습격으로 지금은 지도상에서 사라져버린 고향 마을에서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면 이런 고민도 할 수 없겠지만, 지금은 당시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존재했다.
하아.
‘전보다 바빠지겠지만 수련한다고 생각하면 돼.’
세상 사람들, 아니 가족조차 모르는 자신의 성장 방법을 생각하면 지금처럼 은밀히 던전을 찾아 헤매는 것보단 차라리 교단이 가진 촘촘한 텔레포트 마법진과 정보에 기대어 움직이는 편이 보다 효율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교단과 자신의 관계다.
에스터 추기경을 통해 일방적으로 사퇴한 뒤 잠적했으니 저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상황이다.
그러니 전처럼 자유롭게 활동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그건 진심 내키지 않는 일이다.
‘자충수를 뒀다는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나온 말인가 보네.’
에스터 추기경이 그리 숙청될 줄이야, 당시엔 상상도 못 했으니 사실 경거망동은 아니다.
아무튼 당장은 교단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전처럼 교단 소속이 되어 활동하는 건 거듭 생각해도 도저히 내키지 않았다.
그러니 외부의 조력자로서 저들에게 협조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구축해야 될 것이다.
다행히 자신은 솔론 왕국의 귀족이니 이를 활용하면 되리라.
어차피 교단과 각 왕국은 동맹을 결성하여 던전과 그리고 던전 브레이크로 인한 몬스터 웨이브에 대응중이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어스는 마법 통신구를 꺼내 들었다.
‘보자, 왕세자 저하의 번호가…….’
* * *
대륙 전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파생한 몬스터 웨이브는 어스가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피해가 심각했다.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마을이 수십 곳에 달했으며, 어떤 곳은 영지 전체가 무너진 경우도 있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대륙의 모든 왕국은 동맹을 결성하여 성전을 선포한 교단과 함께 이에 맞서고 있는 중이었다.
솔론 왕국 역시.
여기서 하나 다행한 건 솔론 왕국의 경우 몬스터 웨이브의 발생 빈도가 타국에 비해 적은 편에 속했다.
특히, 왕국 남부와 동부의 경우 몬스터 웨이브는 단 한 차례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에 많은 이들이 의문을 품었지만 이유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사실 두 지역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하지 않은 건 어스 덕분이었다.
그의 원정이 주로 이 두 지역에서 이뤄진 때문이었다.
“왕세자 저하. 테리우스 백작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테리우스? 어스 백작 말이냐?”
“예, 저하.”
칼렉 왕세자는 국왕을 대신하여 던전 원정과 던전 브레이크의 영향으로 발생한 몬스터 웨이브에 대한 지원과 대책 마련을 담당하고 있었다.
솔론 왕국은 다른 왕국들에 비해 그 피해가 적었지만 아예 없지 않았기에 칼렉 왕세자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칼렉 왕세자는 시종의 손에서 즉시 마법 통신구를 받아들었다.
-어스 백작, 오랜만이오. 몸은 좀 어떠하오?
-많이 나아졌습니다. 저하.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연락한 건 혹시?
-병이 많이 나아져 이젠 활동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일전 왕세자 저하께서 하신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오! 그게 정말이요?
-예, 하지만 그전에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해주셨으면 합니다.
-무엇이오? 내 온 힘을 다해 백작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소.
-실은…….
어스는 베로니카 단장이 찾아온 사실과 그녀가 자신에게 제안한 내용에 대해 소상히 알렸다.
-성기사로 다시 복직은 어렵지 않소? 설마, 백작을 디콘으로 복무시키겠다는 건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이는 백작은 물론 우리 왕국을 무시한 처사군요.
교단을 좋아하는 권력자는 없다.
특히, 가진 권력이 큰 사람일수록 교단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그럼에도 그들이 교단에 맞서지 못하는 건 그들의 힘이 강대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권력자들이 교단에 마냥 끌려다니는 건 아니다.
반발할 땐 확실히 반발한다.
물론 그 홀로 하는 경우는 없었다.
여럿이 힘을 모아 목소리를 냈다.
특히, 국가 주권에 관한 문제에 있어선 사이가 나쁜 나라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을 모았다.
안 그럼 교단에 모든 걸 내줘야 하기에 그들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저 역시 그 점이 걸려서 베로니카 단장에게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하루의 말미를 벌었습니다. 제 사정을 모두 말씀드렸으니 왕세자 저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백작은 솔론의 귀족이요. 당연히 왕국의 깃발 아래서 움직여야 하오. 내 외교적인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교단의 행보를 막겠소.
-그럼 소신은 왕세자 저하를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통신을 끝낸 칼렉 왕세자는 그 즉시 연합 회의를 소집했다.
아니, 그전에 각 왕국의 대표들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여 힘을 실어 줄 것을 부탁했다.
대신 그들이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거기엔 어스의 파견도 들어 있었다.
그 결과…….
* * *
어스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날리고 오늘 그 대답을 듣기 위해 준비하던 베로니카 단장은 교황과 통신한 후 크게 분노하여 식탁을 내려쳤다.
그녀의 손에 탁자는 형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 단장님?”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스 그 어린 여우가 칼렉 왕세자를 움직였다.”
“그게 무슨?”
“교단이 아닌 솔론 왕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기로 했어.”
“그럼 방금 그 연락이?”
“그래, 성하께서 보낸 것이다.”
“그럼 어찌 되는 것입니까?”
“교단의 품을 떠났다고 봐야지.”
“그를 그리 쉽게 풀어준다니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늦었어. 연합 회의에서 결정 났어. 하루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확답을 들었어야 했는데. 내 탓이다, 내 탓.”
베로니카 단장은 허탈한 표정으로 의자에 주저앉았고, 그녀의 수행원들 역시 황당한 마음을 가누느라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하지만 누구도 베로니카 단장을 탓할 수 없었다.
어스가 이런 식으로 나올 것이라곤 저들 역시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고작 하루 만에 이런 결과를 나올 것이란 것 역시.
“그럼 저희의 계획은?”
“놈의 가족을 인질로 삼을 명분이 사라졌어.”
“그럼 놈을 이단 재판에 회부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일단 엮어 놓고 놈의 처우를 결정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솔론은 물론 다른 왕국들도 좌시하지 않을 거야. 칼렉 솔론의 수완을 생각하면 모르긴 몰라도 거기까지 내다보고 모종의 조치를 강구했을 공산이 커. 그러니 교황께서 손을 떼라는 하명을 내리신 게지.”
“그럼 이대로 철수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하께서 명하셨으니 도리가 없어.”
베로니카 단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거스티 경이 통신을 보냈습니다.”
“거스티?”
“예.”
“내게 직접 연락하지 않고 왜 네게 연락한 거지?”
“통신 중이라 연락이 안 된다며 저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내용은?”
“어스 백작이 애덤 마을에 있는 던전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들어가기 전 백성들을 모아 놓고 연설까지 하였답니다.”
“연설?”
“대륙에 드리운 몬스터 웨이브 사태에 맞서 솔론 왕국의 귀족으로서 그 의무를 다하겠다는 내용입니다.”
“백성들의 반응…… 아니, 됐다. 당연히 열광했을 테지. 모두 일어나 애덤 마을로 간다.”
“애덤 마을은 왜?”
일이 틀어진 이상 어스를 만나봐야 열만 받을 뿐이다.
이를 잘 알기에 베로니카 단장의 말에 다들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경고를 해주려 함이다.”
대체 무슨 경고를 해주려는 걸까?
다들 궁금했지만 베로니카 단장의 굳은 표정을 보자 입도 뗄 수 없었다.
* * *
애덤 마을 주민들을 모아 놓고 한바탕 연설을 한 어스는 가뿐한 마음으로 던전에 입장했다.
이번 던전은 광활한 모래사막이었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네. 시쿠가 있는 방향이 저쪽인가?’
시쿠와 함께 행동하고 있어 푸리엘 일행의 위치는 단숨에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찾을 생각은 없었다.
최대한 빨리 던전을 닫고 만날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부탁을 받자마자 발 빠르게 움직여 준 칼렉 왕세자였다.
‘블링크!’
사막이 제아무리 광활하다지만 그 끝이 있기 마련이다.
걸어선 까마득한 거리일지 모르지만 블링크를 사용하는 어스에게 있어 사막을 횡단하는 일은 집 안에서 마당에 나오는 일처럼 손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쉴 새 없이 블링크를 시전하던 어스의 눈에 푸른 오아시스가 들어왔다.
오아시스엔 이곳까지 오면서 목격했던 몬스터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 중심엔.
‘놈이 보스네.’
보스를 확인한 어스는 지체하지 않고 콜 라이트닝을 퍼부었다.
콰르릉, 번쩍!
* * *
“오오, 던전이 사라진다!”
“맙소사! 영주님이 들어간 지 2시간이 채 안 됐는데.”
“던전 파괴자라 불린다더니 정말이네, 정말이야. 허허.”
“그런 분이 우리 영주님이라고. 다른 곳은 몰라도 우리 영지만큼은 던전이나 몬스터 브레이크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야. 대륙 유일의 안전한 곳이 될걸.”
“땅값 장난 아니게 오르겠네. 흐흐.”
부동산이 거론되자 모인 백성들의 두 눈이 횃불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불과 어제만 해도 가까운 도시로의 이주를 고민하던 모습은 더 이상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오늘내일한다던 소문의 그 영주가 병마를 떨치고 일어났으니까.
더해 소문으로만 들었던 영주의 실력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으니까.
던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어스와 앞서 원정에 나섰던 이들 모두가 그 앞에 나타났다.
백성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어스는 그들의 환호를 뒤로한 채 마을 내 회관으로 걸음했다.
그 뒤를 어미닭을 쫓는 병아리처럼 백성들이 뒤따라 움직였다.
자신을 향해 열광을 쏟아내는 백성들을 이대로 돌려보내자니 섭섭한 느낌이 든 어스는 마을 내 주점에 일러 백성들에게 술과 음식을 공짜로 내주도록 지시했다.
물론 백성들이 먹은 값은 후불로 계산해주기로 했다.
탁.
“백성들 모두 돌아갔습니다. 영주님.”
“그래, 고생했어.”
“그런데 이렇게 행차하셔도 괜찮습니까?”
“상관없어.”
어스는 어제 있었던 일을 푸리엘에게 설명했다.
베로니카 단장의 등장과 그녀의 협박에 잔뜩 굳어 있던 푸리엘은 끝에 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왕세자의 수완이나 배짱이 대단하군요. 그 일을 단 하루 만에 해치우다니.”
“그러니 카멜 왕자가 칼렉 왕세자를 인정하고 왕위 경쟁을 스스로 포기한 거지.”
“그럼, 곧장 왕도로 가실 겁니까?”
“왕세자가 수고해 줬는데 가만있으면 안 되지 적극적으로 위신을 살려 드려야지.”
“그럼 당분간 영지로 내려오지 못하시겠군요.”
“그래, 그러니 네가 영지를 잘 관리해줘. 공사도. 참, 그리고 이종족 노예…… 흠흠. 아무튼 기회가 되면 이종족을 구입해서 영지로 내려보낼 테니까. 그리 알고 있어.”
그 말에 푸리엘은 몹시 기뻐했다.
“로엘 님께 재정 지원을 요청하겠습니다.”
“준다면 나야 고맙지.”
이후 어스는 필요한 지시를 내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곧장 왕도로 출발할 수 없었다.
손님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영주님, 베로니카란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사정은 어제와 180도 달라졌지만 만나봐야 스트레스다.
“왕도로 갔다고 전해.”
어스의 육신은 순식간에 회관 창문 저 너머 상공으로 이동했다.
그러곤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저와 같은 위력의 블링크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을 거야.’
고개를 내저은 푸리엘은 회관을 나섰다.
영주님을 열 받게 만든 장본인의 혈압을 어찌하면 잔뜩 올릴 수 있을까? 고심하며.
“베로니카 님 되십니까?”
“그대는 누군가?”
“테리우스 백작 영지의 영주 대리인 푸리엘이라고 합니다.”
“어스 백작은?”
“이런, 영주님께선 이미 왕도로 출발하셨습니다. 1초만 일찍 오셔서도 만나실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유감입니다. 베로니카 님.”
“그가 나와의 만남을 거절한 것인가?”
“아닙니다. 정말 딱 1초만 일찍 오셨으면 만나실 수 있었을 겁니다.”
1초를 유독 강조하는 푸리엘의 말에 베로니카 단장의 얼굴이 구겨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