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속 시원하게 털어버렸다.
마음은 분명 하나일 텐데 한쪽은 시원하고 한쪽은 아쉬움이 가득 차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럴 땐 사냥이 답이다.
마계로 당장 달려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재사용 시간에 걸려서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실리시아로 가려 했는데.
“누가 찾아와?”
“베로니카 단장이 찾아왔습니다.”
“그 할망…”
어스는 급히 말소리를 줄였다.
웅얼엉얼.
“할망?”
“아냐 아무것도.”
베로니카 단장이 자신에게나 할망구지 삼백 살이 넘은 푸리엘에겐 핏덩이다.
그러니 베로니카를 할망구라고 지칭한다면 푸리엘이 마음 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뭔가 기분 나빠지려고 했는데 그건 묻어두겠습니다.”
역시 자신의 생각이 정답이었다.
“사소한 일에 일일이 반응하는 건 엄청 스트레스야. 그러니 묻지 말고 지워.”
“그녀를 만나실 건가요?”
“내키진 않지만 궁금하니까 만나봐야지.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어?”
“남문에 있어요.”
예전 농장 터는 현재 테리우스 영지의 주도로 바뀌었다.
높고 두터운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생활하는 태반이 이종족과 혼혈이다.
이중 인간은 어스 가족을 제외하곤 레이몬드뿐이다.
“바로 간다고 전해.”
* * *
이종족과 혼혈이 살아가는 주도 특성상 외부인의 출입은 철저한 검증을 통해 이뤄지고 있었다.
이러한 테리우스 영지의 정책으로 인해 말들이 많았지만 이 땅의 주인이 내린 결정이었기에 불만은 있을지언정 이를 문제 삼아 시비 거는 자들은 없었다.
대륙 유일의 현자가 다스리는 영지가 바로 이곳이기에.
“오랜만이군요. 어스 백작.”
“오랜만이네요.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베로니카 단장의 표정을 보아 아쉬운 소리를 하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닐까 싶었다.
짐작되는 바가 있었지만 아는 척하지 않았다.
“센힐턴 시 테러 사건의 범인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자 어스 백작을 찾아왔습니다.”
“굳이?”
“백작, 이건 인류 전체의 운명이 달린 중대한 문젭니다. 내 이야기를 들어보면 백작 역시 놀랄 것이오.”
어스는 베로니카 단장의 약을 올리려다 참았다.
훗날은 몰라도 당장은 교단과 척을 져봐야 손해이기 때문이다.
또한 저들의 협조를 받아낸다면 지지부진한 이종족 노예와 혼혈 유입의 물꼬가 트일 공산이 크다.
“무슨 일인지 들어나 보죠.”
“센힐턴 시 테러 사건의 범인은 마족이네. 백작도 마족에 대한 위험은 알고 있을 것이네.”
위험은 모르겠고, 꿀인 건 안다.
아, 마계 가고 싶다.
연기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마, 마족이라니…”
어색하게 보이지 않길.
“역시, 백작도 놀랐군.”
다행히 자신의 연기가 어색하지 않았나 보다.
자신의 연기를 내심 칭찬하며 또랑또랑한 눈으로 베로니카 단장을 응시했다.
“마족인데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마족이 맞습니까?”
“맞네, 그 마족이네. 그래서 말인데 백작이 도와줬으면 하네. 인류를 위해서.”
“그래서 놈들은 찾았습니까?”
“그 때문에 백작을 찾아온 거네.”
“저더러 놈들을 찾아달라는 겁니까? 난 마법사지 신이 아닙니다.”
“백작은 뛰어난 기동력을 갖고 있네. 그 기동력에 마족 탐지기까지 더해진다면 효과가 클 것이네.”
“마족 탐지기? 그런 것도 있습니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교단이 마족에 대한 확신을 가진 건 센힐턴 시 사건이 처음이다.
그런데 벌써 마족을 탐지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냈다고 하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번에 교단 마도 공학부에서 만들었네. 마기가 워낙 강력하다 보니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었네. 놀라운 성과지만 안타깝게도 탐지 거리가 고작 100미터라 놈들을 추적하는 데 어려움이 크네. 도시나 마을 같은 곳에 놈들이 숨어 있다면 모를까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놈들이 숨어 있을 경우 이 짧은 거리의 탐지로는 놈들을 발견하기 힘드네. 운이 따라서 발견하더라도 정찰대의 힘으로 상대할 수 없으니 오히려 무고한 인명만 상할 것이네. 그래서 백작의 도움이 필요하네. 물론 백작이 놈들과 맞서 싸우라는 건 아니네. 놈들의 위치만 알려주게.”
“센힐턴 시를 공격한 마족의 실력은 어떻게 됩니까? 이런 놀라운 기기도 만들 정도의 교단이라면 그쯤은 파악하고 있을 것 같은데.”
“파악했네. 그래서 백작에게 놈들의 위치만 부탁한 거네.”
“현자인 나와 동급입니까?”
어스의 질문에 베로니카 단장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사건 현장에 남은 흔적으로 보아 8서클 마법과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힘을 확인했네.”
“위치라곤 하지만 그런 실력이라면 나도 목숨을 걸어야겠군요.”
동급인 고위 마족도 작위의 유무에 따라 실력이 달라진다.
이건 이번에 알게 된 내용이다.
하지만 딱히 두렵진 않다.
마계에서 돌아온 직후 업적 포인트와 코인 모두를 털어서 강화 작업을 끝냈다.
한마디로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다르다.
어스는 조용히 상태창을 열어 그 내용을 보았다.
이름(성별) : 어스(남).
직업(레벨) : 마법사(195).
칭호 : 위그드라실의 친구(유일). 승리의 노래(12/12). 엘프의 군주(유일).
생명력 : 250,370/250,370. (생명력 회복 1시간 30퍼센트).
마나 : 252,000/252,000. (마나 회복 1시간 40퍼센트).
인벤토리 : 1(+18).
스탯 :
힘(102.7). 민첩(102.7). 체력(50,000). 지력(45,159). 정신(50,000).
직업 스킬(16/16) :
매직 애로우(+12/12). 파이어 애로우(+12/12). 파이어 볼(+12/12). 파이어 버스트(+12/12). 아이스 스피어(+12/12). 일루젼(+12/12). 콜 라이트닝(+7/12). 블링크(+3/12). 체인 라이트닝(+4/12). 헬파이어(+3/12). 레스토레이션(+3/12). 프로즌 템페스트(+3/12). 엘리멘탈 피니쉬먼트(+3/12). 메테오 스트라이크(+3/12). 워프 게이트(+3/12). 앱솔루트 쉴드(+3/12).
업적 포인트 : 0.
코인 : 57.
‘안 그래도 몸이 근질근질했는데 잘 됐군.’
어디 이뿐이랴.
교단이 제 발로 찾아서 이처럼 통사정(?)하고 있으니 여기에 조건을 내걸면 저들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방금 베로니카 단장 본인이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교단을 해체하라는 따위의 요구가 아닌 이상 어지간한 요구는 들어주지 않을까 싶다.
“들어보니 몹시 심각한 일이군요.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힘을 보태야 하는 일인 건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태생이 용병 출신이라서 그런 것인지 그냥은 못 해 드립니다.”
잘 나가다가 돌연 삐딱 선을 타버린 어스로 인해 부드럽게 변한 베로니카 단장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돌변했다.
“그래서?”
“제가 협조하는 대가로 뤼빅스 내 이종족 노예와 혼혈 모두 미답지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일단 질렀다.
상대가 단호하게 거절하면 그땐 한발 물러나서 협상할 생각이다.
물론 협상의 여지가 있음은 내색하지 않았다.
“미답지에 이종족의 나라라도 세울 생각인가?”
“그건 제 마음입니다. 미답지 안에서 뭘 하건.”
“하아. 인류의 존속과 안녕이 걸린 일에 사심을 채우겠다니,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본 것 같군.”
그래, 속물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아쉬우면 너희들이 끼리끼리 손잡고 마족을 상대해보던가.
아니꼬운 마음에 내지르려다 말았다.
이번 일만 성사되면 수년의 시간을 그냥 버는 것이기에.
어디 그뿐이랴.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은 아니지만 이를 아낄 수도 있다.
문제는 성사 여부다.
“미답지 아닙니까? 미답지. 어차피 그곳은 그간 인류가 없는 땅으로 생각한 곳입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쭉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어차피 교단에선 이종족을 눈엣가시처럼 여기지 않았습니까? 그런 존재가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지는 일입니다. 제 생각엔 교단 입장에서도 딱히 나쁘지 않은 조건 같은데, 아닌가요?”
베로니카 단장의 눈빛은 굶주린 맹수처럼 돌변해 있었다.
여기서 그녀가 칼을 뽑는다면 일은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어스도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마족이다.
마족들이 무슨 생각으로 센힐턴 시 신전을 공격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도시 전역이 아닌 신전 하나만 타깃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분명 제2, 제3의 센힐턴 시 신전과 같은 일이 벌어질 공산이 커 보였다.
교단도 이를 우려했기에 내키지 않지만 자신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그러니 이 상황을 어찌 이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와 중에 자신의 속내를 들키게 되었지만 마족과 자신을 두고 저울에 단다면 교단 입장에선 자신보다 마족을 더 무겁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같은 골칫거리라도 자신이 어디 마족만 할까.
여기까지 계산하였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광신도가 왜 광신도겠는가.
다행히 베로니카는 자신의 분을 가라앉혔다.
“차후 연락하지.”
찬바람을 남기며 베로니카는 떠나버렸다.
‘마족들이 한 번 더 거하게 사고 쳐줘야 내 요구가 수월하게 받아들여지겠군.’
* * *
영주관으로 돌아오자마자 어스는 베로니카 단장과 있었던 일을 푸리엘에게 이야기했다.
베로니카 단장 앞에선 배짱을 부렸으나, 막상 그녀가 떠나고 나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저들이 자신을 이단으로 규정해버릴 경우다.
그리된다면 가장 먼저 공격받을 곳이 이곳 테리우스 영지가 될 게 뻔하다.
그렇다고 교단이 두려운 건 아니다.
마족도 쓸고 다녔는데 그깟 교단이 대수일까.
그럼에도 어스가 교단을 신경 쓰는 건 마계에서 하듯 뤼빅스에서도 그리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저, 정말 그걸 요구했다고요?”
“어.”
“성급했습니다.”
“우리에겐 면죄부가 있잖아. 빡이 돈 놈들에게 그게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쉽게 공격하진 않을 거야. 경제적인 봉쇄 조치를 취하는 수준이 고작일 거야.”
물류의 왕래를 끊기면 피해가 심각하다.
그러나 이는 일반적인 영지의 경우이고 텔레포트 마법진을 보유한 테리우스 영지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어디 이뿐이랴.
실리시아라는 거대한 땅에서 나오는 물자와 이종족 연합의 지원까지 받으면 경제적인 봉쇄 조치는 우습게 넘길 수 있다.
“경제적인 봉쇄 조치를 우려하는 건 아니에요.”
푸리엘 역시 어스처럼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았다.
“교단?”
“교단이 직접 움직이지 않더라도 그들의 영향력은 귀족파를 움직일 수 있어요.”
“그쯤은 나 혼자서도 격파할 수 있어. 1시간도 안 걸릴걸?”
메테오 한 방 날려주면 전의는 바닥, 아니 지하를 파고 내려갈 것이다.
이래서 힘은 이유 불문하고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
“이미 엎지른 물이니 당장은 저들이 더 곤란해지길 바라야겠네요.”
“분명 더 곤란해질 거야.”
자신이 마계에서 자행한 짓도 있으니 빡이 돌아도 열두 번은 더 돌았을 것이다.
특히 이번엔 제대로 사고치고 돌아오지 않았던가.
그것도 검은 탑 앞에서.
그리고 이러한 어스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 * *
검은 탑 주변에 구축한 요새가 단숨에 박살난 사건은 마계를 또 한 번 발칵 뒤집어 놓았다.
당한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지원군으로 편승한 자들 역시 모두 목숨을 잃었다.
제아무리 학살자의 힘이 강하다곤 하지만 이처럼 쉽게 무너질 전력이 아니었기에 마계의 시름은 깊어졌다.
그리고 학살자가 어찌하여 검은 탑을 노렸는지에 대한 의구심도 커졌다.
그러나 당사자의 입을 통해서 자세한 내막은 들을 수 없다보니 마족들이 할 수 있는 건 추측이 전부였다.
그런 때에 인간 무리를 추적하던 천리안 능력자가 인간 무리의 종적이 검은 탑 앞에서 사라졌음을 보고했다.
이에 마족들은 ‘검은 탑이 중간계로 넘어가는 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다.
사실 이러한 의문을 제기한 자들이 없지 않았지만 소수였기에 그간 그들의 발언은 힘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그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뇌옥의 모든 죄수를 검은 탑에 투입한다!”
마왕이 결단을 내렸다.
더불어 투입된 죄수들에게 공언했다.
마계로 돌아온 자에겐 죄를 사함은 물론 높은 지위를 하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죄수들 입장에선 어차피 비참한 죽음만이 남은 상황이라 마왕의 공언을 믿고 검은 탑으로 접근했다.
그렇게 접근한 죄인의 수가 무려 일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