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1화 (1/187)

1화

똑같은 시간을 반복한다는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그리고 그 끝은 똑같았다.

누군가의 죽음. 또는 자신의 죽음.

죽음이라는 것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촌스러운 야광 별이 붙어 있는 천장과 난방이 들어오지 않아 차가운 바닥의 냉기를 느끼며 시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휴대전화를 켜지 않았지만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5년 전으로 돌아왔다.

처음도 아니고 두 번째도 아니고 세 번도 아닌 이제 몇 번째인지 세는 것도 귀찮았다.

맞벌이로 바쁘신 부모님 때문에 시우는 방과 후 모든 활동을 누나와 함께했다. 남들은 태권도나 검도를 배울 때 시우는 누나와 함께 발레를 배웠다. 그렇게 그는 우아한 백조처럼 무대를 날아다니는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형식적으로 다니다 포기해 버린 누나와 달리 시우는 중학생이 되어서도 발레를 하고 있었다.

발레에 빠졌던 어린 소년의 꿈은 사춘기가 오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돌로 바뀌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 춤을 추는 것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오디션이 있다는 곳은 다 돌아다녔다. 그러다 중소 기획사의 연습생이 됐다.

그리고 열여덟 살.

5인조 그룹으로 데뷔했다.

그 뒤는 뻔했다. 무수히 쏟아지는 아이돌 그룹에서 밀렸고, 곧 쓸려 내려갔다. 멤버 중 한 명이 음주 폭행으로 사회면을 장식했다. 5년째 되던 날. 해체하니 마니 시끄러웠고 우여곡절 끝에 8개월 만에 신곡을 발표하는 날. 비가 오던 그날, 첫 무대를 가던 길에 사고가 났다.

그 사고로 멤버 두 명을 잃었다.

정신 차렸을 땐, 데뷔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 번 겪어 본 미래. 시우는 잘해 낼 줄 알았다. 결과는 똑같이 망한 아이돌이었고, 얼굴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녀도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그래도 사고로 죽은 멤버는 살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사회면을 장식했던 음주 폭행은 막았지만, 교통사고는 피할 수 없었다. 이번엔 멤버 세 명을 잃었다.

또 돌아갔다.

두 번의 삶을 살아 본 시우는 어느 곡이 인기를 얻는지, 어느 그룹이 유명해지는지 꿰고 있었다. 데뷔하는 순간 정상을 휩쓸었던 그룹의 데뷔곡을 가져오고 싶었다.

작곡자들을 찾아다녔지만, 그런 곡은 없다고 단칼에 거절당했다. 그래도 이번엔 조금 다를 모양인지 일곱 명으로 데뷔했다. 데뷔곡도 바뀌었다. 하지만 또 망했다. 매번 정해진 순서인지 늘 유명해지던 그룹들은 세상에 나왔고 승승장구했다.

늘 자신의 세계가 멈추던 날.

이번엔 스케줄도 없고, 이미 흩어져 버린 멤버에겐 연락도 되지 않았다.

텅 빈 냉장고를 본 시우는 슬리퍼를 끌고 집 앞 편의점으로 향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해체라는 말도 붙이기 부끄러운 그룹이었다. 오늘은 누가 죽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이 없었기에 후드를 끌어 머리를 덮었다. 정신을 사납게 하는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시우는 후드를 만지며 고개를 들었다. 빛이 번쩍이는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보였다.

아……. 이번엔 나구나.

아마도 처음부터 자신이 죽어야 끝나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시우는 피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만약에 다시 깨어난다면 아이돌, 연예인 쪽은 바라보지도 않을 테다. 다시 그 일을 하기엔 시우는 너무 지쳐 있었다.

돌아왔다.

자신의 죽음도 이 지옥을 끝내지 못하는 것인가?

연습생으로 3년. 세 번이나 반복된 열여덟 살에 시작하는 5년간의 연예인 생활.

우습게도 시우는 15년을 이 판에서 구른 것이었다. 반지하 월세방에 앉아 두 손으로 마구 머리를 헤집었다. 기획사로 돌아가 말해야겠다. 그만하겠다고. 자신은 열여덟 살이었다. 지금이라도 공부를 한다면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5년 뒤에 또 열여덟 살이 될지도 모른다.

시우는 세수조차 하지 않고 옷을 챙겨 입었다. 생각했을 때 실천해야 했다.

기획사에 말하고 이번엔 연예인이 아닌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공부라는 걸 해서 대학을 가야지.

평범한 사람들처럼 대학 진학을 하고 군대도 다녀오고 취직이라는 걸 하는 삶을 선택했다.

* * *

“안녕하세요. 김시우입니다. 스물세 살이고 데뷔 3년 차 솔로 가수예요. 어……. 제가 이런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처음이라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여기는 공항이고요. 이 종이에 이렇게 도착지 주소가 있거든요. 혼자 비행기 타고 여기까지 찾아오래요. 국내도 아니고 해외 여행지 주소 달랑 주고 찾아오라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어쨌거나 일단 티켓팅부터 하겠습니다.”

검은 스키니진에 검은 스니커즈. 하얀색 무지 반소매 티셔츠에 카키색 항공 점퍼를 걸쳐 입은 시우는 자신의 앞에 있는 카메라를 향해 주절거렸다.

결국, 이렇게 되네.

평범한 대학 생활도 해 봤지만, 또 돌아왔다.

대학생이 되어 MT도 다니고, 동기들과 학교 앞 주점에서 술도 마시고, 과제도 하고, 친구도 많이 만들었다. 연예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좋아하는 춤도 그만뒀다. 평범하게 지냈지만, 그것도 답이 아닌가 보다.

이번엔 또 뭐가 다를 것인지 열여덟 살이 아닌 스무 살에 솔로로 데뷔했다. 그리고 대학 진학도 했다. 솔로 데뷔의 결과는 또 망했지, 뭐. 날고뛰는 끼가 있다는 애들을 선별하여 그룹으로 내놔도 망하는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였으니 당연한 결과라 생각했다. 스물세 살. 그냥 군대나 가야지 할 때, 정말 오랜만에 스케줄이 생겼다.

리얼리티 여행 버라이어티 쇼로 유명한 채널에서 온 섭외 요청은 그에게 고민을 안겨 주었다.

모든 것이 다 비밀이라면서 같이 여행하는 구성원이 유명 아이돌이라는 것만 알려 주었다. 언론에 노출된 것도 전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실제 방송이 나갈 때까지 방송 기획자의 허락 없이는 촬영 건에 관해 노출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이 달렸다.

자세한 사항은 출연 확정이 되고 나서야 알 수 있다고 했다.

고민하고 싶지 않아서 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자신을 보던 기획사 대표 태훈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모르겠지만 시우는 이제 그의 표정만 봐도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간절한 그 눈빛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기획사를 바꿀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다. 작은 중소 기획사보다 대형 기획사에서 데뷔하는 것이 나았을 텐데. 왜 그랬을까?

힘든 연습생 시절에도 배를 곯은 적은 없었다. 엄하고 무섭기도 했지만, 망한 아이돌인 자신을 보듬어 준 사람이었다. 연습생을 그만두고 싶다며 찾아갔을 때 그는 위약금 같은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꿈을 갖는 건 10대의 특혜라고 말하며, 좋은 결과가 있기를 빌어 준 사람이다.

거절의 말에 다시 생각해 보라는 말도 하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하는 그를 보며 시우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할게요. 돈 받고 여행 다녀오는 셈 치면 되잖아요.”

어차피 또 돌아갈 것인데. 뭔들 못 할까?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옆에 딱 붙어 있는 카메라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작가님 한 분과 카메라 감독님 한 명. 매니저도 없이 홀로 온 시우. 그렇게 세 명으로 이루어진 조촐한 조합이었다.

할 말이 없어 어색하게 웃는 시우를 향해 작가는 말을 하라는 손짓을 취하고 있었다.

“아. 또 무슨 말을 해야 하죠? 8박 10일 일정이라고 해서 짐을 어떻게 싸야 할지 몰라 엄청 고민했어요. 여행지가 많이 춥거나 많이 더운 곳은 아니라고 해서, 여기 안에 그냥 반소매 입고 이거 걸쳤는데, 이상한가요?”

커다란 캐리어를 끌면서 걸어가던 시우는 한쪽 어깨에 걸치고 있던 백팩이 미끄러지자 얼른 끌어 올렸다. 그 바람에 제 체격보다 큰 항공 점퍼가 흘러내려 반대쪽 어깨가 드러나도 신경 쓰지 않은 채 항공사 부스로 향했다.

계속해서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가 어색해, 시우는 손으로 입가를 살짝 가렸다.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커다란 눈을 굴리면서 카메라와 작가님을 번갈아 보는 것이었다.

순서를 기다려 티켓팅을 하고 짐을 부쳤다. 작가님과 카메라 감독님은 미리 수속을 끝냈는지 시우가 하는 걸 지켜볼 뿐이었다.

여권을 꺼내기 위해 잠시 내려놨던 백팩을 챙기기 위해 여권 사이에 항공 티켓을 끼워 넣고는 입에 물었다.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카메라를 향해 눈꼬리만 살짝 접어 미소를 지었다.

시우에게 공항은 익숙한 곳이었다. 촬영이나 일로 온 적은 없었다. 순전히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혼자 여행을 다니다 보니 제집처럼 들락거렸다.

이 모든 과정이 익숙했지만 실수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기에 시우는 더 꼼꼼히 챙겼다. 태그를 매단 채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이동하는 자신의 캐리어를 보고 몸을 돌렸다.

“캐리어 부쳤고, 백팩도 있고, 여기 여권이랑 티켓도 잘 있죠? 보자……. 이제 어디로 가야 하냐면 G17 게이트를 찾아가래요.”

입에 물고 있던 여권과 티켓을 잘 정리해 백팩에 넣고는 느린 걸음으로 탑승구를 향해 걸었다. 똑같은 나이를 여러 번 산다는 것은 재밌으면서도 신기한 일이었다. 그 끝이 비극이라는 것만 아니라면.

그리고 이번 삶은 지금껏 시우의 삶과 너무나도 달랐다. 이번엔 하고 싶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평범한 대학생이었으며, 인기는 없을지언정 솔로 가수이기도 했다.

거기다 경제적으로도 풍족했다. 여러 번의 회귀로 깨달은 것은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똑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됐고, 일어날 사고는 일어났으며, 유명해지는 사람들은 늘 유명해졌다. 그랬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개 외웠던 복권을 사 보았고, 그 결과는 당첨이었다.

지금 시우는 반지하 월세방이 아닌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근사한 오피스텔에 살고 있었다. 10년이 넘은, 언제 퍼질지 모르는 소형차 대신 거친 산길도 달릴 수 있는 SUV를 몰고 다녔다.

그리고 재밌게도 오늘은 자신의 삶이 끝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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