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66)화 (65/122)

66.

페란스가 로젠게인을 밀어냈다.

엉겁결에 페란스의 셔츠를 쥔 채 떠밀린 로젠게인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페란스의 셔츠를 길게 찢었다.

“아……? 전하께서 방금……,”

“내가 방금?”

“각인을 하면 편해진다고…… 부탁하셨는데.”

“미친……. 뭐?”

기가 찬 나머지 얼굴 근육이 멋대로 튀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너무 엉망진창이었다.

열세 살짜리한테 뭘 해?

“섭정께서 그리 말씀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섭정께 각인을 한 게 싫다고도 하셨어요. 각인을 되돌리고 싶다고 제게 새로운 각인을 부탁하셨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헛소리야!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네.”

무슨 이런 미친 꿈이 다 있어.

페란스가 눈가를 잔뜩 일그러트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페로몬이 울컥 울컥 쏟아져 나왔다. 견딜 만하다고는 했지만 페로몬 양은 훨씬 많았다. 어쩌면 제대로 견디고 있는 게 아닌 것인지도 몰랐다.

……뭐, 꿈이니까.

그래도 제 페로몬에 이렇게 노출이 되는 게 열세 살짜리한테 좋을 리 없다는 것은 본능이 알고 있었다.

아쉽지만 보내야 했다. 꿈이라고 해도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았다.

“전하, 화나셨어요? 제가 전하를 언짢게 만들어 드렸습니까?”

“……아니. 그렇지 않다. 이리 와.”

“네, 전하.”

로젠게인이 엉덩방아를 찧은 바닥에서 일어나 앞으로 다가왔다.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이 자신에게 종종 했듯이, 작고 동그란 뺨을 손으로 쥐었다.

“만나서 반가웠다, 로젠게인 알란드.”

“영광입니다, 전하.”

“네가 나로 인해 겪었던 모든 일에 진심으로 사과하겠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아만다리스를 죽여서라도 네게 닥칠 비극을 막았을 것이다.”

“……?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께서는 제게 잘못하신 게 없습니다.”

“부탁이니 그냥 들어줘. 그리고 나는……,”

시간을 되돌리면 무얼 어떻게 할 수 있을지 헤아려 보았다.

아만다리스를 처리하면 앞으로 발정기 때마다 고생이겠군.

적당한 알파를 골라서 혼인하는 게 나으려나. 그런데 그 알파가 너처럼 그 지저분한 꼴을 다 봐주려고 할까. 키스만 해도 물건이 시들 텐데.

“……역시 너밖에 없을 것 같아.”

페란스가 보드라운 뺨을 만지작대면서 웃었다.

“네가 성장하길 기다리겠다. 네가 성년이 되면 나는 네게 청혼할 것이다. 그리고 부디 네가 나를……,”

눈물이 울컥 차올라서 페란스가 입술을 씹었다.

“전하…….”

동그란 얼굴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는 이런 성격이었을 것이다. 선하고, 남을 걱정하고, 제 구두를 벗어 주고.

“……내가 너를 보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봐주기를 바라겠다. 부디…….”

페란스가 참지 못하고 로젠게인을 왈칵 끌어안았다.

“……나를 사랑해 줘.”

“전하,”

“듣기만 하라고 했다.”

“…….”

고맙게도 로젠게인이 입을 다물었다.

말을 잘 들어줘서 그게 퍽 귀여웠다.

그거 알아? 스물여섯이 된 너는 내 말을 더럽게도 안 들어준다는 것. 그랬다면 내가 그 미친 약을 털어먹을 일도 없었을 텐데.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죽어 가고 있었을 텐데.

그래서 이런 꿈을 꾸는 건가. 죽기 직전이니 뭐라도 하나 좋은 걸 간직하라고.

따지고 보면 달콤한 꿈이었다.

마르스티엘의 첫 각인 상대가 자신이 될 뻔했다. 마르스티엘은 계속 콜더스트가의 로젠게인 알란드로 살 테고 자신은 그에게 청혼할 것이다.

열세 살의 그는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듯했다. 성년이 되어서 그 호감이 애정으로 커진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다 기억했으면 이제 그만 가.”

“하지만 전하께서는 지금 아프시잖아요.”

“괜찮아질 거야. 네가 계속 여기 있으면 네 몸도 아파질지 몰라.”

“저는 괜찮습니다. 무섭지 않아요.”

“내가 무서워.”

“……어째서 그렇습니까?”

“네가 아플까 봐. 그건 내게 너무 무서운 일이다.”

“…….”

로젠게인도 팔을 뻗어 페란스를 안았다.

“그건 전하께서 저를 많이 아끼신다는 말로 들립니다.”

“맞아.”

너도 그랬을 것이다.

네 가문이 무사했다면. 네가 나를 미워할 일이 없었다면.

“그럼 저도 전하를 많이 아껴 드리겠습니다. 제가 더 많이 아낄게요, 전하.”

그것 봐.

“부디.”

페란스가 동그란 머리통에 얼굴을 대고 숨을 들이쉬었다.

로젠게인에게서는 희미하게 마르스티엘의 페로몬 향이 났다.

……정말로 좋은 꿈인데.

다만 마르스티엘을 보지 못하는 건 서운했다. 조금 욕심을 내어 그가 나오는 꿈도 보여 주었으면 했다.

“이제 가.”

“……네, 전하. 하지만 또 오겠습니다.”

“괜찮아. 오지 않아도 돼.”

“하지만…….”

“진심이다. 오지 마.”

페란스가 로젠게인을 제 몸에서 떼어 내고 손을 흔들었다.

……안녕.

“만나서 반가웠다. 좋은 기억을 남겨 준 것에 감사한다.”

“……저 역시 감사드립니다, 전하.”

로젠게인이 한 손을 가슴에 대고 허리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눈동자에 박힌 별이 더 많아진 것 같았다.

“전하께서 제게 청혼하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 꿈이 그렇게까지 길게 갈 수 있을까.

제 생은 얼마나 남아 있는 걸까.

알 수가 없기에 페란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열세 살의 마르스티엘이 방을 떠났다.

방문을 닫기 전까지 몇 번씩이나 뒤를 돌아 저를 살피는 얼굴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만큼 사랑스러웠다.

* * *

“……빌어먹을.”

아니, 괜찮지 않았다.

꿈은 더럽게도 길었다. 꿈 주제에 고통은 빌어먹게 생생했다.

“하……, 진짜 꿈에서도…….”

징징 울어 대는 성기를 손에 쥐면서 페란스가 이를 갈았다.

하지만 발정기 고통보다 더 끔찍한 게 있었다.

이쯤 되자 이게 과연 정말 꿈이 맞을까 하는 의심이었다.

꿈이 아니라면 대체 뭔데. 이렇게 괴상한 일이 꿈이 아닌 어디에서 있을 수 있다고.

성기를 아무리 힘껏 자극해도 발정기 욕구를 식히기에는 터무니없었다. 몇 번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성기는 묽은 정액을 주르륵 뱉어 냈다.

“……?”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기가 너무 깨끗했다. 말 그대로 새하얬다. 음모가 한 올도 없었다.

원래…… 이랬나?

자신이 기억하는 음모는 머리카락처럼 밝은 금발이었다. 음모 쪽이 색이 더 연해서 거의 레몬 빛이었다. 굵고 억센 게 아니라 고슬고슬한 음모는 굉장히 얇고 부드러웠다. 음모 자체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없다고 할 정도도 아니었다.

“지금은 하나도……,”

음모 말고도 이상한 게 또 있었다.

“왜…….”

손목이 너무 가늘었다. 좀 전에도 손가락이 평소보다 가늘게 보여 이상했는데 손목도 마찬가지였다. 페란스가 더워진 숨을 쌔액 몰아쉬며 소매를 끌어 올렸다. 팔뚝도 손목처럼 가늘었다. 희다 못해 창백한 피부 아래 푸른 핏줄이 한두 가닥 비쳤다.

“설마……,”

페란스가 다급히 제 머리칼을 만져 보았다. 손가락 새에 정액이 묻어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머리는 턱 아래까지 내려왔다.

“…….”

열여섯, 우울에 짓눌려 살았을 때 지금과 같았다. 몸은 비쩍 말라 있었고 손을 대지 않는 머리는 제멋대로 길었다. 해를 전혀 보지 않고 지낸 피부는 금방 녹아내릴 눈처럼 창백했다.

“꿈이……,”

꿈이 아닌 걸까.

꿈인데 지나치게 생생하고 자세한 것뿐일까.

“……!”

페란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이제야 저 음산한 박제들이 과시하듯 벽에 주렁주렁 걸려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곳이 사냥용 오두막이라서였다.

-이틀 뒤 남작의 아들이 너를 발견했다. 사냥용 오두막에서.

“자, 잠깐……. 그렇다면,”

페란스가 마른 몸을 휘청였다.

너무 놀란 나머지 열이 다 식는 기분이었다.

“내가 대체 어디서 어떻게……. 여, 여기는 지금……,”

페란스가 몸을 구부리고 필사적으로 생각을 더듬었다.

“나는 분명히…….”

마르스티엘이 말했다. 죽지 말라고. 계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죽지 않는다면 계약을 이행하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혹시라도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렇다면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하지만 끝내 하지 못했다.

“……죽었으니까.”

그가 보이지 않아서 만지기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할 수가 없었다.

그 전에 죽었으니까.

“그, 그럼……. 그럼 여기는…….”

천국인 걸까. 사람이 죽고 난 뒤 찾아온 곳이었으니.

“……아니야.”

천국이라면 마르스티엘이 여기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죽지 않았다.

“…….”

결론은 하나였다.

그 시간으로 돌아왔다.

죽기 직전 간절히 소원하던 대로.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십삼 년 전으로.

“하…….”

페란스가 입을 벌렸다. 입에서 말을 대신해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돌아왔다.

콜더스트가가 건재하는 시간으로.

아만다리스가 아직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은 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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