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뤼빅스 대륙 내 모처.
이중 삼중의 경계와 보안이 걸린 지하실로 일단의 인물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었다.
지하실 내부는 피비린내와 식은 쇠 냄새로 가득했다.
고문의 흔적이 역력한 지하실 한쪽 벽면엔 사지가 결박당해 매달려 있는 인영이 있었다.
손님들이 방문하자 지하실의 주인인 거구의 남성이 인영의 머리채를 붙잡아 뒤로 젖혔다.
인영의 얼굴을 확인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직한 침음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얼굴까지 덮은 후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드러난 얼굴은 놀랍게도 헤롯 추기경이었다.
헤롯 추기경과 동행한 자들 역시 모두 고위 성직자들이었다.
이름만 대도 알만한 그런 인물들이었다.
“얼굴은 영락없는 수인족이군. 머리 양옆의 뿔만 아니면 말이야.”
“헤롯 추기경의 말을 듣고 믿지 않았는데 정말 마족이 존재할 줄이야.”
“정말 큰일입니다. 한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울 텐데 말입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던전에 이어 미답지 문제까지 겨우 봉인시켰더니 이젠 마족이라니…… 룬이시여, 당신의 종들을 살펴보아 주십시오.”
고위 성직자들의 각양각색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헤롯 추기경이 손을 들어 그들의 입을 막았다.
노환으로 인해 일선에서 물러선 아들레스 교황을 대신하고 있는 헤롯 추기경이었다.
지지 세력이 없는 은자의 추기경으로 불리던 헤롯이 교황 대리를 맡은 건 교단 내에서도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건 잠시였고 헤롯 추기경이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소리는 잦아들어 지금에 와선 차기 교황으로 헤롯을 추대하자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놀랍게도.
헤롯 추기경은 무겁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이단 심문관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입을 열던가?”
“헛소리만 나불거리고 있습니다. 추기경 님. 지금껏 수많은 이단을 만나 봤지만 확실히 마족은 다르더군요. 송구합니다.”
“그게 어찌 형제의 잘못이겠나.”
마족을 생포하여 이곳으로 옮긴 이후 여러 이단 심문관들이 온 힘을 기울였지만 마족은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만 나불거렸다.
그 결과 마족의 육신은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범인이 저와 같은 모진 고문을 당했다면 죽어도 벌써 죽었겠지만 마족의 강인한 신체는 이 순간에도 아물고 있었다.
믿기 힘든 회복력이었다.
“불길한 존잽니다. 다가가지 마십시오.”
헤롯 추기경이 마족을 향해 다가가자 이단 심문관이 놀라 만류했다.
헤롯 추기경은 손짓으로 그를 물렸다.
“간악한 마족이여 내 말이 들리느냐?”
“주, 죽여. 죽이라고 대체 나 더러 어쩌라는 거야? 다 말했다고, 다! 이 미친 광신도 새끼들아!”
마족은 온몸을 흔들며 발악했다.
그 모습에 이단 심문관이 탄식을 터트렸다.
“죄송합니다. 추기경님, 제 신앙이 부족하여 이단이 아직 힘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형제의 탓은 아닐세.”
“헤롯 추기경님의 너그러움에 감사드립니다.”
마족은 이단 심문관의 태도에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온몸을 버둥거렸다.
“마족이여, 넌 어찌하여 중간계로 넘어온 것이냐? 정찰이 목적이냐? 아니면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함이냐?”
“정찰도 아니고, 교두보 확보도 아니다. 이 미친 새끼들아! 대체 몇 번을 말해야 믿을 것이냐? 학살자를 쫓는 일에 투입되었다가 신비한 검은 돌을 만지자마자 너희가 말한 던전에 들어온 것뿐이야. 난 일개 병사라고!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광신자 새끼들아!”
“중급 이상의 익스퍼트 20인, 매직 스틱으로 무장한 100명이 넘는 디콘의 목숨을 앗아간 네가 일개 병사라고? 어느 세상에 소드 마스터가 일개 병사를 한단 말이더냐!”
“우리 동네에선 개나 소나 소드 마스터라고! 이 미친 새끼들아! 제발 그만 괴롭혀. 정말 모든 걸 다 말했다고!”
“여전히 간교한 세 치 혀로 우릴 현혹하려 드는군. 역시 마족은 갱생의 여지가 없단 말인가?”
“미치고 팔짝 뛰겠네. 솔직히 침공은 너희가 하지 않았냐? 피에 굶주린 미친 인간 학살자가 우리 왕국에 들어와선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돌아다녔다고! 노인도, 애도, 임산부도 무차별적으로 죽였어! 너와 같은 인간이 말이다!”
마족의 말에 헤롯은 고개를 내저었다.
“형제여.”
“예, 추기경님.”
“저자가 진실을 말할 때까지 수고해주게.”
“아, 안 돼! 저 미친놈에게 날 맡기지 마. 그럴 바엔 차라리 죽여, 죽여 달라고!”
이단 심문관과 눈이 마주친 마족은 벌벌 떨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러나 이 자리의 그 누구도 마족의 말을 귓등으로 듣지 않았다.
고위 성직자들과 함께 고문실을 나서던 헤롯 추기경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서 마족을 응시했다.
마족은 그 시선이 떠날까 봐 겁이 난 듯 고래고래 소리쳤다.
“마, 마신께 맹세할 수 있다! 내 영혼에, 내 마기에 맹세할 수 있어! 절대 거짓을 말하…….”
“감히! 어디서 마신을 입에 담는 것이냐! 역시, 매가 부족했구나.”
쇠못이 박힌 철퇴가 마족의 후려치기 시작했다.
퍽퍽.
“다 말했잖아! 다 말했다고! 믿어 달라고! 너희들 성직자라며 이 개자식들아! 제바아아아아알-!”
* * *
마족의 출현으로 잔뜩 긴장한 교단과 달리 마족의 본거지에선 한 인간의 출현으로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마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참담한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프로즌 템페스트! 프로즌 템페스트!”
지금까지 박살 낸 그 어느 마을보다 규모가 큰 마을, 그 마을을 봤을 땐 그냥 지나칠까라는 생각을 하였던 어스는 과거와 달라진 자신의 상태를 시험할 겸 지나치지 않고 사냥을 개시했다.
이번엔 시쿠도 참전했다.
모두가 잠자리에 든 그 시간 찾아온 골렘 폭격과 냉기의 폭풍우로 인해 많은 주민들이 잠자다 집과 함께 사라졌다.
-하급 마족을 처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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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마족을 처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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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급 마족을 처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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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알람이 어스와 시쿠의 노력의 결과를 알려주었다.
야밤에 발생한 기습 공격이라곤 하나 마냥 당하진 않았다.
마을 자경대들이 날개를 펼치고 일제히 날아올랐다.
검, 창, 도끼 등을 쥐고.
마법사들은 폭격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결계를 펼쳤다.
안타깝게도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그들의 결계는 힘없이 부서졌다.
지상을 박차고 날아오른 마족들, 고향 마을이 박살 나자 극도로 분노했으나 그 분노는 어스의 근처에 도달하기도 전에 차갑게 얼어버렸다.
프로즌 템페스트라는 가공할 냉기의 폭풍우를 뚫기엔 그들의 힘이 부족한 때문이었다.
‘규모가 꽤 큰 마을인데도 딱히 어렵지 않네.’
도시를 공격했다가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었기에 보고도 도시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준도시급의 마을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자 지금은 도시를 노려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이 마을부터 깨끗하게 먹어 치운 다음 고민해도 될 것이다.
‘아함! 졸리네.’
아침부터 자정까지 밥 먹고 볼일 보는 시간을 제외하고 마을을 찾아 헤매고, 그러다 발견한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내일을 위해 쉬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휴식에 대한 욕구가 강해진 어스의 스킬 시전 속도가 더 빨라졌다.
그렇게 마을의 모든 걸 정리하나 싶을 때였다.
불길한 느낌이 번개처럼 그의 뇌리를 스쳤다.
‘무형 방벽!’
어스는 이 느낌을 무시하지 않고 곧장 무형 방벽을 작동시켰다.
칼날 모양의 기운이 날아들어 무형 방벽을 공격했다.
공격을 받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어스는 혈광을 뿌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마족을 발견했다.
“어찌 이리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놈의 입에서 벼락같은 호통성이 터졌다.
그 목소리엔 심연보다 깊은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오싹.
안타깝게도 어스는 마족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그 감정은 어렴풋이나마 느꼈다.
상대가 어떤 감정인지.
‘사람 기분 이상하게 만드는 녀석이네. 다음엔 통역 마법이 걸린 물건을 갖고 와야 하나?’
어스가 아무 말 없이 프로즌 템페스트를 시전하자 마족은 대화를 포기한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냉기의 폭풍우를 뒤집어썼지만 마족은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일직선으로 이를 갈라 길을 만들었다.
그 길을 따라 단숨에 접근한 마족의 마나 블레이드가 어스를 벴다.
어스에게 향했지만 무형 방벽에 막혔다.
‘저 녀석, 그랜드 소드 마스턴가?’
도시도 아니고 마을 급에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니, 인적자원이 풍부해도 너무 풍부한 게 아닐까 싶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더욱이 지금은 그때의 자신보다 더 강하다.
‘헬파이어! 헬파이어!’
프로즌 템페스트가 놈에게 통하지 않았기에 어스는 헬파이어를 시전했다.
무형 방벽을 깨부수기 위해 공격을 퍼붓던 마족은 불길한 낌새를 느꼈는지 단숨에 거리를 벌였다.
헬파이어를 알아본 마족은 놀라긴 커녕 굳센 의지를 표출하며 검을 휘둘렀다.
‘멍청한 자식, 이건 헬파이어라고 파이어볼 따위가 아닌.’
어스는 피하지 않고 정면승부를 던진 마족 검사의 행동에 비웃음을 날렸다.
세로로, 가로로 헬파이어가 쪼개졌다.
꺼지지 않는 불덩이는 그 공격에 모조리 힘을 잃고 말았다.
‘마, 말도 안 돼!’
앞서 처치했던 그랜드 소드 마스터 때와 양상이 달랐다.
설마, 저놈은 그때 그 마족보다 고수란 말인가?
어스는 냉큼 마나 회복 포션을 들이키며 마나를 가득 채운 다음 물량으로 마족을 몰아붙였다.
그러자 당당하던 마족도 그제야 당황한 듯 밀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마족들이 속속 주변에 나타났다.
그들은 원한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긴 저들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다.
고향과 가족 그리고 지인을 잃었으니 제아무리 심성이 고운 사람도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견딜까.
마족들은 모닥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덤벼들었다.
무형 방벽은 그들의 모든 공격을 차단했다.
어스는 사방으로 프로즌 템페스트를 뿌렸다.
멈추지 않고 뿌려지는 8서클 스킬에 예의 그 그랜드 소드 마스터 마족도 놀란 듯 방어에 급급했다.
그사이 원한에 몸을 맡긴 불나방(?)들은 모두 쓰러지고 오직 어스와 그랜드 소드 마스터 마족만이 남았다.
“내 지금은 물러나지만 조만간 네놈을 다시 찾겠다.”
그 모습을 처음 드러냈을 때와 달리 마족의 상태는 심각했다.
마족은 복수를 다짐하며 도주했다.
그 방식은 앞서와 달리 단거리 공간 이동이었다.
‘하긴 블링크가 나만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 자신만 사용 가능한 마법은 아니다.
하지만 물건이건 사람이건 가치가 존재하듯 어스의 블링크는 도주를 선택한 마족의 블링크보다 우월한 가치를 갖고 있었다.
‘안 놓친다.’
더욱이 저놈을 잡으면 아이템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어찌 놓치랴.
어스는 눈에 불을 켜고 놈을 추격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1시간을 이어졌고 결국.
-고위 마족을 처치했습니다.
-보너스 업적 포인트 10을 습득합니다.
-5만 코인을 습득합니다.
-아이템을 습득했습니다.
-보유한 아이템에 적용 가능합니다.
-대상 ‘시쿠’, ‘철옹성’에 적용 가능합니다.
역시 아이템을 주는 놈이었다.
그런데 고위 마족이라니?
‘……어쩐지 세더라니.’
아이템 적용을 두고 잠시 고민하던 어스는 이번엔 시쿠에게 적용시켰다.
덕분에 시쿠는 72시간 뒤에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 보자.
* * *
이름 없는 어느 산중 어스는 인벤토리에서 천막을 꺼내 설치한 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주변에 매직 애로우를 깔아 놓았다.
다섯 번의 강화와 3,547의 지력 스탯의 영향으로 어스의 매직 애로우는 고작 10의 마나를 필요함에도 크기와 위력은 1서클 스킬의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어 3서클에 육박하는 파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매직 애로우가 무려 2천 개다.
‘든든하군.’
잠자리의 안전을 확보한 어스는 상태창을 활성화한 뒤 포인트 분배에 들어갔다.
이름(성별) : 어스(남).
직업(레벨) : 마법사(127).
칭호 : 위그드라실의 친구(유일). 승리의 노래(12/12).
생명력 : 50,370/50,370.
마나 : 37,000/37,000.
인벤토리 : 1(+11).
스탯 : 힘(102.7). 체력(10,000). 민첩(102.7). 지력(5,000). 정신(7,000).
직업 스킬(12/14) : 매직 애로우(+5/12). 파이어 애로우(+3/12). 파이어 볼(+3/12). 파이어 버스트(+3/12). 아이스 스피어(+3/12). 일루젼(+3/12).
콜 라이트닝(+5/12). 블링크(+3/12). 체인 라이트닝(+4/12). 헬파이어(+0/12). 레스토레이션(+0/12). 프로즌 템페스트(+0/12)
업적 포인트 : 0.
코인 : 95,045,057.
‘내일이면 1억 모으겠네.’
요원하게만 느꼈던 9서클 스킬 구입도 내일이면 가능해지리라.
꿈만 같았다.
어스는 이 기분을 안고 이내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처럼 알찬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