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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로 성장하는 마법사-188화 (188/250)

188화

어스가 내민 두 장의 백지에 요구사항을 빽빽하게 적었다.

물론 이 요구 전부 받아들여질 것이라고는 어스 자신도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봐도 황당한 요구도 많았으니까.

그럼에도 이처럼 빡빡하게 행동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협상에서 우위에 서고 싶었기 때문이다.

두 번의 마나 샤워를 통해 최상급 소드 마스터로 거듭난 베로니카는 실제 나이가 육십을 넘겼지만 겉보기엔 30대 초반이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어스는 이를 부러워했다.

수명이 다할 때까지 젊은 모습으로 왕성하게 살 수 있으니까.

‘마법 경지로 8서클이면 저 할망구처럼 살 수 있을 텐데.’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8서클 마법과 동일한 스킬을 구매하더라도 과연 건강과 젊음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일단 늙어 봐야 알 일.

당장은 까마득한 훗날의 일이기에 그러한 부러움은 잠시 제쳐두고 전면을 응시했다.

요구사항 첫 줄부터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한 베로니카 단장의 그 구김살은 펴질 줄 모르고 더 깊어졌다.

베로니카 단장은 어스가 작성한 요구사항의 4분의 1만 읽곤 손에서 내려놓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지금이라도 철옹성을 꺼내야 하나 싶어 심장이 덜컹했다.

“이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내가 언제 말로 했어, 글로 적었지.’

대놓고 말했다간 진짜 검을 뽑아들지 모르기에 어스는 표정 관리에 힘쓰며 입을 열었다.

“백지 계약서는 내가 아니라 교단에서 주지 않았습니까?”

“그대는 양심이 없는가? 한때나마 교단에 몸담았던 이력도 있지 않은가? 그래 이미 지난 과거를 들춰서 무엇할까. 신심으로 성기사가 된 인물도 아닌걸. 정말, 이 요구 모두 관철되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폐부를 찌르는 싸늘함에 어스는 몰골이 송연해졌다.

차라리 언성을 높이면 덜할 것 같은데.

깊디깊은 물속처럼 바닥을 알 수 없는 고요한 베로니카 단장의 시선을 보자 서둘러 협상에 임해야겠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저도 양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염토가 인류에게 미칠 악영향도 아는데 어떻게 무작정 제 욕심만 챙기겠습니까?”

“그런 작자가 이런 요구를 한단 말인가?”

베로니카 단장의 눈빛이 한결 누그러진 걸 확인한 어스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상급 소드 마스터의 마나 소드를 맨몸으로 받아도 버틸 정도가 되기 전까진 그녀 앞에선 여전히 긴장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부터 협상하도록 하죠.”

어스의 모든 것이 마뜩잖았지만 질질 끌어봐야 자신의 정서에 악영향만 끼칠 것이기에 베로니카 단장은 모른 척 넘어갔다.

그렇게 시작된 협상은 장장 3시간을 이어졌다.

결과는 계약 체결로 끝났다.

이 일을 통해 어스는 협상가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백지 두 장에 적은 엄청난 양의 요구조건 중에서 교단이 받아들인 건 다섯 가지였다.

-면죄부(100회 한정).

-불가침조약(테리우스 영지 한정).

-교단이 보유한 텔레포트 마법진 자유 사용.

-테리우스 영지에 한해 이종족 자유 인정.

-영지 개발에 필요한 재정 지원.

“고생하셨습니다.”

교단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일은 쉽지 않다.

대륙에서 그들은 절대 갑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니 애당초 이러한 자리는 만들어질 수 없다.

그들은 요구하고 상대는 들어줘야 하는 갑을 관계가 정립된 지 오래였으니까.

그런데 일개 영주가 그 대단한 교단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고 당당히 요구를 관철시켰으니 교단 입장에선 역사에 길이 남을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정식 계약서는 내일 가져오겠다.”

그 대단한 베로니카 단장도 지쳤는지 조금은 퀭한 얼굴을 하고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사실 일어날 힘도 없었다.

육체의 피로가 아닌 정신적인 피로감이 한계를 넘어섰으니까.

* * *

베로니카와 그 일행이 떠나고 집으로 돌아온 어스는 내리 4시간을 잔 뒤에야 협상 내용을 궁금하게 여기는 이들의 궁금증을 해소시켰다.

“이 조건을 모두 수용했다고요?”

“힘들었어.”

“오염토에 대한 교단의 위기감이 정말 컸나 보군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내용을 수락할 수 있는지.”

“저 역시 푸리엘 님의 의견에 동감입니다.”

푸리엘의 의견에 피구엘 역시 전적으로 동감을 표했다.

두 사람이 이처럼 놀라워하자 어스는 뿌듯함을 느꼈다.

“이종족의 자유가 인정되는 땅이라……. 역시, 백작님이십니다. 그들의 역린이나 다름없는 내용인데.”

“아직 도장을 찍은 게 아니니까 샴페인은 나중에 터트리는 걸로 하자고. 참, 로엘에게 연락해서 알려줘. 그리고 탐사도 중단하라고 해. 교단의 경계가 삼엄한 상황이라 자칫 발각될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미답지에 가 있는 동안 영지 방어에 힘써야 할 거야. 이번 계약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광신도가 있을지 모르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참, 로엘에게 이 말도 전해. 내가 알아볼 테니까 연합은 나서지 말라고.”

푸리엘을 향해 신뢰 어린 시선을 보낸 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의 얼굴이 돌연 활짝 폈다.

-던전 보스 아르미나를 처치했습니다.

-보너스 업적 포인트 4를 습득합니다.

-1만 코인을 습득합니다.

-아이템이 발견되었습니다.

-아이템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레벨업.

-업적 포인트 3을 획득합니다.

‘시쿠 이 녀석.’

존재 자체가 감동인 녀석이다.

자식을 놓으면 꼭 시쿠 같은 자식을 낳으리라.

그런데 연애도 못 하는 자신이 어느 세월에 애를 낳는단 말인가.

‘차라리 인간 말고 엘프를 사귈까?’

이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인간은 빨리 늙지만 엘프의 노화는 더디니까.

거기다 위그드라실의 계승자 칭호를 활성화한 이후 엘프들이 자신에게 보이는 호감을 생각하면 연애도 참 편할 것 같았다.

‘그래 엘프로 가자, 엘프로!’

그렇게 어스는 차기(?) 연애 대상을 엘프로 정했다.

그들과 사귀면 최소 차일 걱정은 없을 테니 이보다 더 현명한 결정이 또 있을까 싶다.

* * *

어스와 교단이 맺은 계약은 공증을 거쳐 정식으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모든 이들이 크게 놀랐다.

일부는 이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확인하기 위한 문의가 각 신전에 쇄도했다.

굴욕적인 사건이었지만 상부의 지시가 하달된 상태라 각 신전에선 이를 시인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자들이 테리우스 영지로 몰려왔다.

어스가 우려한 광신도들이었다.

그러나 그중 그 누구도 테리우스 영지에 발을 딛지 못했다.

앞서 영지로 들어간 자들이 테리우스 영지 병사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난 걸 봤기 때문이다.

“이, 이종족 따위가 사람을 패다니!”

“말도 안 돼!”

많은 이들이 이에 격분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할 교단은 이 일에 개입할 수 없었다.

불가침조약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광신도들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건 광신도로서 낙제니까.

그들은 무장을 갖추고 영지로 진입했다.

명백한 불법이다.

테리우스 영지는 이에 칼을 빼들었다.

앞서는 구타였지만 이번엔 피를 봤다.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그제야 광신도들도 정신을 차렸는지 더 이상 테리우스 영지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대신 영지 밖에서 영지로 들어가는 사람과 물자를 공격했다.

그런 자들은 솔론 왕국에서 처리했다.

광신도들의 행위는 법을 어긴 행위였기에 교단도 이를 문제 삼을 수 없었다.

교단 입장에선 치욕이었지만 끝내 그들은 이 일에 함구했다.

* * *

사람들에게 동토의 땅이라 불리는 대륙 북쪽, 과거엔 이 땅도 생명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랬던 땅이 오늘날에 와서 얼어붙은 땅이 된 건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는 존재가 인간들의 손에 불태워진 이후 시간을 두고 일어났다.

혹자는 이를 위그드라실의 저주라 부르기도 했다.

이종족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가속화시킨 사건이 벌어졌던 저 땅을 보는 것조차 고통스러워했다. 그래서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렇게 미답지는 인간은 물론 이종족에게도 잊힌 땅이 되었다.

그러한 그곳에 얼마 전부터 교단이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여 엄중 감시에 들어갔다.

비밀리에 이뤄진 일이라지만 각국 정부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만큼 병력이 빠졌으니까.

이에 왕국들이 불만을 토로했지만 교단은 이를 묵살했다.

때문에 각 왕국들은 전선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고, 그 덕분에 몬스터 영역이 커지는 결과를 낳았다.

“저 언덕 너머부터 미답지다.”

10월 초순이었지만 이곳의 날씨는 몹시 혹독했다.

그럼에도 이 얼어붙은 땅엔 인간이 산다.

바퀴벌레도 아니고.

베로니카 단장은 어스가 여유를 부릴까 싶어 그와 동행했다.

말이 동행이지 실상 연행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오염토는 저 언덕 너머부터 있습니까?”

“더 들어가야 해.”

“함께 가는 겁니까?”

“아니, 우린 여기서 기다린다.”

따라오면 어쩌나 걱정했던 어스는 이 말에 마음 놓았다.

아니, 애초 저들은 따라오고 싶어도 그럴 수 없으니 처음부터 정해진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일단 정찰부터 하겠습니다.”

“그전에 알려줄 게 있다.”

“뭐죠?”

“오염토 영역에선 마법 물품이 작동하지 않아.”

“전부?”

“전부.”

마법 로브와 신발을 사용할 수 없으면 추위를 맨몸으로 견뎌야 한다.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러나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은 철옹성이 제대로 작동하느냐의 여부다.

만약 철옹서도 마법 물품으로 분류되어 제한 대상에 포함된다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계약을 물리기엔 동네방네 소문이 쫙 퍼진 이상 이를 되돌릴 수도 없기에.

‘괜찮겠지, 괜찮아야 할 텐데.’

마법 로브와 신발을 믿고 겨울옷을 준비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교단에서 준비한 방한복이 있어 이를 껴입었다.

순식간에 그의 몸집은 두 배로 불어났다.

답답했지만 얼어 죽지 않으려면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다녀오죠.”

어스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블링크를 사용했다.

* * *

-오염된 토양의 영향으로 체내 마나가 감소합니다.

-생명력이 오염된 토양에 저항합니다.

-저항에 성공하여 마나 감소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알람이 쉴 새 없이 울었다.

참고로 어스는 땅을 밟지 않은 상태다.

다시 말해 이동과 추락을 반복하며 미답지 상공에 있었다.

‘땅만 아니라 상공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놀람도 잠시 어스는 서둘러 철옹성의 사용 가능 여부를 확인했다.

다행히 철옹성은 마법 물품으로 판정되지 않는 듯 기능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크게 당황했던 어스는 이에 한시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마나 회복 포션의 사용 여부가 궁금해졌다.

인벤토리에서 마나 회복 포션을 꺼내 마셨다.

그전에 체내 마나를 철옹성에 이전하여 자리를 만들었다.

‘젠장!’

결과는 충격적이게도 포션 또한 기능을 상실했다.

이러면 자연 회복률에 몸을 맡겨야 한다.

기존에 시간당 10퍼센트였던 것이 승리의 노래 칭호 활성화 이후 증가해 20퍼센트씩 회복된다.

하지만 이제껏 마나 회복 포션으로 금방 마나를 채울 수 있었던 어스에겐 감질나는 양일 뿐이었다.

-오염된 토양의 영향으로 체내 마나가 감소합니다.

-생명력이 오염된 토양에 저항합니다.

-저항에 성공하여 마나 감소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상황에 알람이 지속적으로 울리자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알람 끌 수 없나?’

계속 듣다간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동일한 알람을 중단하시겠습니까?

‘어라? 이런 기능도 있었어?’

미답지가 아니었다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지도,

어스는 냉큼 승낙했다.

그제야 정신 사납게 울어대던 알람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블링크를 이용하여 이동하며 지상을 살피던 어스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어느새 얼어붙은 땅이 사라지고 초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동토보다 더한 땅이 미답지 아니었나?’

의구심도 잠시 어스는 지상으로 이동했다.

지면에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오염된 토양의 영향으로 체내 마나가 감소합니다.

-저항에 실패했습니다.

-마나 감소가 발생합니다.

화들짝 놀란 어스는 황급히 허공으로 이동한 뒤 상태창을 열었다.

베로니카 단장의 말에 의하면 마나 감소는 영구손상이다.

그러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전 재산을 올인한 도박꾼의 심정으로 마음 졸이며 상태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런 어스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하고 말았다.

“이건…… 대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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