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56)화 (55/122)

56.

“왜 기억이 안 나는 거야…….”

페란스가 머리칼을 와락 움켜쥐었다.

머리가 깨지도록 기억을 헤집어 봐도 그 이상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심지어 콜더스트 가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위스타드에는 더 이상 콜더스트라는 이름의 귀족이 존재하지 않으니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만 짐작이 갈 뿐이었다.

아니, 고작 좋지 않은 일이 아닐 것이다. 끔찍한 일일 것이다.

-놈은 절대 네 것이 되지 않는다.

아만다리스는 그렇게 말했다.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다만 믿게 할 수 있는 증거가 없을 뿐이라고. 증거를 모으는 중이라고.

“…….”

생각에 매몰된 페란스는 머리칼을 놓고 손톱을 질겅질겅 씹어 댔다.

옌스 포르본은 근위대에 넘겼다. 경고한 대로 그는 마티바 탑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 마르스티엘이 아직 돌아올 기미가 없는 호텔 방은 조용했다. 조용하다 못해 고막이 터질 것처럼 고요했다.

벌써 몇 시간째 씹어 댄 손톱 끝이 나달거려 피가 맺혔다. 페란스는 지금 입 안에 감도는 이 짜고 비린 게 피라는 것도, 그래서 아프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지.”

일단 마르스티엘을 봐야 했다. 그래서 그에게 이름을…….

……물어보면. 무슨 대답을 들으려고.

아니, 물어볼 수나 있나?

“…….”

마르스티엘의 이름이 콜더스트가 맞다면.

위스타드의 귀족 가문 출신인 그가 타국의 노예가 됐다면 답은 추방밖에 없었다.

자신이 열여섯이었으니까 마르스티엘의 나이는 열셋. 아마도 어려서 처형이 아니라 추방령을 받았을 것이다.

다른 가족들이 처형당할 동안.

-절대 네 것이 될 수 없어. 놈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다.

아만다리스는 그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르스티엘은, 위스타드와 카벨리카를 증오하고 있을 것이라고.

“……빌어먹을!”

페란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방 안을 닥치는 대로 서성이기 시작하자 머리가 핑 돌았다. 시야가 온통 노란빛을 띠었다.

“너는 어째서……!”

마르스티엘에게는 정말 다른 목적이 있는 걸까. 그 목적은 혹시 복수인 걸까.

이 왕국을 거꾸러트릴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

순간 페란스의 얼굴이 하얗게 바랬다.

못 할 것도 없었다. 그에게는 군대가 있었으니까. 합법적으로 위스타드에 영구 주둔할 수 있는 군대가. 마르스티엘에게는 신분의 여부에 상관없이 누구라도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이, 아무 때나 궁에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이, 무제한의 재산을 신고조차 없이 위스타드에 반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 권한들로 위스타드의 기둥 같은 대귀족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중이었다.

“욱…… 우욱! 컥!”

페란스는 고개를 숙이고 구토를 했다. 신물이 값비싼 카페트를 더럽혔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각인 반응이 올 때면 늘 이랬고, 그럴 때마다 마르스티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더러워진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래……. 아니야…… 아닐 거야.”

그건 복수가 아니었다.

누구도 그런 다정함을 복수라 일컫지 않을 것이다. 마르스티엘은 자신을 사랑했다. 제 뒤틀린 페로몬조차 받아들일 정도였다. 그걸 애정이 아닌 다른 말로 부를 수는 없었다.

“아니, 아니……. 아니…….”

만일, 애정이 아니라면.

마르스티엘은 자신에게 하던 짓을 옌스 포르본에게도 했다. 자신이 파는 상품 중 하나처럼 값을 치르겠다는 자에게 거리낌 없이 내어주었다.

그 다정함 또한 거래의 일부였다면. 다정한 척 사랑을 연기하는 것으로 마르스티엘은 모든 무기를 손에 넣었다.

“……!”

페란스가 미친 사람처럼 침대로 달려갔다. 확인할 게 있었다.

이불을 홱 걷어 낸 그가 시트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하……. 하…… 아악!”

입에서 짐승 같은 비명이 터졌다.

시트에는 옅은 페로몬 향이 배어 있었다. 하나가 아닌 두 개가.

마르스티엘과 다른 오메가의 향이. 그가 아는 향이. 알레프의 향이.

“하, 흐…… 흐윽, 컥!”

울음이 터졌다. 신음도 터지고 구토도 터졌다.

심장이 터졌을 것이다.

페란스는 가슴께를 부여잡고 흐느꼈다.

-어쩌다 페로몬이 묻었나 봅니다. 알레프와 동침하지 않았다는 건 확실합니다. 제 이상형은 금발에 초록 눈입니다.

그 말은 거짓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마르스티엘의 침대에서 알레프의 페로몬 향이 나는 일은 없어야 했다.

“…….”

페란스는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일어섰다.

제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지만 일단은 움직여야 했다.

“그걸…… 알아야 해.”

아만다리스가 무얼, 얼마나 알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의 침실을 나섰다.

백지처럼 새하얘진 얼굴로 손톱이 망가져서 내려오는 페란스를 발견한 근위대와 호텔 지배인이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아아, 대체 무슨 일이……,”

페란스는 손을 들어 쏟아지는 말들을 막았다.

“궁으로 돌아간다.”

“……네, 전하.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서둘러.”

페란스가 탄 마차는 곧 궁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페란스가 향한 곳은 본궁이 아니었다.

마티바 탑이었다.

* * *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만다리스가 마르스티엘을 고문한 이유가.

처음에는 그를 고문사로 위장해 죽이려는 것인 줄 알았다. 마티바 지하의 고문실은 인간을 가장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런 식으로 자신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왕족의 일원이 될 자를 다짜고짜 고문대에 매달았다는 건 아만다리스도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입을 열게 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고문은 원래 그러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아만다리스가 마르스티엘을 고문하게 시켰던 고문실 간수에게서 얘기를 들어야 했다.

그그그긍…… 철컹!

지하의 격자창이 열렸다.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페란스는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고문실 경비들은 오늘은 죄수도 없는데 왜 또 전하께서 저렇게 유령 같은 안색을 하고 지하실에 납신 건지 이유를 몰라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간수를 데려와. 마르스티엘을 고문대에 묶은 그 인간을.”

“카누트를 찾으십니까?”

경비들이 눈을 끔벅대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카누트는 엊그제 시체가 되었습니다. 장례를 치른 게 오늘 새벽입니다, 전하.”

“……뭐, 라고? 왜 죽었는데?”

“그걸 저희도 통 모르겠습니다. 술에 취해 요 앞마당에 쓰러져 있던 것을 보면 갑자기 술독이 올라 그런 게 아닌가 싶었는데…….”

경비들이 송구하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지독한 우연이었다. 그리고 페란스는 너무 절묘한 건 우연이 아니라고 믿었다. 자신에게 열병이 생긴 그 밤, 하필 제 몸 상태를 살핀다며 침실로 온 알파가 아만다리스였다는 식의 우연 같은 건 믿지 않았다. 그건 그저 잘 짜 맞춘 계획이었다. 아만다리스는 제 열병이 그저 열병이 아니라 발현열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자…… 혼자였나?”

“예, 전하?”

질문을 이해 못 한 경비들이 눈을 끔벅댔다.

“아만다리스가 고문을 통해 뭔가를 물었을 것이다. 그게 뭔지 들은 귀는 죽었다는 자 말고 아무도 없나?”

“글쎄요, 그게 잘…….”

경비들이 고개를 갸웃대는 와중에 누군가 이렇게 말을 했다. 고문할 때 옆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근처에 뭘 가지러 가다가 어깨 너머로 흘려들었다고 했다.

“섭정께서는 그러고 곧장 돌아가셨던 터라…… 뭘 묻고 그러지도 않으셨습지요. 그냥 이름이 뭔지, 그런 뻔한 것을 하나 물으셨습니다.”

“…….”

그게 답이었다.

아만다리스가 알아야 했던 것은 마르스티엘의 이름이었다.

고문을 담당했던 간수가 죽었으므로 이제 답을 아는 건 아만다리스 혼자가 되었다.

결국 만나야 한다는 거로군.

페란스는 조소와 눈물이 동시에 터지려고 하는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이제껏 제 인생에서 가장 개같은 날은 발현하던 그날이라고 믿어 왔다.

하지만 틀렸다.

오늘이었다.

* * *

“전하. 다시 생각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는 아무래도 너무 위험한 일 같사옵니다.”

달이 뜨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키슬크는 재킷 위에 망토를 둘러 주면서도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만다리스 공의 요구는 말이 안 되는 것이옵니다. 어찌하여 전하께 단신으로 오시라 한단 말입니까. 독대를 하려면 마땅히 본인이 와야 하는 것을요.”

아만다리스는 사병으로 무장한 공작저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그만큼 겁을 먹었다는 말이기도 했고, 마르스티엘이 끌어들인 군대의 용도를 잘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군대라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은 자신이었다.

군대의 규모를 꼼꼼히 따져 봐야 했다. 마르스티엘이 저만한 무력으로 무얼 상대하려 하는지 캐물었어야 했다.

“내가 더 급하다는 뜻이겠지.”

페란스는 거울을 보며 입술을 질겅였다.

아만다리스를 찾아가는 일이 즐거울 리 없었다. 각인이 아직 깨지지 않았다는 것을 아만다리스가 알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은 아직도 약자였다.

그래도 도저히 확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있었다.

“……그대는 혹시 콜더스트라는 이름을 알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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