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뤼빅스 대륙의 유일한 교단의 총본산이 점거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마족 침공에 대비하여 그 어느 요새보다 완벽한 방어체제를 구축한 곳이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진귀한 자료와 각종 보물이 감춰진 이곳이야말로 인류가 반드시 사수해야 할 장소였다.
그런데 그런 곳이 만 하루도 안 되어 무너졌다.
이 소식을 접한 개인이건 세력이건 그 충격은 적지 않았다.
룬 교단의 총본산은 그처럼 허망하게 무너졌으나 그렇다고 교단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다.
대신전마다 배치된 추기경들이 임시 지도부를 구성했다.
이들은 총본산의 탈환을 위해 휘하 신전과 신도를 집결시켰다.
그러곤 해일 같은 기세로 시국을 향해 진군했다.
그러나 결과는 끔찍했다.
패배, 패배 또 패배!
그것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었다.
대악마가 부리는 수급의 뱀을 살찌웠다.
수급의 뱀은 아군이 패할수록 그 수가 더 늘어나버렸다.
사람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인간의 힘으로 그 괴물을 막을 수 없어!”
“대현자의 힘을 빌려야 해!”
“대현자 역시 인간이면서 어찌 우리와 함께 싸우지 않는 건가!”
절망한 자들은 자신들을 위해 대신 싸워줄, 승리를 가져다줄 초인을 원하였다.
그런 그들의 입맛에 딱 들어맞는 인물은 이 땅에 단 한 명이다.
그러나 그 이름을 언급하는 건 이단임을 자청하는 꼴이기에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임시 지도부를 예의 주시했다.
교단의 머리는 잘렸으나 여전히 교단을 무시할 수 있는 개인도 세력도 없었기에 사람들은 그들이 현실을 직시하기만을 바랐다.
그래도 임시 지도부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힘 있는 개인들이 나섰다.
테아노, 트리온, 크세론, 레아, 파리스, 셀레네, 필리스, 솔론, 레오다니스, 헥터 왕국의 왕들이 임시 지도부에 압박을 행사했다.
이전이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왕들 입장에선 시국의 대악마도 대악마지만 마족 침공 역시 고려해야 하기에 왕들 입장에서도 이는 늦출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이처럼 명분이 확실하였기에 결국 교단 임시 지도부는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현자가 세운 왕국 실리시아를 인정한다. 단, 시국의 대악마와 마족 침공에 대현자와 실리시아 왕국이 적극적인 협력을 약속해야 할 것이다.”
아쉬운 건 자신들이었지만 곧 죽어도 큰소리쳤다.
주제도 모르고, 분수는 더더욱 모르는 교단 임시 지도부의 한심한 작태를 지켜본 왕들은 기가 막혔지만 여기서 더 교단을 자극했다간 저들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기에 속만 끓이며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 *
“로엘.”
“예, 전하.”
“내가 교단에 갚아야 할 빚이 있었어?”
“흠, 드래곤 하트?”
“그건 선물이지 빚이 아니라고. 그리고 설사 그게 빚이더라도 갚아야 할 대상은 지금의 교단 지도부가 아니라 날 위해 애써준 에스터 추기경이 되어야지. 참, 에스터 추기경의 행방은 어떻게 됐어?”
“정보부의 힘을 총동원했지만 아직 단서조차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전하.”
“이번 시국 사태로 더 오리무중이지?”
“저희가 접근하려던 자도 이번 일에 휘말려 연락이 두절 되는 바람에 에스터 추기경에 대한 추적은 힘들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단서를 못 찾은 거면…흐음, 돌아가셨다고 봐야겠군.”
“아무래도 그리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할 수 없지 그분에게 진 빚은 그분의 양아들이나 다름없는 레이몬드 재무국장에게 해주자고.”
에스터 추기경의 비밀 재산까지 정리한 뒤 어스에게 의탁한 레이몬드는 실리시아가 건국하면서 방금 어스가 언급한 것처럼 실리시아 왕국의 재무 국장에 임명됐다.
재산을 관리하는 건 타고난 레이몬드였기에 물 만난 물고기처럼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었다.
어스가 그를 아끼고 있었기에 로엘 역시 레이몬드 재무국장을 신경 써주고 있었다.
참고로 레이몬드는 실리시아 왕국에서 유일한 인간 고위 관료다.
“신이 더 신경 쓰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줘. 그나저나 교단 임시 지도부 놈들이 보낸 서신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전하께선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내가 먼저 물었잖아.”
“그리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이건 인간들의 문제니, 인간들에게 맡겼으면 합니다.”
교단 임시 지도부 인사들이 찾아와 엎드려 절하고 빌면 모를까 요청인지 명령인지 모를 이딴 서신 쪼가리 하나 받았다고 냉큼 움직이는 건 자존심 문제다.
갚아야 할 빚이 있거나, 저들에게 필요한 게 있으면 모를까 어스도 실리시아도 교단 임시 지도부에 원하는 건 없었다.
알량한 인정이 전분데 굳이 저들에게 이를 인정받지 않더라도 뤼빅스에서 실리시아를 건들 수 있는 자들은 이미 없다고 봐야 한다.
하물며 최근 들어 마탑과 마법사들이 더는 교단 눈치를 보지 않고 실리시아로 유입되면서 왕국의 전력은 한층 강화되었다.
한마디로 교단이 큰소리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똥인지 스튜인지 구분 못 하고 있었다.
“평생 사람들이 우러러보니깐 지들이 정말 신의 대리인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지. 좋아, 그건 로엘이 알아서 해.”
“놈들의 정신이 번쩍 들도록 소신이 대차게 나가보겠습니다.”
의욕으로 활활 끓고 있는 로엘을 보자 교단 임시 지도부 놈들의 뒷목 잡는 그림이 절로 그려졌다.
“가서 일 봐. 난 수련이나 해야겠어.”
“그럼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여전히 어스는 자신의 궁이 아닌 별궁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거력의 완벽한 제어가 아직까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인 연무장으로 가기 위해 워프 게이트를 시전한 어스는 안으로 들어가긴커녕 오히려 등을 돌렸다.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잘 못 느꼈다고? 이럴 리 없는데.’
이는 그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다.
하지만 어쩌랴 못 찾겠는걸.
어스는 다시 한번 자신의 감각에 집중했다.
바로 그때였다.
-네가 내 것을 가져갔구나!
낯선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흠칫!
“누구냐?”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난 내 것을 돌려받고 싶다. 네가 올 테냐? 아니면, 내가 널 찾아갈까? 개인적으론 전자를 추천한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리고 네 것을 내가 가졌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이지? 그리고 네가 어디에 있는 누구인지부터 밝혀야 내가 가든 말든 할 거 아닌가?”
-그렇군, 그러하군. 타인과의 대화가 낯설어서 실수했군. 내 이름 데릭 가이어스. 위선에 놀아나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지른 희대의 멍청이다.
데릭이란 이름은 흔하다.
워낙 유명한 이름이니까.
그러나 가이어스는 아니다.
이 성은 그 어느 개인도 사용할 수 없다.
교단과 인류가 그를 존경하여 그 누구에게도 그의 성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합의하였고, 데릭 가이어스가 승천한 이후에도 그 합의는 아직까지 지켜지고 있었다.
“데, 데릭 가이어스? 설마, 빛의 성자?”
-난 성자가 아니다. 희대의 멍청이지. 인간이 세 치 혀에 놀아나 천지분간도 못 하고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든 한심한 존재일 뿐이다. 두 번 다시 날 성자로 부르지 마라. 네가 모든 이종족의 왕이기에 이번은 특별히 용서하마.
“정말 네가 데릭 가이어스라고? 인간들의 편에 서서 종족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엘프의 신 위그드라실을 불태워 소멸시킨 자가 맞나?”
-다니엘 콘라드라는 저주받을 희대의 사기꾼에게 속아서 그리한 적이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조만간 내가 저지른 실수와 날 농락한 것들을 지상에서 모두 지워버릴 것이다. 그러나 내 너와 너의 왕국은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다니엘 콘라드 역시 유명한 이름이다.
룬 교단의 초대 교황이자, 찬란한 성자 데릭 가이어스의 인도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자칭 데릭 가이어스의 말을 들어보니 그 위대한 초대 교황이 희대의 사기꾼이란다.
룬의 신도들이 지금 이 말을 들었다면 분개하여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으리라.
‘이 녀석…진짜다.’
그런데 데릭 가이어스면 분명 인간인데 인간이 어떻게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는 걸까?
‘이건 내가 할 소리는 아니군.’
-내 것을 돌려다오.
“대체 그게 뭔지 알아야 돌려줄지 말지 정할 거 아닌가? 대체 무엇을 돌려달라는 거냐?”
-아드린느의 심장이다.
데릭의 목소리는 만감이 서려 있었다.
그리움? 슬픔, 탄식, 외로움 등등.
“드래곤 하트?”
-그것은 이 땅에 마지막 남은 드래곤의 흔적… 내 어머니의 심장이다. 나는 그분을 온전히 승천시킬 책임이 있는 자다. 돌려다오.
드래곤 하트와 철옹성은 이미 한 몸이다.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다.
그러니 저 말은 철옹성을 내달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혹시, 지금 시국을 점거한 괴인이 바로 넌가? 데릭 가이어스?”
-그렇다.
어쩐지 시국을 점거한 뒤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얌전히 있더라니 이제 보니 철옹성에 먹인 드래곤 하트를 찾는 거였구나.
그런데 이제 드래곤 하트가 거기가 아닌 이곳에 있는 걸 알았으니 제안을 거부한다면 필히 이곳으로 달려올 것이다.
놈이 오는 건 두렵지 않지만 자칫 왕궁이 상할 수 있으니 찾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좋아, 내가 가지. 하지만 말미를 줘.”
데릭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설마, 직접 오려는 걸까?
어스가 그와 같은 생각을 했을 때 데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 위그드라실의 보호자인 너의 약속을 믿으마.
이후 데릭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자신을 관찰하던 시선 역시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어스는 급히 로엘을 불렀다.
“로엘! 로엘!”
* * *
교단 임시 지도부의 주제 파악을 위한 로엘의 계획은 시작도 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데릭 가이어스가 어스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어스는 로엘을 비롯해 왕국의 주요 인사를 모아두고 데릭 가이어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밝혔다.
그러자 다들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스는 그들이 충격에서 벗어나도록 시간을 주었다.
로엘이 입을 열었다.
“데릭 가이어스가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이란 말입니까?”
“날 상대로 사기 친 게 아니면 그렇다고 봐야겠지.”
“드래곤이 어찌 인간의 편에서 그리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어찌 드래곤이 위그드라실님을 불태울 수 있습니까?”
그걸 왜 내게 따지는 거지?
로엘이 많이 흥분했군.
“진정해.”
“소, 송구하옵니다.”
“데릭 가이어스가 왜 그리 강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아. 드래곤이어서 그렇게 강했던 거야.”
“그런데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게 있습니다.”
“뭐?”
“놈은 전하께서 갖고 계신 드래곤 하트의 주인을 이 땅에 마지막 남은 드래곤의 흔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 그대로 해석하면 놈은 드래곤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듣고 보니 일리 있다.
“혼혈인가?”
“순혈이든 혼혈이든 일단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은 잡니다. 그런 자가 위그드라실님을 불태운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로엘의 태도를 보니 마치 드래곤은 위그드라실을 해쳐선 안 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위그드라실과 드래곤이 대체 어떤 관계이기에 저리 말할까?
“드래곤이 위그드라실을 해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드래곤은 맹약에 의해 위그드라실님을 해칠 수 없습니다. 설사, 데릭이 혼혈일지라도 드래곤의 피가 흐르는 이상 맹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맹약이라는 걸 어기면 어떻게 돼?”
“존재를 부정당합니다.”
존재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존재가 부정당할 경우 그 여파는 매우 심각해진다.
인간인 어스는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이종족인 이들은 그게 아닌 듯 표정이 심각해졌다.
‘내가 나라는 걸 타인이 꼭 인정해줘야 하나? 이종족의 사고방식은…난해하군.’
전반적인 분위기를 보니 존재 부정이란 게 이종족에겐 치명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데릭 가이어스는 어쩜 드래곤이었던 자일지도 모르겠군요. 전하.”
“이었던 자?”
“존재를 부정당한 드래곤은 더 이상 드래곤이 아닌, 괴물이니까요. 그리 생각하니 지금 그가 보여준 힘을 납득할 수 있군요.”
로엘 너만 납득하지 말고 나도 납득시켜야지. 아니, 왜 전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거야!
야! 나도 납득시켜달라고.
대현자로서의 체면이 있어 차마 말은 못 하고 속으로 그리 외쳤지만 아무도 그를 납득시켜주지 않았다.
그의 이런 답답한 속을 알아봐 준 이가 다행히 이 자리에 딱 한 명 있었다.
어스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어 누구보다 그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바로 푸리엘이었다.
덕분에 어스도 납득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를 만나러 갈 거야.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알 수 없지만 이번 시국행은 교단의 요청이 아닌 대현자인 나의 자발적인 결정이라고 세상에 알려. 교단 놈들의 오만방자함은 보기 싫으니까.”
“그와 싸우실 생각이십니까?”
“로엘.”
“예, 전하.”
“너 방금 나 모독한 거야.”
“제, 제가요?”
“응, 너 님이요. 잘 들어 로엘. 이 세상에서 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자는 없어. 이건 내 자랑이 아니라 팩트인 거야, 팩트.”
어스는 호언장담한 뒤 곧장 시국을 향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