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는 물론 자유 마법사들까지 테리우스 영지로 하나둘 몰려들었다.
그 모습이 흡사 순례자를 연상시켰다.
솔론은 물론 외국에서까지 마법사들이 움직이자 테리우스 영지는 유명세를 탔다.
테리우스로 향하는 길목마다 위치한 마을마다 난리가 났다.
일생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마법사들을 연령과 성별을 불문하고 일상처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다들 부유한 자들이다 보니 이들이 지나간 곳마다 뿌린 돈이 적지 않아 경제적으로 때아닌 호황까지 누릴 수 있었다.
“8서클 마법사의 파급력이 이 정도였나?”
이종족 해방 연합이란 대륙급 조직의 후원을 받고 있는 어스는 대륙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들을 수 있었다.
“이종족 중에서도 8서클 현자는 보기 드뭅니다. 영주님.”
“엘프족엔 8서클 현자가 있어?”
장수와 미모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종족이 엘프다.
어디 이뿐이랴.
마법, 정령술, 검술, 궁술 등에 있어 엘프를 따를 종족은 보기 드물다.
이처럼 모든 걸 겸비한 엘프들이 단독으로 맞선 것도 아니고 다른 종족과 힘을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에게 패하여 자신들의 정신적인 지주를 잃는 것도 부족해 거친 대양 너머 아도니스까지 떠나야만 했다.
이종족에게 빼 아픈 패배를 안겨준 과거의 인간들이 강했냐면 그건 아니다.
현재의 인류가 그때의 인류보다 모든 면에서 앞서고 있다.
그럼에도 이종족이 패배했던 결정적인 원인은 압도적인 강자가 인간들 중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데릭 가이어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대장로깨서 8서클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는 건 무슨 뜻이야?”
“오래전에 은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연락이 닿는 분은 엘프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겁니다. 로엘 님도 그중 하납니다. 대장로께서 어스 님에 관해 듣게 된다면 꼭 보고 싶어하시지 않을까 싶네요.”
푸리엘의 말에 어스는 뜨끔했다.
어스 자신은 이를 부정하고 있었지만 사실 자신이 일반적인 마법사와 그 궤를 달리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높은 경지의 마법사와 만남이 달갑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 자신의 다른 점이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다.
‘로엘은 알아보지 못하지만 대장로란 엘프는 다를지도.’
참고로 마법사로서 로엘의 경지는 7서클이다.
대륙 전역에 난립하는 크고 작은 마탑의 수가 세 자리를 넘지만, 7서클에 이른 대마법사가 존재하는 곳은 10분의 1수준에도 못 미친다.
그러한 마법계에 8서클 현자가 등장했으니 엉덩이가 무거운 노마법사들도 그와 만나길 소망하며 동원 가능한 모든 인맥을 이용해 어스를 만나려 하고 있었다.
인맥이 없는 자들의 경우엔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쌓인 편지가 궤짝으로 열이 넘었다.
그전까지 마법사가 희소한 줄 알았던 어스는 이번에 그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도 궁금하네, 대장로란 분. 흠흠.”
한편으론 꺼림칙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궁금했다.
현자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저도 기대되네요. 어스 님과 대장로님의 만남이. 참, 마탑주들은 언제 보실 생각이세요?”
콧대 높기로 유명한 자들이 바로 고위 마법사다.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자들이 바로 마탑주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일국의 국왕이, 교단이 청해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그들이 먼저 편지를 보내어 만남을 청하고 있었다.
교단과는 그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어스 입장에선 마법계의 뜨거운 관심을 자신의 지지로 끌어낼 수 있다면 이종족 노예를 사들이는 일은 물론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어 지박령처럼 한 곳에서만 살아야 하는 혼혈들의 족쇄를 풀어 테리우스로 끌어들이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푸리엘도 이를 알고 있었기에 은근히 그를 재촉하는 중이다.
“뜸은 들일만큼 들였겠지?”
“그럼요. 여기서 더 들였다간 타버리고 말 거예요.”
“좋아, 그럼 초대장을 보내. 날짜는…… 음, 다음 달 초로 잡도록 해.”
테리우스 영지가 세워진 이후 처음 갖는 공식적인 자리였다.
“손님들이 만족하실 수 있도록 준비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기둥뿌리 뽑아서 대접할 생각까진 없으니까 대접받는 느낌만 줄 수 있는 수준으로 끝내.”
어스의 재산은 그가 사냥에만 전념하고 있음에도 계속하여 불어나 현재는 그 자신도 자신의 재산이 얼마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니 그의 기둥뿌리는 웬만해선 뽑힐 리 만무하다.
“예.”
“그리고 열흘 동안 연락이 안 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진 말고.”
“열흘이요?”
“응.”
“어딘지 물어봐도…… 알겠습니다. 다녀오세요.”
푸리엘을 내보낸 어스는 비밀 통로를 통해 지하실로 향했다.
그런 그의 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러나 그 발걸음보다 더 가벼운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의 마음이었다.
‘마계야 기다려라.’
* * *
시트리, 고모리, 모락스, 말파스족이 건국한 마계 4개 왕국은 한 인간에 의해 테러를 당한 일로 다른 왕국들의 비웃음을 사는 치욕적인 일을 겪었다.
이에 격분한 4개 왕국은 힘을 모아 범인 색출에 나섰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4개 왕국의 수색대가 그토록 샅샅이 뒤졌지만 하늘로 꺼졌는지 땅으로 사라졌는지 학살자의 종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때 검은 돌이 그들의 눈에 띄었다.
눈앞에서 동료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현상은 수색대를 놀라게 만들었다.
흔해 보이나 실상은 흔치 않았던 검은 돌이었기에 최초 검은 돌을 발견한 뒤 다시 한 달이 되었을 무렵에 그 검은 돌을 다시 발견했다.
이번엔 도구를 통해 이를 확보한 수색대는 이를 분석했다.
그 결과.
“그 검은 돌의 분석은 끝났나?”
“천뇌의 탑에서 이 돌엔 고밀도의 차원력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차, 차원력?”
“예. 키빌 님.”
“네 손에 그것은 천뇌의 탑에서 작성한 보고선가?”
“아! 죄송합니다. 여기 있습니다.”
보고서를 모두 읽은 수색대의 대장 키빌의 두 눈이 반짝였다.
“이건 인간 학살자를 찾는 것 이상의 성과군. 차원력이라니. 어찌 이런 게 일개 돌멩이에 담길 수 있는 거지?”
“그 일로 지금 천뇌의 탑 역시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천뇌의 탑이 차원력의 비밀을 파헤친다면 마족의 오랜 염원이 이뤄질 수 있겠구나! 하, 하하하.”
키빌은 기쁨에 찬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였다.
“키빌 님! 그놈이, 인간학살자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마족의 오랜 염원을 풀 실마리를 찾은 것과 별개로 인간 학살자에 대한 원한을 어찌 있으랴.
보고를 받은 키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즉시 출동한다. 우리에게 치욕과 불명예를 안겨준 인간 놈을 잡아 그 죄를 물을 것이다!”
까드득.
어금니를 박박 갈며 일갈했다.
* * *
“프로즌 템페스트! 프로즌 템페스트!”
블링크를 통해 고도를 유지한 어스는 지상의 마족 마을을 향해 8서클 냉기 폭풍우를 뿌렸다.
살상반경 200미터, 위험반경 500미터의 이 광역 스킬은 3,200의 지력 스킬의 힘이 실려 위험반경에 있는 마족들조차 작은 얼음알갱이가 되어 바스러졌다.
프로즌 템페스트가 한 번만 사용된 것이라면 마을 주민들이 마계에선 평범하다지만 인간을 기준으로 했을 땐 다들 전략병기라 불리는 강자들이다.
그러한 자들이 날개 한번 펴보지 못하고, 혹은 펴고 날아오르다 동결되었다가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가해진 2차 충격에 의해 새끼손톱보다 작은 얼음알갱이가 되어 먼지 흩어지듯 흩어졌다.
“미, 미쳤다! 8서클 마법을 매직 애로우 뿌리듯 뿌리다니!”
“괴, 괴물이다! 도망 쳐!”
“소문에 듣던 것보다 더한 괴물이다.”
“저놈은 인간의 탈을 쓴 재앙이야…… 마신이시여! 저희를 구하소서!”
당혹한 그들도 극심한 냉기의 폭풍우 앞에 곧 사라졌다.
백여 가구의 마을 하나가 프로즌 템페스트 십 수 번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인님, 시쿠도 싸우고 싶다.”
시쿠는 자신의 장기인 골렘 폭격을 시전조차 하지 못하고 어스의 활약만 지켜보아야만 했다.
자신이 끼어들 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에.”
“이번에 세 번째다. 시쿠는 주인님께 도움이 되고 싶다. 시쿠도 싸우게 해 달라.”
“여기가 세 번째 마을이었어?”
“그렇다. 주인님.”
지금 바로 정산할까? 아니면 마을 두 개 더 잡아먹고 정산할까? 상태창을 열고 싶었지만 맛난 건 아껴먹는다는 말을 상기한 어스는 마을 두 개를 더 먹어 치운 뒤 정산하기로 했다.
“주인님이 간만에 마음 푹 놓고 스킬 쓰는 거잖니. 그러니 시쿠가 이해해. 딱 두 개만 더 먹고 다음엔 시쿠도 사냥하게 해주마.”
“정말인가?”
“당연하지.”
사실 시쿠를 배제하고 단독으로 사냥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녀석이 삐질 것 같았다.
어스의 약속에 시쿠는 기뻐했다.
시쿠는 곧장 다음 마을을 찾아 이동했다.
그렇게 그가 떠난, 주춧돌 하나 남지 않은 마을에 다수의 마족들이 나타났다.
4개 왕국이 힘을 모아 만든 연합 수색대들이었다.
“이런, 여긴 이미 끝났군.”
“빌어먹을 인간 학살자 새끼. 어찌 양민을 상대로 이런 끔찍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놈은 프라이드도 없단 말인가?”
“인간에게 뭘 바라.”
“그런데 매번 놈의 뒤를 쫓아서야 잡을 수 있을까 싶다.”
“걱정 마라. 상급 마족으로 구성된 정예들이 인근 마을마다 배치 완료됐어. 제아무리 미치광이 학살자라도 이번엔 빠져나갈 수 없을 거야.”
“걱정 마. 놈이 모습을 드러낸 이상 고위 마족님들도 움직이셨을 테니 놈의 만행도 조만간 막을 내릴 거야.”
“그런데 흔적으로 봐선 프로즌 템페스트 같은데. 프로즌 템페스트의 위력이 원래 이렇게 강했던가? 아무리 고위 마법이라곤 하지만 파괴력이 지나친 것 같지 않아? 더구나 인간 따위가 펼친 마법인데.”
“판단은 상부에서 하는 거야.”
흔적도 남지 않고 초토화된 마을을 일별한 수색대는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 줄기 바람처럼 순식간에 그 모습이 사라졌다.
* * *
한 인간으로 인해 견원지간이던 왕국들이 뜻을 모아 연대를 결성하였다.
어스는 자신으로 인해 그러한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출장의 목적을 성실히 달성하고 있었다.
다시 2개의 마을을 더 찾아내 처리한 어스는 그제야 정산에 들어갔다.
두근두근.
심장이 벌써부터 흥분하여 나대고 있었다.
‘이게 바로 삶의 소소한 재미지.’
활짝 웃는 얼굴로 어스는 상태창을 활성화했다.
그의 입에서 감탄성이 절로 나왔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확인하니 부지불식간에 받은 선물처럼 다가왔다.
보너스 업적 포인트 4,950.
코인 13,200,000.
만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벌어들인 수익이다.
뤼빅스에서 이만한 수익을 올리려면 못해도 몇 달은 쉬지 않고 원정에 나서도 어림 반 푼어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일을 그 짧은 시간에 해냈다.
마계의 모든 것이 진심으로 사랑스럽다.
기존에 갖고 있던 미분배 포인트와 합산하니 5,047이다.
스탯 : 힘(102.7). 체력(5,300). 민첩(102.7). 지력(3,200). 정신(5,000).
보유한 포인트면 이 중 하나의 스탯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
실행에 옮기지 않았음에도 벌써 강해진 기분이 든다.
‘10 대 1의 비율이 불합리하지만 힘과 민첩 스탯의 쓸모가 많긴 한데.’
막대한 포인트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힘과 민첩 스탯에 투자하기는 조금 망설여졌다.
5,000포인트가 10분의 1로 쪼그라드는 마법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노릇이기에.
‘너희 둘은 좀 더 기다려.’
그래도 올릴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포인트 수급이 뤼빅스처럼 어렵다면 모를까 마계라는 이름의 꿀단지는 마르지 않는 꿀을 선물해줄 것이기에.
잠시 고민하던 어스는 포인트 분배에 들어갔다.
체력 스탯은 1만을 꽉 채웠다.
남은 포인트는 지력 스탯에 분배했다.
버는 건 어렵지만 쓰는 건 한순간이라는 말처럼 모든 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텅 빈 포인트 칸을 바라보니 의욕이 솟구친다.
‘쉬는 건 죽어서 쉬면 돼.’
어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 사냥에 나섰다.
해는 저물어 사방이 캄캄했지만 사냥에 대한 그의 의욕은 꺾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