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21)화 (21/122)

21.

눈에 익은 붉은 지붕과 네모난 탑 네 개를 확인한 페란스가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어.”

“예, 전하.”

덜컥, 마차 문이 열렸다.

아직은 하늘이 푸른 시간이었다. 서쪽만 은밀히 붉은 기운이 돌고 있었다.

페란스가 가장 싫어하는 시간이었다. 노을이 깔리고 밤이 되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끼익,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올지도 몰랐다.

“…….”

“……전하?”

페란스가 마차에서 내리다 말고 서 있자 근위대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무슨 문제라도…….”

“아니. 괜찮아.”

괜찮다는 말을 쥐어짜 내는 순간 제 마차보다 뒤늦게 멈춰 서는 마차가 보였다.

마차 문을 열고 내리는 마르스티엘이 보였다.

그러자 정말 괜찮아졌다. 개새끼의 페로몬이 제 몸을 유린하던 그 순간 마르스티엘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그 페로몬을 단숨에 눌러 버리던 기억은 심장 박동처럼 생생했다.

성욕에 들떠 흐물대는 몸을 안아 들었다. 애액으로 젖은 옷을 벗기고 욕조에 담가 꼼꼼히 씻어 주었다.

역겹다는 표정을 한 번도 짓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게 괜찮았다.

“……너무 잘생긴 거 아냐?”

페란스가 툭 내뱉는 말을 들은 근위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네…… 네, 전하?”

“저만한 인물이 왜 그간 위스타드에서는 안 보였을까. 안 그래?”

“제, 제게 물으시는 거라면…… 그건 잘……,”

근위대가 허둥지둥 대답을 늘어놓았다.

답을 듣기 위해 한 말은 아니었지만 석연찮은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페란스는 근위대를 힐긋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잘 모른다고 할 참이면 눈을 크게 뜨고 다녀라. 명색이 왕실 근위대면서 눈 뜬 장님이면 곤란하지.”

“저, 전……. ……송구합니다, 전하.”

“쯧.”

못마땅한 혓소리를 낸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을 향해 걸어갔다.

“전하.”

페란스의 걸음을 인지한 마르스티엘은 팔을 가슴에 대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인사는 됐으니 얼굴을 보여. 몸은 괜찮나? 억제제는?”

“……많이 나았습니다.”

그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마와 볼에 번져 있던 열감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 보이는군. 다행이야.”

“황공합니다, 전하.”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의 팔을 붙잡아 키사드 성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둘은 나란히 속도를 맞춰 걷기 시작했다.

정문에는 이미 키사드의 궁인들이 나와 열을 지어 페란스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카벨리카의 걸음마다 신의 영광을.”

키사드 성의 시종장을 겸하는 웨이모스 후작이 나와 인사를 건넸다.

“공에게도 신의 축복을. 내 약혼자다.”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의 소매를 잡아당겨 그를 제 앞에 세웠다.

웨이모스 후작은 당황한 듯 입을 벌렸다.

“그게……,”

“뭐 하나. 인사하지 않고.”

“……신의 축복을.”

쭈뼛대는 꼴을 보니 블루와렌의 수호자에 대한 소문은 충분히 들은 모양이었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페란스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웨이모스처럼 나이 많은 귀족들은 수도의 젊은 귀족들보다 훨씬 완고했다. 제 입으로 아무리 약혼자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고 다녀도 약혼을 믿지 않으려 들 것이다.

딱히 귀족들을 포섭하려는 것은 아니라 상관없었다. 그들 눈에 자신이 사랑에 취해 허우적거리는 꼴로 보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마르스티엘은 깍듯하게 후작의 인사를 받았다.

후작은 애써 헛기침을 삼켰다.

“안으로 드시지요, 전하.”

“동쪽 침실을 쓰겠다.”

“……뜻대로.”

동쪽 탑에 있는 침실은 침실 두 개가 마주 보는 게 아니라 나란히 연결되어 있었다. 방을 나눈 문은 좌우로 끝까지 밀 수 있어서 사실상 한 개의 방이었다. 카벨리카 왕실의 역대 계승자들이 가장 많이 탄생한 방이기도 했다.

왕이 이 방을 쓴다는 것은 동행한 자와 격식 없이 자유로운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의미였다.

“…….”

입을 꾹 다문 후작은 안내자가 되어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따라가는 페란스는 보란 듯 마르스티엘의 손가락에 깍지를 걸었다.

“키사드 성은 마음에 드나?”

“공기가 다른 게 느껴지는군요. 쾌적하고 아늑한 곳입니다.”

“마음에 든다는 뜻으로 알아듣지.”

페란스는 짓궂게 웃으며 깍지 낀 손을 잡아당겼다.

“나와 혼인하면 이곳은 네 소유가 될 테니.”

“그렇습니까?”

“왕의 배우자에게 선물하는 곳이야.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지금은 내게 돌아온 곳이다.”

“아…….”

마르스티엘의 반응은 싱거울 정도였다. 페란스는 엄지손톱으로 그의 손등을 죽 긁었다.

“그게 단가? 너무 감흥이 없는 거 아냐?”

푸른 눈동자가 통 모를 표정을 한 채 페란스의 얼굴을 향했다.

“벌써부터 기뻐해도 된다는 뜻입니까?”

물론 아니었다.

이 성이 마르스티엘의 소유가 될 일은 없을 테니까.

그걸 잠시 잊어버린 것은 자신이었다. 제 옆에 있는 마르스티엘에게 키사드 성을 보여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서.

“네가 블루와렌에서 왔다는 사실을 간과했군. 보증이 없는 어음은 취급하지 않는다는 걸 깜박했어.”

“전하께서 서명하신 어음이라면 뭐든 받겠습니다.”

……이렇게 떠보려는 건가. 나를 다 믿는 건 아니로군.

마르스티엘을 배신하려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자신을 다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헛돈을 썼군. 그렇게 번쩍대는 반지를 끼워 놔도 몰라주니.”

마르스티엘은 피식 웃었다.

“외람되지만 반지에 쓴 돈은 제가 더 많습니다.”

“알고 있어. 두고 봐. 금방 만회할 테니까.”

겉으로 듣기에는 다정한 연인들의 밀담이었지만 속에서 오가는 생각은 끝이 없었다.

……믿지 않는다면, 거래는 어떻게 할 생각인 거지.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의 옆모습을 살폈다.

제 얼굴에 닿는 시선이 유독 따끔했던지 마르스티엘이 부드럽게 깍지 낀 손을 잡아당겼다.

“전하. 하실 말씀이 있는 겁니까?”

“……그냥. 여기서 얼마나 있을 수 있는지, 뭐 그런 생각.”

마르스티엘은 페란스가 숨긴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

각인을 푸는 일이 얼마나 걸리겠느냐는 뜻이었다.

“그건 전하께 맡기겠습니다. 저는 전하께서 허락하시는 한 곁에 머물겠습니다.”

반면에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거래를 끝마칠 생각이 있다면 너 역시 그렇게 하겠다는 말인가.

불확실한 질문에 대한 답은 오늘 밤 알 수 있을 것이다.

동쪽 탑, 사람들을 물리고 단둘만 침실에 남게 되는 상황이 되면.

페란스는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주었다.

“고작 내 허락이 필요한 거라면 그건 알아서 해. 내 허락을 네게 주겠다. 원하면 머물러. 내게 물을 필요 없이.”

들려오는 답은 조금 느렸다. 한번 의미를 곱씹어 보는 것처럼.

“……뜻대로.”

이어서 동쪽 탑의 입구가 드러났다.

* * *

웨이모스 후작이 준비한 저녁 만찬은 나쁘지 않았다.

카벨리카 왕실의 새 일원이 될지도 모르는 이를 환영하는 거창한 느낌은 없었지만 그 외에는 딱히 흠잡을 데 없이 무난했다.

그래서였다.

자꾸만 술잔으로 손이 갔던 이유가.

달리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게 없으니 생각은 온통 한 군데로 몰렸다.

-섹스입니다.

각인을 푸는 법을 알려 주며 마르스티엘이 한 말이었다.

다른 장치들이 더 필요하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방법이 섹스라면 긴장이 되는 게 당연했다.

섹스라고.

페란스는 술잔 끄트머리로 16인용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마르스티엘을 훔쳐보았다.

만찬용 연회복을 입은 모습은 역시나 근사했다. 땀에 절어 말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근사한 인간이 잘 차려입고 절도 있게 앉아 있는 게 근사하지 않을 리 없었다.

만일 자신에게 선택지가 있었다면 주저 없이 마르스티엘을 골라잡았을 것이다.

그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포크를 빼앗아 들고 육즙이 묻어 있는 입술에 키스하는 상상을 했다.

아무래도 마르스티엘은 키스 도중 입술을 떼고 속삭일 것 같았다.

-음식 맛이 느껴질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재빨리 와인으로 입을 헹구지 않을까.

어쩌면 그 전에 자신이 그 입술에 와인을 부을지도 몰랐다. 붉은 술이 입술을 적시고, 목젖을 적시고, 셔츠를 적실 것이다.

-너를 먹다 취하겠는데.

자신은 이런 말을 중얼대며 입술부터 시작해서 와인이 적셔 놓은 살갗을 빨아먹을 것이다.

벗길 옷이 너무 많아 짜증 섞인 신음이 흐를 것이다. 그럼 마르스티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 단추를 잡아 뜯을 것 같았다.

-마음껏 드십시오.

이런 말 정도는 해 주지 않을까.

머릿속이 훅 달아올랐다.

입에 닿는 대로 살갗을 빨아올리며 뜯어진 셔츠를 벌리고, 그리고…….

“…….”

페란스는 손에 든 잔을 기울였다. 저도 모르게 와인 한 모금이 목으로 꿀꺽 넘어갔다.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닙니까?”

마르스티엘은 우아하게 놀리던 나이프를 멈추고 물었다.

“……취하려면 멀었어.”

눈이 마주쳤다.

잠깐 끊어졌던 상상을 옅은 푸른색 시선이 다시 이어 놓았다.

셔츠를 벌리고, 단단한 살갗을 혀로 쓸면 그가 몸을 들썩이며 신음할 것이다. 부풀기 시작한 성기 탓에 팬츠 가운데가 불거질 것이다. 그럼 자신은 그의 다리 사이에 앉아 매듭을 풀고 성기를 꺼낼 것이다. 일단 손에 쥐어 얼마나 크고 뜨거운지 느낀 다음 천천히 귀두부터 핥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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