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앞서 어스가 가족을 데리고 자신의 영지로 내려가면서 왕도의 저택은 팔지 않고 계속 가지고 있었다.
늦은 저녁 시간에 왕도에 도착한 어스는 왕세자는 내일 만나기로 하고 일단 저택으로 향했다.
“어스!”
저택은 거너, 아그네스, 린다, 니코가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 네 명으로 이 큰 저택을 관리하는 건 어렵다.
때문에 이종족 노예들이 저택을 관리하고 있었다.
“거너 형, 어스라니. 백작님이라고. 영지를 가진.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
동패 용병에 불과했던 니코는 어스라는 행운을 만난 뒤로 때깔이 완전 달라졌다.
과거의 용병이었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내력을 모르고 지금 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부유한 상인이었다.
“아부는.”
린다의 손이 니코의 뒤통수를 갈겼다.
“악! 누나! 내가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아?”
하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린다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버벅거리는 린다를 일별한 거너는 낮게 헛기침했다.
“니코의 말이 맞다. 언제까지 그를 과거의 어스 대하듯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더욱이 그는 우리의 고용인이잖아.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
모두에게 말하는 듯했지만 실상 거너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봐! 내 말이 맞잖아.”
어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날 백작이라 부르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어요. 형들이나 누나들까지 그럴 필요 없어요.”
아도니스로 떠난 카멜 일행이 돌아와서 그곳의 정보를 손에 넣게 된다면 그땐 과감하게 이주할 생각이다.
교단에 미운털이 박힌 채로 뤼빅스에서 사는 건 언제 터질지 모를 화산 옆에 사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작위도 영지도 시한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전에 교단이 몰락하면 대단히 감사한 일이겠지만 수천 년을 이 땅의 진정한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는 교단이 그사이에 무너지는 건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니 그런 기적은 애초 바라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오! 역시, 어스.”
어스의 말에 감동한 린다가 폴짝 날아선 어스를 한 팔로 안았다.
어스도 린다를 가볍게 포옹한 뒤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한동안 왕도에 오기 힘들다고 했잖아?”
“그럴 일이 생겼어.”
“일?”
어스의 표정이 제법 심각했기에 다들 긴장했다.
거너, 아그네스, 린다, 니코 네 사람과 일일이 눈을 마주친 어스는 자신에게 닥친 일들에 대해 조용히 말하였다.
네 사람은 여러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감정의 끝은 안도였다.
“정말이야? 에스터 추기경이 주…… 흐흠. 문제가 생긴 게?”
“응.”
“솔론 왕국이 부유하고 강대한 왕국이라곤 하지만 교단에 비할 수 없어. 과연 솔론이 너의 제대로 된 방패막이가 되어 줄 수 있을까?”
“내가 솔론 왕국 소속으로 활동해도 당장은 날 어쩌진 못할 거야.”
“하긴, 던전을 너만큼 잘 처리할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까.”
“헐, 던전이 어스의 방패막이네. 던전으로 인한 피해를 생각하면 하루빨리 없어져야겠지만 어스를 생각하면 없어지면 안 되네.”
거너에 이어 니코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하였다.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아그네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 칼렉 왕세자 저하를 만나면 바로 일을 시작하는 거야?”
“그래야죠.”
“그런데 너랑 친한 카멜 왕자는 어디 갔어?”
어스는 저들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말했지만 이종족 해방 연합과 아도니스에 대해선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너무나 위험한 비밀이기에.
“글쎄요. 참, 사업은 어때요?”
“아직까진 땅 짚고 헤엄치기긴 한데 에스터 추기경이 네 말처럼 진짜 숙청된 것이라면 우리도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
“그건 거너 형이 결정하세요.”
에스터 추기경이 밀어준 덕분에 왕도에 자리 잡은 사업은 현재 문어발식으로 확장 중에 있었다.
덕분에 사업장에서 나오는 수익도 상당히 쏠쏠했다.
“참, 어스 네게 줄 게 있어.”
거너는 공간 주머니에서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뭐죠?”
“네가 현상금 걸고 모으던 열매. 열어 봐.”
로엘을 통해 필요한 조각을 모두 받기로 한 뒤 거너에게 맡긴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동안 말하지도 않았는데 계속 모았을 거너에게 고마웠다. 한편으로 기대감 또한 들었다.
거너의 표정에선 자신감이 뿜어지고 있었다.
대체 몇 개나 확보했기에 저런 표정일까?
가죽 주머니를 열자 시스템이 곧장 반응했다.
-위그드라실의 조각 19개를 확인했습니다. 습득하시겠습니까?
예상을 벗어난 숫자에 어스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대체 어디서 이 많은 수의 조각을 입수한 걸까?
“이건 어디서 구한 거죠?”
“시국이 뒤숭숭해지면서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 상단끼리 힘을 합치기로 했어. 일전에 말했는데 기억나?”
마법 통신구로 그런 보고를 받은 기억이 그제야 떠올랐다.
“아, 기억나요. 그럼 이건?”
“맞아. 그들을 통해 입수했어. 그런데 그게 대체 뭐야? 마법사의 힘을 키워주는 영약이라도 되는 거야?”
“내게만 적용되는 비약을 만들 수 있는 핵심 재료예요.”
“포션처럼?”
“그래요, 포션처럼. 참, 조쉬 씨는 어디 있어요?”
“공방에 있을 거야. 몬스터 웨이브로 인한 피해가 적지 않은 만큼 몬스터 부산물 수급이 과거에 비할 수 없이 나아졌거든. 그거 소화하려면 공방을 풀로 돌려야 해. 물론, 조쉬 씨 혼자 일하는 건 아니야. 이번에 연금술사를 대거 고용했어. 요즘 공방 덕분에 수익이 제법 짭짤해. 참, 저택 지하에 포션 가득 쌓아 뒀어. 오랜만에 봤는데 간단하게 한잔하는 건 어때?”
“다음에요. 들릴 곳이 있어서.”
“왕세자 저하는 내일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분 말고요.”
위그드라실 조각이 담긴 가죽은 홀쭉한 모습으로 어스의 인벤토리로 들어갔다.
그를 마주하고 앉은 누구도 가죽 안의 조각이 사라지는 걸 알 수 없었다.
* * *
교황이 야심차게 만든 던전 처리부가 어스가 빠지면서 유명무실해지자 레이몬드 주교의 처지는 공중에 붕 떠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 에스터 추기경마저 실종된 이후 레이몬드 주교는 한순간에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주인님, 어스 백작님이 오셨어요.”
어스의 주변엔 인간보다 이종족이 더 많다.
그처럼 레이몬드 주교 옆에도 인간보단 이종족이 더 많았다.
특히, 묘인족이.
심란한 마음을 술로 달래던 레이몬드 주교는 어스의 방문에 제 귀를 의심하다 이내 벌떡 일어나선 맨발로 뛰쳐나왔다.
“어, 어스 백작! 으허어어엉.”
오랜만에 본 레이몬드 주교는 그새 반쪽이 되어 있었다.
반쪽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과거 풍채가 워낙 넉넉했기에 성인 남성 두 명분은 된다.
그런 사람이 돌진하였으니 이를 받아주기 벅차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피할 수밖에 없었다.
다 큰 남자를 껴안고 바닥을 뒹굴 순 없는 노릇이니까.
“술 마셨어요?”
“어? 조, 조금. 요즘 내 기분이 엉망이야.”
“추기경님은 여전히 소식이 없어요?”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는데 도저히 찾을 수 없었어. 아무래도 추기경님께 안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아.”
레이몬드 주교는 풀이 잔뜩 죽은 모습으로 연방 훌쩍거렸다.
‘이 말을 해줘야 할까?’
레이몬드 주교의 상태를 보니 차마 에스터 추기경이 숙청되었을 확률이 높다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에스터 추기경 한 사람만 바라보고 저리 살게 할 수도 없었다.
그와의 인연도 보통 인연은 아니었으니까.
어스는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액체가 속을 따뜻하게 감싸며 축 쳐진 기분을 끌어올렸다.
“주교님. 아니, 형님.”
“어? 응.”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요. 알았죠? 베로니카 단장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스는 베로니카 단장과 나눈 대화를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하였다.
자신이 캐치했듯 레이몬드도 캐치하길 바랐다.
그의 마음이 전달되었음일까?
레이몬드 주교가 주저앉아 대성통곡했다.
나라 잃은 백성도, 부모 잃은 효자도 저리 서럽게 울지 않으리라.
두어 시간을 그리 서럽게 울던 레이몬드 주교가 다시 몸을 일으키자 사람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비장하다고 할까?
레이몬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스.”
“예? 예.”
“난 어릴 때부터 천덕꾸러기신세였어. 그런 내가 사람대접 받으며 살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에스터 추기경님 덕분이었어. 날 도와준 건 룬도 아니고, 교단은 더더욱 아니었지.”
명색이 주굔데 신을 부정하다니, 누가 들을까 겁난다.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묘인족 하인과 하녀들이 들어왔다.
아래로 축 처진 귀와 꼬리, 커다란 두 눈에 맺힌 눈물은 레이몬드를 향한 진심으로 가득했다.
레이몬드를 향한 애정이 없고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말이 샐 걱정은 없겠네.’
“형님, 많이 취하셨습니다. 다음에 이야기해요.”
“아냐, 다 말할래. 그리고 나 내일 바로 사직서 낼 거야. 추기경님이 없는 교단 따윈 개나 줘버리라고 해.”
에스터 추기경을 향한 레이몬드 주교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런 그에게 추기경을 숙청한 교단은 더는 함께할 수 없는 곳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지옥이리라.
“혀, 형님.”
“더 들어줘. 그래서 말인데. 나랑 우리 애들 테리우스에서 살면 안 될까? 내가 딱히 갈 곳이 없어서 말이야.”
“제 영지요?”
“추기경님을 생각하면 복수를 해야겠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힘이 있어? 백이 있어? 이젠 아무것도 없잖아. 안 될까? 나 받아주면?”
“말이 백작 영지이지 완전 촌 동네인데 괜찮겠어요?”
“괜찮아. 난 우리 애들만 있으면 돼.”
레이몬드의 말에 감동한 것인지 묘인족들이 단체로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고양이가 원래 의리가 있는 동물이었던가?
“나야 상관없는데 괜찮겠어요?”
“바, 받아주는 거야?”
“형님이 원하면 그리 하세요.”
“고마워, 정말 고마워. 크흑흑.”
또 운다.
생긴 건 황소도 때려잡게 생겨놓고선 어찌 저리 마음이 약한 것인지.
“내 재산이랑 추기경님이 내게 맡긴 비밀 재산 정리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거야. 몽땅 정리하고 바로 내려갈게. 이젠 교단은 쳐다보기도 싫어.”
추기경의 비밀 재산? 설마, 그 재산을 레이몬드가 관리했단 말인가? 새로운 사실에 어스는 내심 깜짝 놀랐다.
“추기경님의 비밀 재산이요?”
“이건 비밀이야. 누구도 알아선 안 돼. 내 자네니까 말하는 거야.”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굳이 왜 하시죠? 제가 딴마음 먹고 그 재산을 빼앗을 수도 있는데.”
어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 예상하지 못한 듯 레이몬드는 크게 당황했다.
주인이 당황하자 레이몬드가 거느린 묘인족들도 그에 동조한 듯 어스를 경계했다.
하나 그러한 분위기는 잠깐이었다.
레이몬드의 손짓 한 번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빼, 빼앗지 말고 그냥 달라고 해. 추기경님에 이어 자네까지 잃고 싶지 않아. 내겐 이제 자네와 묘인족 친구들이 전부니까.”
“빼앗지도 달라고 하지도 않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아냐, 영지를 개발하려면 돈이 많이 들 텐데 명색이 의형인 내가 지원해야지. 나도 거기에 뼈를 묻을 생각이니까. 참, 농장에 땅 좀 내주게 거기다 집을 짓고 싶어.”
카멜 일행이 아도니스에서 돌아오면 아도니스로 이주할지도 모른다.
그리된다면 작위도 영지도 모두 부질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농장의 일부는 그냥 줘도 상관없다.
“그러세요. 푸리엘에게 말해놓을 테니까.”
“고맙네, 고마워. 참, 이종족 노예 병사들은 어때? 쓸 만하던가?”
“정말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이종족 노예를 더 수용할 수 있겠군.”
“더 있어요?”
“실은 자네에게 양도한 이종족 노예들은 추기경님의 사병들이었어. 이제 추기경님이 없으니 그들을 어찌 처리해야 할까 싶었는데 자네가 모두 갖게 마법 계약서는 영지에 도착하면 자네에게 넘겨주겠네. 그리고 다수의 혼혈들도 있으니 자네가 허락한다면 테리우스로 보내겠네. 법적인 문제는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으니 그 점은 걱정 안 해도 되네.”
재물보다 이종족 노예 병사 쪽이 더 어스의 마음을 끌었다.
‘앞으로도 내 영지엔 인간 병사는 필요 없겠네.’
이종족 노예로 구성된 영지군이라,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던전 문제가 정리되면 그땐 교단이 작정하고 자신을 괴롭히려 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도니스로 넘어갈 생각만 할 게 아니라, 차라리 교단을 박살 낼 계획을 세우는 게 나으려나?’
그러나 그건 현실성이 떨어진다.
교단이 보유한 무력도 무력이지만 대륙 전역에 깔린 신도들 때문이다.
그들을 모두 죽이지 않는 이상 교단은 건재할 수밖에 없다.
‘종교가 문제야, 종교가.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