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85)화 (84/122)

85.

“나는……. ……그래.”

페란스가 억지로 한숨을 삼키며 로젠게인의 손을 잡았다. 미친 속도로 뼈가 자라느라 마디가 불거져 나온 손가락을 조심스레 만지작거렸다.

“괜찮을 거야……. 블루와렌의 폭풍이 떠난 자의 슬픔을 가져가 줄 것이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것들을 접하는 새로운 날들이 이어지면 상실감도 좀 더 빠르게 삭지 않을까.

말을 잃은 로젠게인을 보고 있노라면 숨이 막혔다. 남작 부부의 죽음도 무거운데 결국 제 손으로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로젠게인이 입 속으로 삼킨 말 중에 혹시라도 저를 향한 원망이 있지나 않은지 확인하고 싶어질 때마다 제 뺨을 후려쳐야 했다.

걱정과 미련을 이유로 그를 묶어 두는 건 옳지 않았다.

지금은 보내는 게 맞았다. 안전을 위해서도, 애도를 위해서도 제 곁에서 떨어져 있어야 했다.

“괜찮을 거야. 정말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페란스가 충동적으로 고개를 들어 로젠게인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편지를…… 잊지 마.”

네가 한 약속을 잊지 마.

성년이 되면 돌아와서 내가 보고 싶었다고 말해 줘야 해.

“전하께서 먼저 쓰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알고 있어.”

페란스가 입술을 떼자 이번에는 로젠게인이 같은 행동을 했다.

“떠나기 전에 하나 더 약속을 받고 싶습니다.”

“뭔……데?”

입술의 감촉이 페란스를 약간 당황하게 만들었다. 미세하게 뺨을 붉힌 채 페란스가 로젠게인을 살짝 밀어냈다.

“다른 알파는 가까이하지 말아 주십시오.”

“무슨…… 소리야, 그게. 그건…… 너무 당연하잖아.”

“네. 당연한 일이니까 당연히 약속을 받고 싶습니다.”

“크음.”

갑자기 메넌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로젠게인이 메넌을 힐긋 쳐다보았지만 페란스는 두 사람이 그러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뭐, 그렇다면. 약속하겠다.”

“저도 다른 오메가를 가까이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다른 오메가라는 말에 알레프가 불쑥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다른 오메가를 마음에 두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만약 그 상대가 알레프라면 자신에게는 두 사람을 갈라놓을 어떠한 자격도 없으리라는 자조가 밀려왔다.

나는 결국 네 부모를 지키지 못했으니까.

시간을 거슬러 왔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개새끼에게 각인한 상태였고, 로젠게인은 부모를 잃었다. 유일한 위안은 그가 자신에게 각인하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뭔가를 바꿀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게 가장 무서웠다. 다시 얻은 생을 아무런 의미도 없이 반복하게 될까 봐.

“잊지 마.”

페란스는 두려움을 잊기 위해 로젠게인을 힘껏 끌어안았다.

“내가 여기 있는 건 너를 위해서야.”

그건 사실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바꿀 수 없어도 바꿀 것이다. 그러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왔을 테니까.

“그러니 너는 다쳐서도 안 되고 상처 입어서도 안 돼. 그건 모두 나의 책임이다. 그러니 부디…… 무사히 돌아와.”

끌어안기는 순간 잠시 어깨를 움찔하던 로젠게인이 한숨처럼 작은 말을 내뱉었다.

“저도 언젠가 같은 말을 드릴 겁니다. ……성년이 되고 나면.”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하는 말이 달았다. 달아서 무서웠다. 마르스티엘이라면 결코 저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대하지.”

페란스는 환통처럼 머릿속을 파고드는 알레프의 오메가 향을 애써 지우며 답했다.

로젠게인은 이틀 뒤 블루와렌으로 떠났다.

페란스는 그가 떠나기 전 약혼자의 자격으로 언제라도 궁에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먼 이국에서 지낼 그가 자신이 있는 곳을 마침내 돌아올 곳으로 여기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 * *

처음 일 년은 기대하던 대로였다.

편지를 보내면, 편지가 왔다. 두 사람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내용은 대부분 비슷했다. 페란스는 집착이다 싶을 정도로 안부를 물어 댔고, 로젠게인은 블루와렌에서 보고 들은 일을 적어 보냈다.

둘 다 그립다는 말 같은 것은 잘하지 못하는 성격들이었다. 페란스는 제 감정을 앞세우면 혹시라도 그가 향수병을 앓거나 서둘러 돌아오고 싶어 할까 봐 말을 아꼈고, 로젠게인은 페란스가 자신을 아이 취급 할까 봐 기를 쓰고 점잖은 척을 했다.

가끔 보낼 수 없는 편지들이 쌓이기도 했다.

특히나 힘든 건 아직도 남작 부부의 복수를 하지 못했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남작 부부의 무덤에 새로운 꽃을 심었다는 것도, 그런 일조차 자신이 할 자격이 있는지 알 수가 없어 한참을 망설였다는 것도 말하지 못했다. 보내지 못한 편지들은 고스란히 페란스의 책상 서랍에 쌓였다.

문제는 일 년이 지난 뒤부터였다.

발현하고 일 년 뒤, 페란스는 첫 발정기를 맞았다.

“……빌어먹을.”

억제제로 인해 정신이 산란했다.

이미 경험해 본 바가 있으니 괜찮으리라 여겼는데, 유감스럽게도 제 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일 년 전 메넌이 지적한 대로 그의 몸은 너무 약했다. 일 년이나 지나도 몸 상태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말라 있었고, 통 살이 붙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제 탓에 키슬크도 통통했던 볼살이 덩달아 빠지는 중이었다.

“아, 음……. ……얼마나 됐지?”

“네 시간을 혼절해 계셨습니다.”

“네 시간……. 시간 참 더럽게도 안 가네.”

페란스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이불을 몸에서 치웠다. 키슬크가 재빨리 다가와 이불을 마저 걷고 몸을 부축해 주었다.

“내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아?”

키슬크가 베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몸이 이렇게나 젖었을 때는 신경이 쓰였다.

“땀내가 조금 나고 있습니다, 전하.”

“땀…… 아, 그렇지. 썩은 냄새 같은 건 안 나나?”

“그런 건 모르겠사옵니다.”

“그럼 다행인데……. 말한 대로 알파나 베타는 근처에 얼씬대지 못하게 했지?”

“물론이옵니다, 전하.”

키슬크는 현재 궁 안에서 각인 사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게 믿지 못할 정도로 위안이 되었다. 벌써 일 년째 아만다리스는 단독으로 페란스를 마주하지 못했다.

해가 떨어지면 키슬크는 무슨 수를 써서든 그를 돌려보냈고, 단둘이 있게 된 상황이면 어떤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꼭 방문을 두드렸다.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게 맞고?”

“걱정 마시옵소서, 전하. 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있사옵니다.”

“하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페란스가 저도 모르게 중얼대자 키슬크가 확 얼굴을 붉혔다.

“그…… 여, 영광이옵니다, 전하.”

페란스는 기운 없는 몸을 침대 머리맡에 기댔다. 양손을 꼼지락대고 있던 키슬크가 화들짝 놀라 등 뒤에 쿠션을 대 주었다.

“시장하진 않으십니까, 전하?”

“전혀. 지금 뭘 먹으면 고스란히 토할 뿐이야.”

고개를 젓는데 땀방울이 흩날렸다. 페란스가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손목에는 묶였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끈이 풀려 있었네.”

“혼절하신 뒤 제가 풀어 두었습니다, 전하. 너무 불편해 보이셨사옵니다.”

“그래도 별일이 없었다니 다행이네. 억제제가 잘 듣고 있는 건가.”

이제 발정기가 오면 미쳐서 제 발로 개새끼를 찾아가는 일은 없을 모양이었다.

억제제는 발정기의 욕구를 가라앉히는 대신 몸을 망쳐 놓았지만, 그래도 효과는 만족스러웠다. 단 하나 걱정스러운 것은 중독이었는데 그건 일단 나중 일이었다.

“전하. 이제 주기가 다 끝난 것이옵니까?”

키슬크가 땀에 흠뻑 젖은 채 계속 몸을 떠는 페란스를 안쓰럽게 바라보다 물었다.

“음……. 곧. 아직은 아니고. 하룻밤 정도는 더 있어야 될 것 같아.”

“주기가 상당히 긴 것이었군요.”

“이틀이면 짧은 거야. 성년이 되면 더 길어져. 기억 안 나? 내가 말도 없이 궁을 나가 레시토 호텔에서 묵었을 때. 네가……,”

옛날 일을 끄집어내던 페란스가 중간에 입을 다물었다.

키슬크가 눈이 빠질 것처럼 크게 뜨고 물었다.

“네, 전하? 호텔에서 묵으셨다고요? 대체 언제 말입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야. 억제제 때문에 머리가 좀…… 제대로 안 굴러가는 것 같아.”

옛날 일이 아니라 십이 년 뒤에나 벌어질 일이었다. 과연 똑같은 일이 벌어질지, 아닐지도 몰랐다.

확실히 억제제의 아편 성분이 사람을 느슨하게 풀어헤치는 모양이었다.

“전하. 신의 노파심일지도 모르겠사오나 호텔을 찾으시는 그런 일은…… 절대, 절대 하지 마시옵소서.”

“알았어.”

페란스가 싱거운 웃음으로 실수를 얼버무렸다.

“행여나 호텔에서 자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 전에 네 허락을 받도록 하지.”

“가능하다면 그런 일이 없길 바라겠사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미리 물어보겠다는 말에 키슬크는 은근히 기쁜 눈치였다.

“전하.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목욕물이라도 데울까요?”

“아니. 지금은 씻을 기운도 없어. 그냥 이대로 있겠다.”

“그러시면 제가 몸을 좀 닦아 드리겠나이다.”

“아니……. 그것도 됐어. 어차피 오늘 자고 나면 내일은 끝나 있을 테니. 내가 하면 돼.”

“그래도…….”

키슬크야 어린 시절부터 못 볼 꼴을 전부 보고 지내 왔다지만 그래도 발정기 때 흠뻑 젖은 아랫도리까지 맡기고 싶진 않았다.

“물병이나 준비해 줘. ……아, 너무 가까이에는 두지 말고. 내가 깨트릴 수도 있으니까.”

“예, 전하.”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물리려던 키슬크가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침대 반대편 탁자에 올려 둔 은쟁반을 가리켰다.

“전하. 블루와렌에서 편지가 왔사옵니다. 어찌할까요? 지금 보시겠습니까?”

페란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블루와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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