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45)화 (44/122)

45.

“……여행이 즐거우셨는지 차마 여쭙지 못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전하.”

시종장 키슬크가 정문에서 페란스를 마중했다.

웨이모스 후작의 반역죄로 왕궁은 물론 수도 전체가 뒤숭숭한 시점이었다. 오히려 사건이 벌어졌던 키사드보다 수도가 더 망가진 벌집처럼 보였다.

마르스티엘이 대귀족들을 제대로 흔들고 있다는 것은 수도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혼자십니까?”

“내 약혼자의 행방을 묻는 거라면 오늘은 입궁 예정이 없다.”

마르스티엘은 레시토 호텔로 돌아갔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지금 진행하는 일들의 속도 탓이 컸다.

페란스는 왕궁으로 들어서는 외길 앞에서 헤어지는 순간까지, 마르스티엘에게 끝끝내 알레프를 지켜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유대감이 자신보다 깊다는 사실을 알기에 섣불리 말을 꺼냈다간 오히려 때 이른 반감만 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러시군요. 알겠나이다.”

“그렇다고 너무 방심하진 말고. 마르스티엘은 원하면 언제든 궁에 출입이 가능하니까. 나와 마찬가지다.”

“……너무 성급한 허가가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나이다, 전하. 그렇지 않아도 키사드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겪으셨사온데……,”

“그래서 허가한 일이다. 그가 내 목숨을 구했다.”

키슬크가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알겠나이다, 전하.”

계단을 마저 오르려던 페란스는 문득 생각이 나 물었다.

“혹시 안에 섭정이 와 있나?”

“네? 아닙니다, 전하. 명하신 대로 섭정께는 당분간 출입 금지령이 내려졌음을 알렸나이다.”

납치 사건이 있고 난 뒤 미리 일러 둔 일이었는데, 뜻밖에도 키슬크는 착실히 제 말을 따르고 있었다.

아만다리스는 강제 인거를 부인하는 중이었지만 출입 금지령에는 달리 항의를 하지 않았다. 페란스가 직접 내린 명령을 무시하면 일단 모양새가 보기 좋지 않으리라는 점을 신경 쓰는 듯했다.

확실히 수도는 변하고 있었다.

마르스티엘이라는 방법이 있기 전에는 출입 금지령 같은 건 말을 꺼내 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 개새끼를 더 필요로 하는 쪽은 페란스였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자신은 개새끼 없이도 발정기를 버틸 수 있었고, 공식적인 약혼자가 있었다. 수도 내부의 권력은 아주 빠르게 흔들리고 이동할 것이다.

“아만다리스가 없다면 시간 끌 게 없겠군.”

페란스는 계단 중간에서 몸을 돌렸다.

키슬크는 화들짝 놀라 페란스를 따라 방향을 틀다 발목을 꼬았다.

“전, 읏, 하! 왜 그러시는지,”

“후작을 봐야겠어.”

“네? 아니, 이제 갓 도착하셨습니다, 전하! 여독으로 곤하실 텐데 옷이라도 좀 갈아입으시,”

“방에 준비해 놔.”

이제 지팡이는 없어도 될 것 같았다.

페란스는 지팡이를 던지듯 키슬크에게 넘긴 다음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며 눈에 보이는 근위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그리고 너. 지하 감옥으로 간다. 안내해.”

“……명을 따릅니다, 전하.”

처음에는 좀 허둥대는 듯하던 근위대는 빠르게 자세를 가다듬고 길을 찾았다.

* * *

“…….”

그새 밤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창틀에 앉아 있던 페란스는 창에 이마를 기댔다.

달빛이 식혀 놓은 유리는 차가웠다. 정신이 번쩍 들 온도였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헝클어진 채였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후작은 아무것도 몰랐다.

아만다리스와 주고받았던 서신은 의례적인 인사뿐이었다. 아만다리스 쪽에서는 페란스의 방문과 관련해 뭐라도 정보를 캐내고 싶었던 모양이었지만 후작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후작은 페란스 왕자의 약혼 상대자가 신분이 없다는 데 유감을 드러냈어도, 예년처럼 키사드에서 카벨리카의 후계자를 맞을 수 있음을 깊은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답신을 보낸 게 다였다. 아만다리스는 그 뒤로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

후작이 보낸 포도주를 받아 마르스티엘에게 전달한 자가 범인이었다.

자신이 알기로 그자는 알레프였다. 그리고 페란스는 여전히 그 사실을 마르스티엘에게 직접 말할 자신이 없었다.

“증거가…… 있어야 하려나.”

그 뒤도 문제였다.

알레프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하면, 마르스티엘은 그를 포기할까.

그를 살리기 위해 자신과 또 다른 거래를 제안하려고 들지 않을까. 그걸 받아들일 수나 있을까.

“하……. 미친.”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알레프가 한 짓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교수형도 사치였다. 후작은 신분상 교수형을 받을 수 있었지만 알레프는 불에 타서 죽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마르스티엘의 눈치를 보느라 거래를 미리 짐작해 보고 있었다.

“대체 뭘 하는 거야…….”

페란스는 쿵, 이마로 유리창을 약하게 들이받았다.

그때였다.

끼릭.

조용히 침실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번져 왔다.

“……!”

아만다리스가 하는 짓이었다.

페란스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책상 서랍을 열었다. 무기가 될 만한 건 종이칼이 전부였다. 한 뼘 길이의 작은 칼을 쥔 페란스가 벽에 붙어 섰다.

출입 금지령이 통한다고 생각했던 건 그저 제 착각인 모양이었다. 이 빌어먹을 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근위대나 시종장이나, 전부 다 개새끼의 말 잘 듣는 꼬리였다.

끼이익.

손잡이가 전부 돌아갔다.

페란스는 거세게 치솟는 심장 박동을 가다듬었다.

아만다리스가 페로몬을 풀기 전 찌를 것이다. 기왕이면 뒷목이 좋을 듯했다. 페로몬을 생성하는 작은 기관이 그 어딘가에 있다고 했으니까. 두 번 다시 그 개같은 페로몬을 내뱉지 못하도록 깨끗하게 도려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끼익, 철컥.

……탁.

희미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

페란스가 칼을 치켜들었다. 아만다리스가 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깨를 붙들고 그대로 뒷목을 찌를 작정이었다.

“위험합니다.”

그러나 방으로 들어선 자는 아만다리스가 아니었고,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칼을 든 페란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 이 시간에 올 줄은 몰랐는데.”

마르스티엘이 페란스의 손에서 종이칼을 가져갔다.

“그럼 누굴 예상하셨습니까?”

“아만다리스가 온 줄 알았어.”

어둠 속에서도 마르스티엘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지는 게 보였다.

“이렇게 드나들었습니까? 이런 시간에?”

“지난 일이야. 출입 금지령 때문에 당분간은 문을 열어 줄 놈들도 없어.”

“…….”

입을 다문 마르스티엘은 종이칼 끝으로 제 손가락을 찔렀다.

툭, 살갗이 애써 눌리며 작은 핏방울이 솟았다.

“무슨 짓이야. 왜 이래?”

이번에는 페란스가 마르스티엘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들었다.

“피가 나잖아.”

“칼이 무딥니다.”

“종이칼인 걸 보면 몰라? 무딘 게 당연하지!”

“이런 것으로는 못 죽입니다. 날카로운 걸로 하나 장만해야겠군요.”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됐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만다리스도 당분간 눈치를 볼 테니.”

페란스는 휙 몸을 돌려 책상을 향해 다가갔다. 서랍을 열고 종이칼을 내팽개치듯 안에 넣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들키기 싫은 모습을 들킨 기분이라 마르스티엘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게 어려웠다.

“몸은 어떠십니까?”

마르스티엘이 등 뒤로 다가왔다.

“……나쁘지 않아. 내 발로 걸을 만하다. 네 일은 어떻게 되고 있나?”

“그럼 안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두 팔이 제 몸을 감쌌다.

하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한숨이 뱃속을 파고들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그를 향해 기울어졌다.

옆목이 드러나자 마르스티엘은 등 뒤에서 페란스를 안은 채 맨살에 입술을 댔다.

“…….”

페란스는 질근 입술을 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야릇한 신음을 흘릴 것 같아서였다.

“일은 잘되고 있습니다.”

마르스티엘은 입술을 더 아래로 미끄러트리며 속삭였다.

각인 반응이 없는 키스는 미친 듯이 황홀했다. 발정기 때처럼 아래가 젖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마이카오의 후임을 찾았습니다. 전하께서 임명장에 서명만 해 주시면 됩니다.”

“벌써……? 아직 왕실 상인 길드장을 임명식으로 바꾼다는 얘기는 꺼내지 않았는…… 흣, 그러려면 섭정과 상의하는 시늉이라도…… 후우…… 해야 해.”

“생략하십시오.”

“뭐……?”

“섭정은 배제하십시오. 반발하더라도 방법은 없을 겁니다.”

“그게 가능……, ……아.”

가능했다. 이제는.

더는 개새끼의 페로몬에 휘둘릴 필요가 없었으니까.

제 셔츠의 목깃을 벌리는 마르스티엘을 향해 페란스가 고개를 틀었다.

“갑자기 네가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워졌어.”

마르스티엘은 작게 웃었다.

“그러십니까? 좋은 일이군요.”

“그래서 말인데,”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의 손을 잡아 손가락 사이에 입을 맞췄다.

“이 손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하군.”

“전하의 옷을 벗기던 중이었습니다.”

“그건 오늘 하자는 말인가?”

“아니요. 아직 다 아물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옷은 왜 벗기는데?”

“첫 번째 이유는,”

스르륵.

마르스티엘이 목을 감싼 스카프의 매듭을 풀었다. 거짓말처럼 쉽게 벗겨진 스카프가 하늘대며 어둠 속을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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