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86)화 (85/122)

86.

“그런 걸 왜 이제 말해! 뭣 하고 있나? 당장 가져와!”

“네, 전하.”

블루와렌이라는 말에 페란스의 표정이 달라졌다. 키슬크가 힘드신 와중에 퍽 다행이라 생각하며 편지를 올려놓은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급한 마음에 편지를 잡아 인장을 뜯으려던 페란스는 몇 번 헛손질을 한 끝에 편지를 도로 키슬크에게 내밀었다.

“젠장……. 네가 해 줘.”

“네, 전하.”

키슬크가 조심스레 인장을 뜯고 안에 든 편지를 꺼내 페란스에게 건네주었다. 인장은 콜더스트 가문의 것이 아닌, 블루와렌의 표식만 있었다. 로젠게인의 행방을 감추기 위해 편지는 메넌을 통해서만 주고받는 중이었다.

“……. 아니잖아.”

편지를 펼쳐 든 페란스가 첫 줄을 읽자마자 손을 내렸다.

“뭐가 아니라는 말씀이옵니까, 전하?”

“마르스티엘이 아니야.”

“네?”

“아니, 그러니까 로젠이 아니라고.”

아편 때문에 계속 말실수가 나왔다.

페란스가 편지를 쥔 채 키슬크에게 그만 나가 보라는 턱짓을 했다.

“이번에는 손을 묶지 않아도 되겠사옵니까, 전하.”

“내가 할 수 있어. 밤이 늦었는데 가서 쉬어.”

“……언제라도 종을 쳐서 부르십시오, 전하.”

키슬크는 페란스가 잠이 들 때까지는 자신도 잘 수 없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서 했다.

키슬크가 떠난 뒤 페란스는 로젠게인이 보내지 않아 실망스러운 편지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마저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페란스 전하.

그렇게 시작하는 편지는 메넌이 쓴 것이었다.

마르스티엘이 쓴 편지가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은 마르스티엘이 쓴 편지인 셈이었다.

-……래서, 새로운 약제사를 고용했습니다. 자신을 약제사가 아니라 연금술사라고 하는 면은 수상쩍지만 실력은 발군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위스타드를 떠난 뒤로 메넌과의 연락 수단도 편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메넌은 일 년 사이 왕실 길드를 무사히 제 손 안에 넣고 지금은 위스타드의 소금 사업을 독점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아만다리스는 왕실 길드의 사정을 전혀 몰랐다. 그가 마이카오 백작을 왕실 길드장으로 들어앉히고 돈을 긁어 가기 시작한 게 지금부터 오 년 뒤의 일이었다. 페란스가 아만다리스의 뒤통수를 속 시원히 후려갈겼지만 정작 아만다리스는 자신이 얻어맞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건 꽤나 통쾌한 일이었다.

소금 사업은 이제 시작이었다. 메넌과 맺은 밀약에 의해 그가 위스타드에서 독점하는 사업은 카벨리카 왕실에 이익금의 일부를 공납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대로 놔두었으면 전부 아만다리스의 배를 불려 줬을 돈이 고스란히 제 주머니로 들어왔다. 페란스는 그 돈으로 일 년 안에 왕실 정규군을 만들 생각이었다.

-조만간 새 억제제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좋은 소식이로군.”

페란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 그때 코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하필.”

고개를 뒤로 숙이면 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기분이 드는 게 싫었다. 페란스가 고개를 앞으로 숙인 채 소맷자락으로 코를 막았다.

생각보다 많은 양의 피가 쿨럭 쏟아져 소매를 전부 적셨다.

“하, 제기랄.”

코피가 적신 건 잠옷만이 아니었다. 다 읽지 못한 편지 뒷부분도 적셨다. 황급히 편지지 위에 묻은 피를 닦아 보았지만 글씨의 대부분을 읽을 수가 없었다.

“미치겠네.”

억제제 다음에 뭔가 다른 얘기를 덧붙인 것 같았는데 유감스럽게도 외람되오나, 전하로 시작되는 뒷부분은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몸 같으니.”

짜증을 내 봤자 늦었다. 페란스는 편지를 내려놓고 비틀대는 몸을 일으켰다. 코피로 축축하게 젖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이었다.

끼익.

그때 제 귀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더 이상 들려서는 안 될, 그런 소리를.

“……?”

페란스가 사실과 이어지는 침실 문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개새끼가 예고도 없이 침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때가 늘 이 시간대였다.

“……!”

침실에는 무기가 될 만한 게 없었다. 페란스는 키슬크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 놔두고 간 물병을 향해 발을 움직였다.

끼이익…… 탁!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고 물병을 쥐는 순간 침실 문이 열렸다.

“개 버릇 어디 안 간다더니…….”

개새끼였다.

아만다리스의 얼굴을 확인한 페란스가 인상을 구기며 물병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아만다리스가 페로몬을 풀었다.

“하, 제길……. 하는 짓 하고는…….”

……챙그랑!

다리 힘이 풀리며 비틀대던 페란스가 물병을 놓쳤다. 바닥에 떨어진 물병이 산산조각 났다.

“이제야 발정기가 오다니. 너무 늦지 않았느냐.”

저벅저벅.

아만다리스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한참을 기다렸다.”

“그건…… 미친, 그간 얌전히 있었던 게…… 포기가 아니었,”

아만다리스가 입술을 말아 올려 소리 없이 웃었다. 소름이 돋았다.

“네 몸을 어찌 잊겠느냐. 내 생전 그렇게 예쁜 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개…….”

대체 어떻게 알고 왔을까.

발정기가 왔다는 건 어지간한 자들에게는 입단속을 해 두었을 텐데.

키슬크가 그간 아만다리스가 심어 놓은 궁인들을 골라내느라 무던히도 애를 써 왔음을 알았다. 그런데도 아직 개새끼가 매단 꼬리들이 지겹도록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지긋지긋했지만 아만다리스가 일 년씩이나 제 발정기가 오길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가장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제 말을 고분고분 따르도록 만들지, 생각을 곱씹고 곱씹어서 이런 개짓거리를 계획했을 것이다.

페란스가 부들부들 떨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탁자 다리를 쥐고 숨을 참는 그의 곁으로 다가온 아만다리스가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었다.

“몹시 고통스러웠겠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내가 왔으니.”

뭉클, 페로몬이 번져 왔다. 몸을 상하게 하면서 먹은 억제제는 개새끼의 페로몬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어지는 듯했다.

……아직. 아직 참을 만해.

페란스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아만다리스는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의 눈에 자신은 일 년 전 발현을 마친 열일곱짜리일 뿐이었다. 몸이 여위었으니 더 우습게 보고 있을 것이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라고.

“발정기가…… 이런 건 줄…… 모, 몰랐……,”

페란스가 일부러 약한 신음을 흘렸다. 아만다리스가 방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저런. 그때는 내가 곁에 있었으니 괴로움을 몰랐던 게다. 지금이라도 알면 됐다.”

목덜미를 쓰다듬는 손짓이 점점 노골적이 되어 갔다. 페란스는 그 손을 잡아 손가락을 이로 물어 잘라 내는 상상을 하며 버텼다.

“하아, 하…… 하, 하지 마……. 네가 이럴 수는…… 나는 약혼한 몸으로, 다른 알파와는……,”

“누굴 다른 알파라 하는 게냐.”

아만다리스가 페란스를 와락 당겨 안았다. 축축한 입술이 뒷목에 와 닿았다.

“내가 아닌 다른 것들을 그렇게 불러야 해! 네가 약혼자라 하는 열세 살짜리가 감히 네 몸에 손을 대선 안 되는 다른 알파다.”

“아니…… 내가 살렸…… 네가 죽이려던…… 내가 살렸……,”

“그래, 네가 그랬지.”

아만다리스가 페란스의 뒷목을 빨아들였다. 페란스가 들키지 않게 바닥을 더듬으며 몸을 미약하게 비틀었다.

“이젠 발정기가 됐으니 알았겠지. 네 몸은 내가 없이는 안 된다는 걸.”

“아니…… 안…… 흐읏, 약혼…… 되돌릴 수는 없……,”

“천만에.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다. 증인도 없이 애들 장난처럼 치렀던 약혼식이 무슨 대수라고.”

“아니, 아니……야.”

“무슨 소리. 섭정인 내가 증인이 되지 않았으니 네가 무슨 짓을 했든 간에 그것은 무효다. 너도 알고 있지 않았느냐?”

페란스의 뒷목에 코를 박은 아만다리스가 스읍,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하아, 네 향……. 이렇게나 야한 냄새가 나다니.”

……변태 새끼, 진짜. 지금 내 나이가 열일곱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 지랄이네.

“너는 내 것이다, 페란스. 너와 나는 떨어질 수 없어. 네 몸을 가진 게 누군지 알고 있지 않느냐.”

조금만. 조금만 더…….

“그래서 놈을 죽이지 않고 놔둔 것이다. 네가 약혼을 하든 말든, 무슨 짓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닫게 하기 위해.”

“뭐……?”

바닥을 더듬던 손이 멈칫했다.

아만다리스가 방금 한 얘기는 분명히 그 마차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나올 게 나왔군.

벌써 일 년 전 일이었다. 왕실 근위대는 사고가 아니었다는 그 어떤 증거도 가져오지 않았고, 아만다리스는 그사이 페란스가 의혹을 잃었다고 여겼을 것이다. 일 년이나 지났으니 지금은 스스로 떠벌려도 되겠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페란스는 있는 힘을 다해 분노를 감추었다.

“놈이 있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지. 내가 너를 갖기 위해서는 연막이 필요할 테니.”

“그게 무슨……,”

“너도 열세 살짜리가 알파 노릇을 제대로 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게 아니냐. 네 알파는 나고, 어린놈이 숨이 붙어 있는 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겠지.”

아만다리스가 못 봐줄 정도로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페란스의 고개를 돌려 입술을 겹쳤다.

입술을 물어뜯고 싶은 것을 참느라 이를 악물어야 했다.

“대답, 해. 그럼 그 사고는…… 사고가 아니었다는…… 말이야?”

코앞에서 보이는 아만다리스의 눈이 꿈을 꾸듯 몽롱해졌다.

“사고라니. 행운이지. 아니, 운명이라 해야겠군. 너와 나를 맺어 주기 위한 운명. 부모가 알아서 죽었으니 어린놈을 어디에 처박아 두든 신경 쓸 인간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제대로…… 말을 해. 사고, 였다는 거야?”

“저런. 사고라고 하면 안 되는 건가? 내가 손을 썼다고 해야 믿겠느냐?”

아만다리스가 몽롱한 눈으로 웃음을 터트리며 페란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래서 내게 콜더스트가의 행방을 알려 주었구나. 편지를 써서.”

“그 편지…… 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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