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31)화 (31/122)

31.

“……아, 간지……. ……? ……!”

눈가가 간지러웠다. 누군가가 손끝으로 눈썹을 만지작대는 것 같았다.

그게 귀찮아 잠결에 손을 휘적이던 페란스가 번쩍 눈을 떴다.

“너……,”

마르스티엘이었다.

지난 새벽에 해독제를 먹은 그가 이제 깨어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허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더 주무실 참이라면 침대를 양보하겠습니다.”

“……!”

숨이 덜컥 내려앉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문자 그대로 깨달았다.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기댄 채 깜박 선잠이 들었던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에게 달려들었다.

몸이 이끄는 대로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정수리에 입술을 댔다. 바보가 된 것처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이해할 수 없는 신음만 흘렀다.

“……내가 지금, 몹시 못나 보일 것 같은데…….”

페란스가 입을 연 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의 일이었다.

“각인 반응이 일어나면 더 끔찍해질 테니까 이만하겠어.”

페란스는 미적대며 마르스티엘을 놓았다.

마르스티엘은 소리 없이 작게 웃으며 페란스를 바라보았다.

“전하는 그럴 때가 사랑스럽습니다.”

“너는 대체……,”

페란스는 눈썹을 구기다 말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죽다 살아난 주제에 왜 그런 헛소리나 하고 있는 거야.”

“헛소리는 아닙니다.”

“나 참.”

쑥스러운 기분을 이기지 못한 페란스는 괜히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몸은 괜찮아?”

“죽다 살아난 몸치고 괜찮습니다.”

페란스는 고개를 들어 마르스티엘을 마주했다.

“정말이야? 해독제를 너무 늦게 먹었는데.”

“죽기 전에 먹었으니 됐습니다. 그리고 독에는 익숙한 편입니다.”

“뭐? 그게 무슨……. ……아,”

노예 출신의 마르스티엘이 블루와렌의 상단주가 되기까지 과정이 쉽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페란스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음독은 그의 말대로 흔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들을 만한 얘기를 듣는 건데 마음은 뒤늦게 불편했다.

“제가 딱하십니까?”

언짢음을 감추지 못하는 그를 두고 마르스티엘이 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네게 비례가 되나?”

“그렇진 않을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하신다면.”

“그럼 그렇다고 해. 나는 네가 겪었을 일이 안쓰럽다.”

“그러시군요.”

감정이 섞이지 않은 짤막한 반응은 페란스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나중에…… 들려줘. 네가 괜찮다면.”

마르스티엘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웃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차가운 느낌이긴 했다.

페란스는 그게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때문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냉소적이 되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 날이 오길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페란스는 이해한다는 뜻으로 마르스티엘의 손등을 토닥였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마르스티엘이 페란스의 손을 휙 낚아챘다.

“왜 그러는데?”

“좀 더 닿아 있고 싶습니다. 독을 쓴 자는 찾았습니까?”

마르스티엘은 불쑥 던진 말 한마디로 그를 헝클이는 재주가 있었다.

“……. 후작이 여기서 아만다리스와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증인은 찾았어. 그런데 독에 관한 언급이 구체적으로 있는 건 아니야. 아만다리스까지 얽을 수는 없을 것 같아.”

“거기까지 생각하셨습니까?”

“네게 독을 먹일 인간이라면 뻔하잖아. 아만다리스 말고 누가 있는데.”

“……그렇게 볼 수 있겠군요.”

“그래서 지금은 후작에게 책임을 물릴 생각이다.”

“저런.”

마르스티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증거가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페란스의 눈이 서늘해졌다.

“키사드 성의 책임자는 후작이다. 후작의 포도주에 들어간 독이니 마땅히 후작이 책임져야 할 일이야.”

웨이모스 후작은 성의 지하 창고에 갇혀 있었다. 키사드 성을 지을 때 애초에 감옥을 설계하지 않은 탓이었다.

후작은 수도로 압송된 뒤 재판을 거치지 않고 공개 교수형에 처해질 예정이었다. 독을 먹은 건 페란스도 마찬가지였으므로 후작의 죄는 무거웠다. 후작의 작위와 영토는 왕실로 반환되고 가족들은 외국으로 추방되어 영원히 위스타드에 발을 들일 수 없게 될 것이다. 앞으로 위스타드에서 웨이모스라는 성을 쓰는 자가 나타나면 그 또한 재판 없이 사형이었다.

“아만다리스 공이 반대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몸을 사리겠지. 혹시라도 후작이 살아서 입을 열면 곤란하니까.”

“웨이모스가의 몰락은 아만다리스 공에게도 부담이 될 겁니다. 선대부터 오가던 자금의 흐름이 막히는 데다 혼인으로 얽힌 자들도 있습니다.”

웨이모스로 태어나 아만다리스 성을 얻게 된 자들도 있었고, 그 반대도 있었다. 위스타드의 대귀족들이 거의 근친이나 다름없는 복잡한 가계도를 지닌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그러나 선대부터 돈거래가 오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마 선왕도 몰랐을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데? 나도 모르는 일을.”

“미리 알아봤습니다. 위스타드에서 장사를 시작할 참이었으니.”

“쉽게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텐데.”

“돈이 흐르는 곳이라면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모르기도 어렵습니다.”

“아, 그렇게 들으니 좀 무서운데. 내가 작년에 돈을 얼마나 썼는지도 알고 있는 거 아냐?”

“대충은.”

페란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왜 그 어떤 왕국도 블루와렌을 집어삼킬 생각을 하지 못하는지 알겠군.”

블루와렌은 작은 항구도시였다. 나라라고 할 수도 없는 곳이었다.

정규군조차 없는 곳이라 누구든 군대를 보낼 수만 있다면 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왕국도, 어떤 왕도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블루와렌은 모든 권력 다툼 사이에서 일종의 비무장지대 역할을 했다. 블루와렌에 맡겨 둔 돈이 안전하려면 블루와렌의 안전이 먼저 보장되어야 했다.

블루와렌이 손에 쥐고 있는 엄청난 정보들도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블루와렌이 타격을 받으면 그 정보부터 돈이 되는 곳을 따라 흩어질 것이다. 그 사실을 꿈에서도 원치 않는 왕실 인사들이 아주 많으리라는 데 카벨리카의 왕관을 걸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너는…….”

머리가 무섭도록 돌아갔다.

웨이모스와 아만다리스의 자금 거래를 알고 있다는 것은 그 밖의 다른 대귀족들의 주머니 사정도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네. 위스타드에 관해서도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야 페란스는 그의 존재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카벨리카의 이름을 원하는 건 결코 허황된 욕망이 아니었다.

마르스티엘이라면 아만다리스와, 아만다리스의 손을 잡은 무리들까지 전부 끄집어 낼 수 있었다.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마르스티엘과의 혼인은 제 의지나 관용으로 이루어질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자신이 각인을 풀고, 개새끼의 손에서 벗어나 왕관을 쓰는 모든 일이 마르스티엘의 손에 달려 있었다.

제 혼인 상대는 마르스티엘이어야만 했다.

페란스는 충동적으로 마르스티엘의 손을 붙들고 자신이 끼워 놓은 반지에 입을 맞췄다.

“고마워. 나를 선택해 줘서.”

마르스티엘이 아만다리스가 아닌 제 손을 잡았다는 것에는 훨씬 더 큰 의미가 있었다.

그 또한 가진 것을 모두 걸고 자신과 아만다리스 사이에서 벌어질 전쟁에서 편을 정했다는 뜻이었다. 그는 벌써부터 각인을 당한 오메가 왕자 쪽이 훨씬 더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를 택했다.

자신이 마르스티엘을 선택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선택은 그의 몫이었다.

“갑자기 그러시는 이유를 모른 척하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되겠군요. 전하께서 웨이모스 후작의 교수형을 결정하신 것은 그 뒤에 벌어질 일들도 감당하시겠다는 각오를 하셨다는 뜻일 테니.”

“맞아. 나는 아만다리스를 죽일 것이다. 그런 뒤 너와 혼인하겠어.”

이번엔 진심이었다. 그 어떤 계산도 없었다.

“너와 낳은 아이가 카벨리카의 이름을 이을 것이다. 내 피를 걸고 하는 약속이자 맹세야.”

마르스티엘은 꿈을 꾸듯 천천히 중얼거렸다.

“……바라 마지않던 일입니다.”

웨이모스 후작의 처형은 그 맹세를 위한 첫걸음이 되었다.

* * *

출발을 당기는 게 아니라 미뤘다.

페란스는 여느 때보다 신중하게 제 행보를 계산했다.

웨이모스 후작을 붙잡아 가둔 일로 그 아들들이 한 시간이 멀다 하고 키사드 궁의 정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웨이모스 후작가의 모든 재산을 압류하고 작위를 박탈한다는 왕명은 근위대를 시켜 수도로 보냈다. 하루 반나절 거리였으니, 실질적으로 후작저를 비우는 일은 나흘 뒤부터 시작일 것이다.

그 나흘간 페란스는 수도를 비워 두기로 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다급하게 움직이면 오히려 빈틈이 드러날지 신경이 쓰였고, 후작저를 비우는 일을 과연 근위대가 신속히 이행하는지 곁에서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거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마르스티엘의 몸 상태가 걱정되기도 했다. 자신은 곧장 해약을 먹어 별다른 후유증이 없다지만 하루를 꼬박 독기에 시달린 그의 몸은 상황이 다를 것이다.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마르스티엘은 엄살을 부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날을 곤두세우고 그를 지켜봐야 하는 것은 페란스의 몫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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