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스파르타쿠스의 작전을 한 마디로 말하면····.
후퇴.
그래 후퇴였다.
바리니우스 군과의 싸움은 언젠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정면으로 충돌해서 이긴다는 보장도 없는 지금 이판사판 식으로 싸울 수는 없었다.
반란을 일으키고 쭉 승승장구하던 스파르타쿠스였지만 그는 정규전과 게릴라전의 차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아직은 로마의 정규군과 정면 충돌이 어렵다고 생각한 스파르타쿠스는 아군을 데리고 후퇴를 감행하려고 했다.
전투에 있어서 전략적 후퇴는 훌륭한 한수이기도 했다.
똑바로 해 내기만 한다면 말이다.
스파르타쿠스의 병사들은 밤 9시와 12시 사이에 몰래몰래 진지를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서 입구의 경비병은 시체에 말뚝을 받쳐서 만든 것으로 세워두고 옷까지 입혔다.
몰래 야음을 타서 후퇴하기로 한 스파르타쿠스의 작전은 바리니우스의 뒤통수를 제대로 때렸다.
바리니우스가 이상함을 느끼고 나서 정찰을 보냈을 때는 이미 날이 밝은 후였다.
스파르타쿠스의 군세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큰일이다.”
바리니우스는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 들였다.
포위망에 가두고 있던 적이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은 이제 사냥감과 사냥꾼의 위치가 역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역사에 크게 이름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바리니우스는 그래도 제법 유능한 인물이었다.
아주 뛰어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직위에 맞게 자신의 역할 정도는 무난하게 수행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즉시 부하들을 움직여서 기민하게 움직였다.
충원을 받아서 군사를 더 보충하기 위해서 본진을 수비형태로 바꾸고 위치를 옮겼다.
베수비우스 산에서 북쪽으로 40km정도 떨어진 장소에 있는 오래된 그리스의 도시인 쿠마이에 자리를 잡은 그는 거기에 둥치를 틀고 부하들을 이용해서 스파르타쿠스의 군세를 찾기 위해서 정찰을 시작했다.
그때 스파르타쿠스의 군대는 바리니우스의 포위망을 벗어나자 그를 직접 공격하지 않고 그 부근인 캄파니아 일대를 공격하고 유린했다.
캄파니아의 평야 남부, 아펜니노 산맥과 아말피 반도의 여러 산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비옥한 농장지대를 공격해서 파괴했다.
동시다발적으로 로마의 밥그릇을 와장창 깨고 다니는 스파르타쿠스의 행동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방어태세를 굳건하게 갖추고 있는 바리니우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시위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리니우스는 이런 스파르타쿠스의 행동을 알고 틀어 박혀서 박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스파르타쿠스를 얕보지 않았다.
오히려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스파르타쿠스를 잡아두지 않으면···, 우리 공화국에 정녕 큰 재앙이 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원로원에 만 단위의 지원군을 신청했다.
그렇게 군세가 모아지면 그때 일망타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원로원에서 온 답장은 원군을 보내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루빨리 스파르타쿠스를 토벌하라는 말이었다.
당시 원로원에는 더 이상 병사를 보내줄 여력도 없었고, 무엇보다 노예 반란군을 상대로 소극적인 대응을 보이고 있는 바리니우스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이 많았다.
어쩔 수 없이 바리니우스는 자신의 병력만을 가지고 스파르타쿠스를 상대하기 위해서 나섰다.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더 이상 수비에 주력해도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페이스대로 진행하지 못한 전쟁은 그에게 무리수를 두게 했고, 그는 스파르타쿠스에게 철저하게 농락 당했다.
스파르타쿠스는 바리니우스가 틀어 밖혀 있는 동안 앞으로의 전쟁터가 될 곳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거기로 로마군을 끌어 들여서 패배시켰다.
함정, 덧, 기습.
중무기로 무장한 로마의 군단을 이기기 위해서 스파르타쿠스는 가능한 수단을 무엇도 가리지 않았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게 맞았고 그는 거기에 어울리는 결과를 냈다.
바리니우스는 모든 병력을 말아 먹었고, 그 본인도 처절한 굴육을 맞 봐야 했다.
“사령관님!! 도망가셔야 합니다.”
“크윽···.. 대 로마의 프라이토르가 노예들을 상대로 등을 보여야 하다니····.”
“사령관님!!!”
“알고 있다.”
바리니우스는 산속의 난전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갔고 끈질긴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서 말을 버리고 산야를 걸어서 도망쳐야 했다.
이 당시의 로마인들 기준으로 봤을 때 개쪽도 그런 개쪽이 없었을 것이다.
“형제들이여 외쳐라!! 우리들의 승리다!!!”
“우오오오오!!!!!”
도망치는 바리니우스의 등 뒤로는 스파르타쿠스의 함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었다.
결국 바리니우스 마저 스파르타쿠스에게 큰 패배를 당한 로마의 원로원은 다시 한 번 대책회의를 열었다.
사실 얼마 전에만 해도 대책 회의를 열었었지만 그때하고는 사뭇 심각함이 달랐다.
그때는 아직 스파르타쿠스의 반란도 본격화 되지 않았고 시칠리아의 4분의 1이 빼앗겨 버린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했었다.
그때는 결국 자신들 파벌의 세력을 늘리기 위해서 서로서로 반대를 위해서 반대만을 하는 그런 정쟁일 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로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의 프라이토르 세 명을 무찔렀고, 그 군세는 3만을 넘어서고 있었다.
시칠리아의 진은 곡창지대를 비롯해서 철벽의 요새도시를 두 개나 손에 넣고 아애 세력을 만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로마 원로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 둘은 아마도 공화국 안에 파고든 맹독으로 보였을 것이다.
덕분에 회의는 한층 가열차고 한층 더····.
“말 다시 해봐!! 이 개새끼야!!!”
“뭐라고 했느냐? 이 애송아!!”
“죽여 버리는 수가 있다!!”
개판이었다.
그렇다.
로마인들 중에서 자칭 최고 권력자이며 최고 품위있는 상류층들인 원로원의 회의장은 개판이 되어 있었다.
사실 시대와 문명을 막론하고 정치 논쟁이라는 것은 그냥 내버려두면 이런식으로 흘러가게 된다.
정치는 말로 풀어야 하는 것인데 그 말이 서로서로 안통하고 고집을 부리면 정치가들은 서서히 주변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고 미쳐가는 법이다.
흔한 예로 대한민국 국회에서도 가끔씩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마 정치가라는 자들의 고질병? 혹은 직업병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원로원들은 지금 또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싸우고 있었다.
스파르타쿠스가 먼저냐? 아니면 시칠리아의 진이 먼저냐? 하는 문제로 다투고 있었다.
당시 원로원에서 일으킬 수 있는 군대의 숫자는 어찌어찌 긁어모으면 8만 정도였다.
지중해 최강국의 국가의 군사력 치고는 좀 빈약한 감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끄응····. 에스파냐와 소아시아의 일만 아니면···. 그렇다면 그깟 노예들 쯤은···.”
“말해서 무엇 하겠소. 그쪽의 병력을 비우는 것은 절대로 해선 안 될 일이오.”
“그건 나도 알고 있소.”
스파르타쿠스와 진 둘 중에 무엇을 먼저 토벌해야 하는냐에 관해서는 서로 물어뜯을 듯이 싸우던 원로원들도 지중해 동서 양쪽의 전선에 관해서는 의견을 일치하고 있었다.
절대로 거기서 병력을 뺄 수는 없다.
그만큼 그 전쟁들은 중요한 전쟁들이었던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당시 로마는 커다란 전선을 두 개나 유지하고 있었는데 두 전쟁 모두 절대로 패배해서는 안 될 전쟁들이었다.
이 두 가지 전쟁에 관해서 좀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우선 동쪽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폰투스 왕국와의 전쟁.
후일 3차까지 발발한 미트다리테스 전쟁이라고도 한다.
당시 폰투스에 나타난 걸물인 미트리다테스 대왕이라는 인물을 상대로 벌어진 전쟁이었기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원래의 역사에서는 로마라는 거대한 장벽을 넘지 못해서 그리 유명하지는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볼 때 아마 그는 한니발 이후로 로마를 가장 위협했던 인물로 원로원들의 경계대상 1호였을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어머니에게서 왕권을 빼앗고 자신의 권력에 방해되는 형제들까지 피의 숙청을 서슴없이 자행할 정도로 냉혹한 자였다.
그 후에 왕위에 오른 그는 흑해 연안에서 세력을 확대해서 크리미아와 콜키스를 합병하고 파를로고니아와 갈라티아를 정복하기도 했다.
로마의 입장에서는 자잘한 돌맹이만 가득했던 동쪽의 국경 지대에 걸리적거리는 바위가 생기기 시작하자 아마 퍽 거슬렸을 것이다.
결국 로마는 바위를 치우기로 마음 먹었다.
기원전 92년에 로마는 바티니아의 국왕 니코메데스 4세와의 동맹을 구실로 소아시아의 전쟁에 개입했다.
이 시기만 해도 로마는 그저 어린 싹이 더 커지기 전에 짓밟아야 한다.
라는 생각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미트리다테스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헬레니즘의 보호자로 자처하며 이 전쟁을 로마와 그리스인들 간의 전쟁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인들을 대거 선동해서 아르메니아 왕국의 동맹 전선을 이끌어 내는 것에 성공했다.
이것은 당시 지중해 최강이었던 로마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이에 로마는 시저 시대 이전에 로마의 최고 영웅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총사령관으로 파견했다.
술라는 마리우스와 더불어서 스파르타쿠스가 거병하기 10년 전까지만 해도 로마의 핵심 권력자였던 자였다.
그 둘은 군벌 세력으로서 이름을 날리던 자들이었으며 역사가들 중에는 이 둘의 전쟁 수행 능력은 그 스키피오나 시저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을 정도였다.
사실 스키피오나 시저에 비교하는 것은 좀 무리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둘이 뛰어난 장군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었다.
폰투스의 국왕인 미트라다테스는 그런 술라를 상대로 4년에 걸쳐서 싸웠다.
사실 당시의 압도적인 전력차와 술라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무게감을 생각하면···, 그래 4년을 버틴 것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 것이었다.
다만 술라는 한창 싸우던 와중에 로마 본토에서 자신의 정적인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문제를 일으켜서 더 이상 전쟁에 주력하고 있을 수많은 없었다.
그로 인해서 술라는 평화 협정을 맺고 서둘러서 로마로 돌아간다.
술라는 로마로 돌아가면서 자신의 대리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라는 역사에 이름도 남지 않은 인물을 남겨서 현상 유지를 하기를 명했다.
하지만 그 무레나라는 듣보잡은 결국 공적을 탐내서 무리수를 뒀고 그 결과 폰투스의 반격에 대거 깨지고 만다.
4년에 걸쳐서 이룩한 술라의 승전을 모두 무위로 돌려 버리고 만 것이다.
결국 그로 인해서 로마는 소아시아에 잔뜩 화가 난 적만 하나 만들어 버렸고 이 적은 소아시아에서 오랜 세월동안 로마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게 된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일어난 그 시점에까지 말이다.
그 후 실제의 역사에서는 루쿨루스가 소아시아와의 전쟁을 계속해서 수행하고 그 후에는 폼페이우스가 2년에 걸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한다.
즉, 이 미트리다테스 국왕이라는 자는 당시에는 정말 드물게도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라는 당시 로마 최고의 사령관들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당시 폰투스와의 전쟁은 중요한 일이었다.
어쨌든 폰투스라는 나라의 국력 이상으로 미트라다테스라는 적국의 대왕이 꺼림칙해서라도 그냥은 둘 수 없는 전쟁이었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붙여서 연참하면 항상 추천수가 줄어서 슬픕니다.
하지만 한 번 해보겠습니다.
항상 응원해 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즐감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