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흐,”
잠이 깼을 때는 추웠다. 페란스는 살갗을 적시는 부드러움과, 동시에 미묘한 메스꺼움을 함께 느끼며 눈을 떴다.
“……하?”
“깨어나셨군요.”
낯선 방, 낯선 천장이 보였다.
제 눈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블루와렌의 수호자 하나였다.
그러나 그의 차림새는 낯선 주변처럼 낯설었다.
항상 흠 없는 성장 차림이었던 그가 팬츠 위로 셔츠 한 장만 걸친 채 소매를 걷어 올리고 흰 수건을 쥐고 있었다.
흰 수건은 무언가를 닦기 위해서였다.
그 무언가는 제 알몸이었다.
……탓!
그걸 깨닫자마자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페란스는 제 가슴팍을 닦고 있던 마르스티엘의 손을 쳐 내고 시트를 끌어 올렸다.
“무슨 짓을 하고 있나.”
“……. ……실례했습니다.”
마르스티엘은 얌전히 손을 들고 몸을 뒤로 물렸다.
“실례라고?”
제 알몸에 손을 대고 있던 행위를 고작 실례라는 말로 뭉뚱그리는 마르스티엘을 향해 페란스가 눈썹을 치켜떴다.
“몸을 닦아야 옷을 입혀 드릴 수 있을 것 같기에 행한 무례입니다.”
“내 몸을 닦아? 내 몸이 어땠……. ……젠장.”
머리가 뒤늦게 돌아갔다.
페란스는 끈적한 안개가 낀 것 같은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러자 제 머리칼에서 역한 냄새가 났다.
질색을 하며 머리칼을 쳐 내려고 들자 검푸른 멍이 든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묶었어, 나를.
저자의 침대에.
알몸인 이유도 있었다. 애초에 알몸으로 묶였으니까. 발정기에 옷은 의미가 없었다. 알몸이 아니었다면 스스로 잡아 찢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땠더라.
몇 번이고 구토한 기억이 남아 있었다.
토사물로 더러워진 마르스티엘의 옷과 그가 제 몸을 붙들고 한 입만이라고 속삭인 기억도 났다.
결국 먹었던가. 그 억제제라는 것을.
그 이상은 안개 속에 숨어 더는 나오지 않았다.
“기억이 일부 사라졌을 겁니다. 억제제의 부작용입니다.”
“아…….”
그렇다니 억제제를 먹었다는 뜻이었다.
페란스는 감각이 반만 남은 듯한 손을 쥐었다 폈다. 시트 한 장 아래 알몸이라는 것은 더 이상 수치심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발정기가 지나갔다. 개새끼 없이도. 개새끼에게 구걸하지 않고서도.
두통과 간헐적인 메스꺼움을 제외하면 자신은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멀쩡했다. 손목과 발목에 짙은 멍이 들었지만 그건 개새끼와 섹스할 때도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게…… 효과가 있었어.”
제 입으로 중얼대면서도 아직 믿기지 않았다.
“효과가 있었어.”
페란스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하, 이렇게…… 이렇게도…….”
손에 이어서 어깨가 떨렸다. 페란스는 지금 울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심장이 요동을 쳤다.
방금 그는 제 인생을 재단하고 있던 어떤 선을 하나 넘어섰다. 이제 다시는 그 안쪽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짐작은 하고 계시겠지만 중독을 우려하신다면 계속해서 쓸 수 있는 방법은 아닙니다. 억제제에는 블루와렌에서 제조하고 유통하는 하시시가 들어갑니다.”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무엇이 필요한지.
각인을 깨는 방법을 사야 했다. 그 어떤 값을 치르든 간에.
“내게 팔아.”
페란스가 얼굴에서 손을 뗐다. 참다 새어 나온 눈물이 속눈썹에 걸려 있었다. 페란스는 알지 못했지만 마르스티엘의 눈에는 그 눈물이 보였다.
“아만다리스의 청혼은 거절해. 그에 상응하는 값을 치르겠다.”
“그,”
마르스티엘의 입술이 다 벌어지기 전에 페란스가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잠깐. 내 말 안 끝났어. 시간이 필요하다. 값을 치르겠지만 그게 얼마가 되어야 할지 나도 계산을 해야 하니까.”
“……그럼 저는 전하의 말씀만 믿고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대답이 약간 시차를 두고 들려왔다.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물처럼 옅은 푸른 눈에는 페란스가 읽을 수 있는 감정이 없었다.
“흥정은 관심 없다 하던 분이셨으니 계산이 늦을 이유도 없을 줄 압니다.”
“웃기는군. 그대가 그런 말을 하는 게.”
페란스가 얼굴을 구기며 웃었다.
이젠 더 이상 감출 것도, 감출 수도 없었다.
저 작자는 제가 가장 깊이 감추고 있던 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그에게 흠뻑 젖은 아랫도리를 드러내며 신음하던 순간부터 가짜로 내세울 자존심도 없어졌다.
“여기서 절실한 인간은 그대가 아니라 나야. 그걸 다 봤잖아. 그대를 붙들고 거래를 해야 하는 인간은 나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마르스티엘이 고개를 까닥였다.
페란스는 옷차림새가 편할 뿐, 언제나처럼 멀끔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마르스티엘이 사실은 조금 수척해져 있다는 것을 지금 알아보았다.
입술은 찢겨 피딱지가 얹혀 있었고 눈 밑은 잠을 못 잔 사람처럼 어둑했다.
“입술은 왜 그래? 설마 내가 그랬나?”
그 말에 마르스티엘은 제 입술을 손으로 가렸다.
“별것 아닙니다.”
“그것도 계산에 얹고 싶다면 솔직하게 말해. 알잖아. 나는 흥정에 관심이 없다는 걸. 바라는 게 있으면 네 입으로 직접 얘기해라.”
“이런 분이셨군요. ……알겠습니다.”
잠깐 통 모를 표정을 짓던 마르스티엘이 작게 입술 끝을 올렸다.
“그럼 이것도 값을 치러 주십시오.”
“그건 얼만데?”
“터무니없진 않을 겁니다.”
“불러 봐.”
“그럼.”
마르스티엘이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페란스가 눈을 두 번 깜박이는 사이 다가온 그가 고개를 숙여 불시에 눈가를 입술로 덮었다.
“읏! 무슨 짓이야!”
뭔가를 빨아먹는 것 같았다. 그게 뭔지 깨달을 새도 없이 욕지기가 치솟았다. 마르스티엘 탓이 아니라 각인 반응이었다.
페란스는 그가 보는 앞에서 구토를 하지 않기 위해 제 입을 틀어막았다.
마르스티엘 역시 각인 반응을 예상했을 테지만 그가 제 몸을 건드릴 때마다 토하고 싶진 않았다.
“전하의 각인 상대가 누군지 알려 주십시오. 그게 제가 원하는 값입니다.”
“후……. 그건 좀, 비싸지 않나?”
마르스티엘은 늘 의외였다. 제 각인 상대를 알려고 하는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제 각인 상대라는 정보가 얼마나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그 정보를 돈벌이에 이용할 심산일 수도 있었다.
페란스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마르스티엘이 이국의 상단주가 아니라 혀를 잘린 노예였다고 해도 비밀을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입술이야 금방 나을 텐데. 잠깐 아프고 말 상처를 두고 내 비밀을 캐내겠다니. 너무 바가지라고 생각하지 않나?”
“상처가 아니라 제 입의 가격입니다.”
“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값을 치르시면 제 입은 전하의 것이 됩니다.”
“…….”
그러니 그 어떤 비밀도 제 입을 벗어날 리 없다는 의미인 걸까.
하지만 입과 입술은 다르지 않았다. 그 입이 제 것이라면 입술도 마찬가지 아닐까.
말해 봐. 방금 전 그 입술로 집어삼킨 게 뭐였는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내 것이 된다면 그 입술로 무얼 더 할 수 있는지.
“생각…… 해 보겠다.”
아직은.
아직은 섣불리 믿을 수 없었다.
마르스티엘이 아닌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저 입술을 산다면, 그건 이제껏 제가 산 것 중 가장 눈이 즐거운 무언가가 되리라는 것을.
“오래 기다리진 않겠습니다.”
제 입술을 팔겠다던 마르스티엘이 정작 시선은 페란스의 입술에 둔 채 말을 했다.
“제가 그렇게 참을성이 있는 편은 아닌 것 같으니.”
“사흘.”
엉겁결에 사흘이라는 시간이 입 밖으로 흘러나갔다.
각인 반응은 여전했고, 다른 알파의 존재가 역하고 메스꺼운 가운데 심장은 시끄럽게 들썩였다.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페란스는 아직 이 감각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사흘만 기다려. 그사이 계산을 끝마칠 테니.”
“그럼 그렇게 알겠습니다.”
마르스티엘은 페란스의 손끝을 잡아 입술을 댔다. 꿀꺽, 침이 삼켜졌다.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저 입술을 가지고 싶어졌다는 걸.
* * *
“……미친.”
페란스는 사흘의 유예와 함께 궁으로 돌아왔다.
궁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는 블루와렌의 수호자를 찾아간 일이 생각보다 큰일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룻밤이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이틀이었다. 그러니까 페란스는 사흘째 아침에 궁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페란스의 환궁 사실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시종장 키슬크는 양 볼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그를 맞이했다.
“전하…….”
묻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이 산더미 같을 것이다.
이틀이나 무단으로 궁을 떠나 있던 그가 호텔 마차를 타고 환궁했다는 건 개새끼가 입에 거품을 물 일이었다.
그 호텔을 통째로 빌린 자가 블루와렌의 수호자라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전부 알고 있었다.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알파였고 페란스는 대외적으로 각인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오메가였으니 불에 기름을 들이부은 듯한 스캔들이 번질 것이다.
사실 마르스티엘은 호텔 마차가 아닌 다른 마차를 탈 것을 권했다. 환궁이 급하다며 호텔 마차를 고집한 쪽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건 핑계였고, 어느 정도 스캔들을 의도하긴 했다.
왕실과 염문이 난 상대에게 개새끼가 그 집의 셋째 오메가를 대놓고 들이밀지는 못할 것이다. 진행 중이던 혼담이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거기에 하나 더해 개새끼가 미쳐 날뛰는 꼴이 보고 싶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