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어스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처음엔 환청인가 싶어 무시했다.
아니, 달콤한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어 외면했다는 게 본심이다.
자신의 방에 비할 수 없는 열악한 막사가 눈에 들어왔다.
간이침대에서 일어나자 관절이란 관절이 죄다 아우성쳤다.
가볍게 몸을 풀고 막사를 나서자 눈부신 햇살이 그의 눈을 찔렀다.
그를 찾아온 자는 엔슬리 후작의 참모 중 하나였다.
“브리튼 남작?”
“예.”
“참, 오우거 보스는 발견했습니까?”
“아뇨, 없었습니다.”
“그 큰 덩치의 몬스터가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니 이상한 노릇이네요.”
시간은 벌써 정오를 살짝 넘긴 시간이었다.
눈만 잠깐 붙이고 일어나려는 마음으로 누웠는데 그사이 한 번도 깨지 않고 9시간을 내리 자버리고 말았다.
전시상태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세상모르고 9시간이나 잤다는 게 부끄러웠다.
더구나 별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중엔 교단에서 보낸 자들도 있었다.
만약 그중 하나가 살심을 품고 자신의 막사에 침입하여 암살을 시도했다면 어땠을까? 물론 막사 입구에 보초가 있었지만 평범한 병사가 암살자를 막을 순 없었을 것이다.
‘아! 아니구나. 시쿠를 소환해 뒀구나.’
로엘의 연락을 받고 실망했던 어스는 잠자리에 누우며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시쿠를 소환해 뒀었다.
‘시쿠, 주인님을 지켰다.’
시쿠와는 육성은 물론 의념으로도 대화가 가능했다.
어스가 시쿠를 떠올리자 기다렸다는 듯 반응한 것도 다 의념 대화가 가능한 때문이었다.
‘잘했어. 별일 없었지?’
‘주인님 자는 천막 지켜보던 자들은 있었지만 천막에 들어온 자는 없었다. 천막에 들어왔다면 시쿠가 파묻었을 것이다.’
‘누군지 봤어?’
‘얼굴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주인님.’
막사 앞에서 대충 봐도 근방을 오가는 자들이 수십 명은 넘는다.
그나마 이곳은 주요 인사들의 막사가 모여 있는 곳이라 덜한 편이지 눈길을 그 너머로 던지면 수백 단위로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것도 죄다 무장한 자들이다.
“어스 백작님?”
“아! 미안해요. 아직 잠이 덜 깼나 봐요.”
“오히려 편한 잠자리를 제공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들 역시 어스가 순시온 시에서 일을 끝내자마자 곧장 달려온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리 달려왔음에도 쉬지 않고 북부 전선에서 가장 강력한 무리의 몬스터를 소탕해 줬으니 저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보스 녀석만 처리했어도 깔끔했는데.’
역시 놈을 생각하자 아쉽고 또 한편으론 아까웠다.
만에 하나 놈이 다른 이의 손에 죽는다면 보너스 업적 포인트 4, 그리고 1만 코인을 날리는 것이다.
브리튼 남작과 함께 어스는 지휘관 막사가 아닌 엔슬리 후작 개인 막사에 도착했다.
“잠은 잘 잤는가?”
“예.”
“오우거 보스의 행방은 아직 찾지 못했네.”
“브리튼 남작에게서 들었습니다.”
“점심을 먹을 생각인데 함께 하겠나? 겸사겸사 연합군 주요 인사도 소개해주고 싶은데.”
인맥은 일단 넓히고 봐야 한다.
쭉정이 같은 인맥도 때론 쓸모가 있으니까.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배도 고팠기에 어스 역시 겸사겸사 수락했다.
다시 장소를 옮겼다.
엔슬리 후작의 주도 하에 어스는 각국에서 온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 모두 귀족 출신 무장들이었다.
그중엔 솔론 왕국 출신도 있었다.
그와는 좀 더 부드럽게 인사를 나누었고, 한때 조국이었던 헥터 왕국 출신과는 조금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자들도 있었다.
교단 소속 인사들이었다.
이를 제외하면 식사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음식 역시.
‘이런 걸 전장에서 먹을 수 있다니, 이래서 다들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건가?’
식사와 대화를 병행하며 어스는 시쿠에게 자신이 잠자는 동안 자신의 막사를 쳐다보던 자가 있는지 물었다.
‘여긴 없다. 주인님.’
장내의 주인공은 어스였다.
다들 어제 그가 한 일에 대해 칭송하며 다음엔 자신들의 왕국에 와주길 은근슬쩍 부탁했다.
아니, 그건 청탁이었다.
청탁의 대가는 칭송과 덕담이 전부다.
아무튼 그렇게 식사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 이 자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의 남자가 찾아왔다.
당장 전장 한복판에 서 있어도 상관없을 이상할 게 없는 완전무장을 갖춘 병사는 후작 앞에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후작 각하, 오우거 보스를 발견했습니다.”
어스의 디저트는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먹게 되었다.
“놈은 제가 꼭 잡고 싶습니다.”
“부탁하네, 어스 백작.”
어스는 또 한 번 엔슬리 후작,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마무리까지 확실하게 챙길 줄 아는 남자로 말이다.
그런 그의 태도에 솔론 측 인사들이 몹시 자랑스러워했다.
반면 헥터 왕국과 교단 측 사람들의 표정은 애매모호하기 그지없었다.
* * *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오우거 보스를 처치하기 위해 출동한 어스는 15분 만에 해당 지역에 도착했다.
‘멀리도 왔네.’
멀찍이서 오우거 보스를 지켜보는 병사들이 보였다.
인간을 만만히 보다 어제 호되게 당한 것 때문인지 오우거 보스는 강가 주변에 위치한 몇 개의 마을을 외면하고 하류까지 내려왔다.
만약 어스에게 당한 기억이 없었다면 그 마을은 모두 핏물에 잠겨버렸을 것이다.
놈은 갈대를 가르며 서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여기라면 시쿠의 손을 빌려도 될 듯했다.
물론 그전에 주시하는 자들이 눈을 가려야 한다.
‘시쿠.’
‘시쿠, 주인님 명령 기다린다.’
그러고 보니 시쿠가 아이템을 흡수하여 얻은 능력에 대해 듣지 못했다.
로엘의 연락에 실망도 실망이었지만 피곤하기에 미뤘다.
당장 급할 건 없으니 일단 경계심이 날카롭게 선 보스부터 처리하고 알아보기로 했다.
‘파이어 버스터!’
갈대밭을 향해 파이어 버스터를 연속으로 날렸다.
멀리서 놈을 주시하는 병사들의 시야를 가릴 목적이다 보니 딱히 놈을 맞출 필요는 없었다.
갈대가 적당히 마른 상태였는지 불은 금방 붙었다.
일대는 삽시간에 뿌연 연기로 뒤덮였다.
‘시쿠, 땅 파!’
갈대밭 아래 이미 몸을 숨긴 시쿠였기에 시쿠는 즉시 땅을 함몰시켰다.
폭음과 불길에 크게 놀랐던 오우거 보스는 시쿠가 판 구멍 속으로 푹 꺼졌다.
거대 신전도 함몰시키는 시쿠였다.
하물며 오우거 보스쯤이야 일도 아니다.
화재를 피해 달아나려던 놈은 첫발도 떼기 전에 지하로 추락했다.
‘콜 라이트닝!’
구덩이에 빠져 발버둥 치는 오우거 보스를 향한 콜 라이트닝 세례가 쏟아졌다.
제법 오래 버텼지만 전처럼 도망갈 상황이 아니었기에 놈의 선택지는 버티는 것 이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 상황은 어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던전 보스 베히톤을 처치했습니다.
-보너스 업적 포인트 4를 습득합니다.
-1만 코인을 습득합니다.
-레벨업.
-업적 포인트 3을 습득합니다.
-인벤토리 1을 획득합니다.
동급 던전 몬스터보다 오우거들의 코인이 많아 경험치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만 설마 레벨업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던 어스는 이에 크게 기뻐했다.
‘시쿠, 놈을 구덩이 밖으로.’
* * *
어제 어스가 최선을 다하고도 오우거 보스를 놓친 것을 알기에 엔슬리 후작은 급히 기사단을 파견했다.
그를 도와 오우거 보스를 처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난 상태였다.
더해 어스가 의도적으로 일으킨 화재 역시.
잿더미가 된 갈대밭엔 까맣게 탄 거대 오우거만 남아 있었다.
기사들은 그 전리품을 진지로 가져갔다.
놈의 사체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함했다.
정찰대의 보고를 들어 놈이 거대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사체를 보자 말문이 막혔다.
“동산만 하다더니 비유가 아니라 진짜 동산이네, 동산이야.”
“저런 놈이 존재한다는 것도 놀랍지만 이를 잡은 어스 백작이야말로 더 대단하군요.”
“그런데 어제는 놓쳤는데 오늘은 금방 잡았군요.”
초를 치는 자도 있었지만 이를 받아주는 이는 없었다.
아무튼 가장 골칫거리였던 문제마저 해결되자 사람들의 표정은 크게 좋아졌다.
특히, 파리스 왕국 사람들의 표정이.
엔슬리 후작은 어스를 크게 치하했다.
연합군에게 남은 건 이제 던전 브레이크의 영향으로 날뛰던 몬스터 박멸만 남았다.
단기간에 끝날 문제는 아니었지만 오우거라는 어려운 적수가 모두 사라진 지금 연합군이 가진 힘만으로 충분한 일이었다.
“그럼 전 돌아가겠습니다.”
어스의 도움을 받으면 수복이 더 빨라지겠지만 그의 도움을 기다리는 자들이 줄을 서고 있었기에 엔슬리 후작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아니, 붙잡을 수 없었다.
“시간이 된다면 내 집에 들러주게. 자네라면 언제든 환영하겠네.”
“감사합니다.”
엔슬리 후작의 초대에 응할 날이 올지는 알 수 없지만 좋은 인상을 남긴 건 어스 입장에선 득이었다.
어스는 곧장 남쪽 방향으로 블링크를 시전하며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그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마법 통신구를 꺼내 손가락을 급히 놀렸다.
* * *
솔론으로 복귀한 어스는 휴가를 냈다.
그가 연일 큰 공을 세웠기에 칼렉 왕세자는 기쁘게 이를 받아들였다.
사실 어스가 휴가를 낸 건 이유가 있었다.
칭호 활성화 후에 있을 신체 변화에 적응할 시간을 얻기 위함이었다.
퇴궐한 어스는 그길로 자신의 영지로 향했다.
‘루리아에게 가고 싶지만 다음으로 미뤄야겠군.’
몸이 떨어져 있으면 마음도 몸 따라간다는 말이 있었지만, 어스와 루리아의 관계에선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함께 있을 때보다 더 애틋해졌다.
나날이 변모하고 있는 자신의 영지를 상공에서 잠시 감상한 어스는 저택에 내려섰다.
문을 활짝 열고 소리치자 반가운 얼굴들이 달려왔다.
“아들!”
엘이나가 달려와 어스를 품에 안았다.
어머니 품에서 빠져나오자 이번엔 아버지가 다가왔다.
“장하다.”
그 한마디에 자신의 모든 감정을 녹인 행크였다.
부모님이 자신을 자랑스러워하자 어스 역시 뿌듯했다.
‘내가 살린 사람이 몇인데.’
어디 사람뿐이랴 수많은 이들의 삶의 터전 역시 구했다.
여동생 루시와도 잠깐 인사를 나눈 어스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가 온다는 말을 들었기에 욕조엔 뜨거운 물이 채워져 있었다.
던전과 몬스터 웨이브 처리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제대로 씻지 못했던 어스는 욕조에 모든 걸 풀어낸 뒤 홀가분한 모습으로 가운 한 장 걸치고 테라스로 향했다.
크세론 왕국 남부에서만 난다는 귀한 차와 테아노 왕국에서 공수한 말린 과일 한 조각을 베어 물며 여유를 즐겼다.
‘흐흐, 이제 몇 시간 후면 드디어 칭호를 활성화할 수 있어.’
이종족 해방 연합과 연이 닿지 않았다면 몇 년은, 아니 더 걸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간아 가라, 어서 빨리 가라.
평소엔 그리 잘 가던 시간이 왜 이리 더딘지.
분단위로 시간을 확인하던 어스는 그런 자기 자신의 모습에 픽 웃으며 남은 한 모금의 차를 입안에 톡 털어 넣은 뒤 시쿠를 소환했다.
녀석에게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쿠.”
“응, 주인님.”
“아이템 흡수하고 얻은 능력이 뭐야?”
“주인님, 엄청 일찍 물어본다.”
“그래서 불만이야?”
“시쿠는 주인님께 불만 없다. 불만을 가진다면 그건 시쿠 아니다.”
남을 섬기는 광신도는 눈살 찌푸릴 존재지만, 자신을 섬기는 광신도는 아름다운 법이다.
“그래 어서 말해. 어떤 능력인지?”
“시쿠, 주인님께 보여준다.”
“보여주지 말고 그냥 말해.”
땅 흔들기 같은 능력이면 저택 전체가 발칵 뒤집어질 일이기에 급히 만류했다. 자랑하고 싶어 안달인 아이를 억지로 주저앉히면 딱 저와 같은 표정이 아닐까 싶다.
잠시 시무룩해하던 시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시쿠, 나뭇잎 얻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쿠의 둥근 정수리에서 새싹이 뽕하고 튀어나왔다.
“…….”
설마 저게 끝?
어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아아, 그래. 저 새싹이 자라 성장하면 엄청 대단한 영약이 만들어지는 거야.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주인님?”
“흠흠. 그게 다야?”
“아니다. 더 멋진 거 있다. 하지만 주인님이 말만 하라고 해서 보여줄 수 없다. 아쉽다.”
역시 그렇지?
시쿠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어스는 녀석을 안고 단숨에 저택 뒤편 숲으로 이동했다.
“보여줘 봐.”
기대에 찬 어스에게 시쿠는 보란 듯 이번에 얻은 능력을 보여주었다.
자기 눈만큼이나 좁디좁은 어깨를 펴 보이며 어스와 눈을 마주쳤다.
정면에서.
어스와 눈이 마주친 시쿠는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허공을 날아다녔다.
작은 새싹을 연방 파닥거리며.
인지부조화에서 겨우 벗어났을 때, 자신의 생각과는 영 딴판인 그 능력에 어스는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넌 두더지라고 그런데 왜 나는 거야?’
보잘것없는 땅 흔들기에 이어 이번엔 비행 능력이라니…….
‘녀석이 좋아하는데 그럼 된 거지.’
절레절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