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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9화 (9/187)

9화

젖은 머리를 손으로 털며 방문을 열자, 라면 냄새가 가득했다. 밤이었다면 자신도 먹겠다고 달려들었을 텐데.

“어. 시우 거 남아 있어?”

열심히 라면을 먹는 사람들 사이로 현수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표정으로 그가 크게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여러 명의 시선을 받게 된 시우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무슨 아침부터 라면이에요.

서울에서 챙겨 온 블랙 커피믹스를 커피포트 옆에 뒀었기에 그거나 찾아서 한잔 마실 생각이었다.

“하나 더 끓여요? 라면 더 있어요.”

괜찮다는 행동에도 안이 먹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우는 얼른 그의 어깨를 살짝 눌렀다. 그냥 커피 한잔 마시겠다고요. 제발 제게 관심을 주지 마세요.

“코코는 이거.”

다들 제대로 씻지 않아 비니나 캡 모자, 헤어밴드 같은 것을 하고 있었기에 에반이 없다는 건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등 뒤에서 들리는 그 목소리와 함께 향긋한 커피 향이 라면 냄새 사이로 스며들었다.

커피가 들어 있는 것이 분명한 머그잔과 바삭하게 구운 토스트 몇 쪽이 담긴 접시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하늘색 후드 티셔츠가 보였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에반의 잘생긴 얼굴이 마지막으로 보였다.

“뭐야? 커피? 내 거는?”

라면 냄새와 다른 커피 향에 식사를 끝낸 현수가 얼른 말했다.

“뭐요?”

정말 깔끔하게 현수의 말을 무시해 버린 에반은 빈 식탁 한쪽에 트레이를 놓았다. 그러고는 뭐가 그렇게 놀라운지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시우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어서 먹어. 오늘은 많이 움직일 것 같으니까 토스트도 먹고. 그런데 잼 어디 있어? 어제 잼 안 샀어?”

시우를 기어이 의자에 앉힌 에반은 토스트 하나를 집어 입에 물었다. 딸기잼이라도 있으면 딱 좋겠는데.

“나도 커피 줘.”

여기 시우만 있나? 오직 시우에게만 모든 관심을 쏟고 있는 에반의 행동을 지켜보던 루카가 한마디 툭 뱉었다. 어제부터 무언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런데 이건 뭐라고 말해야 하지?

“저기 커피포트 있어요. 안 마셔? 커피 식으면 맛없는데.”

시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에반의 옷 끝을 잡아당겼다. 제발 그러지 마. 난 절대 튀고 싶지 않아. 시우의 촬영 목표가 흐려지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고, 튀지 않고 그렇게. 하지만 부엌에 설치된 카메라는 지금 상황을 모두 담고 있었다.

“왜? 맛이 없어?”

맛이 없는 게 아니고 슬쩍 옷을 잡아당겼을 뿐인데, 에반은 굳이 공들여 허리를 숙이곤 시우와 눈을 맞춰 주었다.

“뜨르나아.”

시우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아주 작게 말했다.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하기 전에 부엌을 나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제 자신이 했던 말을 그는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하긴 그의 대답은 제멋대로 하겠다는 거였으니까.

방을 서성이며 에반이 오기를 기다리던 시우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얼른 문 쪽으로 돌아섰다.

“왜?”

와! 진짜 환장한다. 무한 회귀로 제법 긴 시간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시우였지만, 에반의 행동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자신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어서 따라오긴 했다. 그런데 그의 손엔 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하나를 시우에게 내밀었기에 시우도 어느새 따스한 커피 잔을 들고 있었다.

“아니. 에반. 너는…….”

가까이 서 있었기에 고개를 젖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시우는 목이 아파 몇 걸음 물러났다. 둘 사이에 공간이 생기자 그만큼을 바로 좁혀 버리는 에반의 행동에 시우는 계속 목을 젖히고 있어야 했다.

“거기 앉아.”

침실 한쪽에 있는 화장대 의자를 가리키고 나서야 시우는 그와의 일정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작은 화장대 의자에 에반이 앉는 걸 확인하고선 정리하지 않은 이불이 제멋대로 뭉쳐져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에반. 어제 내가 말했던 거.”

“그건 더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잖아.”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순간 에반은 곧바로 대화를 끝내 버렸다.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확실히 뭘 알아야 어떻게든 대처를 할 것이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말미암아 촬영 내내 불편할 순 없었다.

“뭐가?”

공격적인 말투가 들어갔는지 지금까지 부드럽던 에반의 얼굴에서 표정이 점차 사라졌다. 긴 다리를 꼬고 커피를 마시는 그의 시선은 시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네 친절이 불편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굴린 시우는 에반을 자극하지 않는 단어를 고르고 골라 말했다.

“모를 줄 알았는데, 알긴 아네.”

많은 생각 중에 원래 그가 친절함과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항목도 있었지만, 방금의 대화로 그 항목을 깨끗이 지웠다.

“친절하게 대해 주는 건 좋은데, 부담스러워서 그래. 아, 커피는 고마워. 토스트도 혹시 날 위해서 한 것이라면 그것도 고마워. 그런데 이렇게 안 챙겨 줘도 돼. 나 혼자 할 수 있어. 내가 방송 초보인 건 맞는데 눈치가 없지는 않아. 그러니까 촬영에 피해를 주는 일은 없을 거야.”

“코코는 말을 참 이쁘게 하네.”

열심히 말하던 시우는 입을 벌린 채, 그를 응시했다.

이 잘난,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스타님은 혹시 완전체인가요?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시나요? 벽을 보고 이야기해도 이것보다 대화가 잘될 것 같았다.

“코코.”

조금 화가 난 듯도 보이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생겼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포근한 미소였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일어나자 그 체격에 눌린 시우는 반대편으로 조금 엉덩이를 물렸다.

“이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도 같은데, 다 쓸데없는 생각이야. 말했잖아.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내가 너에게 왜 이러나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다가온 커다란 손이 시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멀어졌다.

“그런데 너 오늘도 여기서 혼자 잔다며?”

이야기하려 했는데, 제대로 된 이야기는 하지 못했고. 시우의 머릿속엔 수많은 물음표만 더 생겨나 있었다. 내일 오후에 숙소 이동이 있었기에 번거롭게 또 방 배정을 하느니 그냥 그대로 가자는 피디의 통보가 있긴 했다.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엔 성실한 시우였기에 에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나와서 토스트도 먹어.”

아무런 성과 없는 대화가 끝났다. 시우는 사라진 한 사람과 꼭 닫힌 문을 보며 들고 있던 커피를 홀짝였다. 커피는 맛있었다. 엉킨 줄이 아예 매듭이 지어진 것 같지만, 커피는 맛있었다.

* * *

“형! 빨리. 빨리요.”

그냥 3:3으로 하면 안 될까? 깍두기 할게. 혹시 심판은 필요 없니?

특별한 일정 없이 오전 동안 쉬라는 말에 시우는 망설임 없이 챙겨 온 책을 펼쳤다. 그리고 뒷마당 데이베드에 누워서 살랑이는 바람을 느끼며 책에 빠져들었다.

집 안에서 쿠당탕거리고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리고, 예찬이 운동한다며 페트병에 물을 채우고 다니는 걸 봤지만 시우는 혼자의 시간을 즐겼다.

언제부터인가 시우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풀장에 커다란 백조 모양의 튜브가 둥둥 떠다녔다. 풍덩거리는 소리가 나고 누군가 백조 튜브를 타는 것 같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각자 알아서 휴식을 즐기는 것이니까.

남들보다 긴 시간을 산 시우는 참 다양한 취미를 가졌다. 그랬기에 잘한다고 내세울 것은 몇 되지 않았지만 못한다고 말할 것도 몇 없었다. 그리고 꼭 배워야 하는 것으로 외국어를 꼽았다. 해외에서 급하면 휴대전화로 번역기 돌려도 된다. 하지만 자신의 실력을 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기에 일부러 독서에 취미를 붙였다.

그런 것이 쌓이다 보니 영어로 된 소설은 큰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챙겨 온 영국판 『셜록 홈스』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자신이 누워 있는 데이베드 옆 테이블에 셀프 캠이 놓여 있지만, 의식하지 않고 책만 봤다.

정오가 가까워지는 시간, 갑자기 다들 수구를 하겠다고 뛰어나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뒷마당을 돌아다니던 예찬이 풀장을 보고 눈을 빛낸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목소리를 들어선 안 같았는데, 예찬이 기어이 튜브를 타고 놀던 안을 빠트린 것 같았다. 둘이 투덕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니까. 그러더니 갑자기 예찬의 목소리가 큰 저택에서 울렸다. 흩어져 있는 촬영 멤버를 부르는 소리였다.

“나 심판할게. 정말 공평하게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다 같이 놀아야지.”

조금 전 눈앞에서 운동한다고 알짱거릴 때 알아보긴 했지만, 그는 정말 에너지가 넘쳤다. 조깅한다고 뛰어다니고, 500mL 물통도 아니고 1.5L 플라스틱 물병에 물을 채우고 운동을 한다며 들고 다녔다. 거기다 휴식 중이던 안을 괴롭혔으면 됐지, 왜 이렇게 일을 키울까? 적당히 타협해야 할 것 같아 보고 있던 책을 옆에 내려 두었다.

“아니면 그럼 깍두기!”

다들 성격이 좋은 것인지, 방송용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커다란 레트리버 같은 놈이 웃으면서 하는 말에 시우는 따라 웃고 말았다. 갑자기 예찬이 공주님 안기로 들기 전까지.

“야!”

“시우 형도 같이 한대요!”

순식간에 풀장 앞에 다다른 예찬이 신나게 소리쳤고, 시우는 그야말로 허공을 날았다. 잠시 하늘을 나는 기분을 느끼고 미지근한 풀장으로 강제 입수를 당했다.

던져지는 순간 마음의 준비는 했기에 크게 당황하지 않고 물속을 허우적거려 일어난 시우는 밖에 서서 배를 잡고 웃고 있는 예찬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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