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시우는 따뜻한 물에 샤워하면서 조금 전 했던 게임을 떠올렸다. 에반은 기분이 좋은 것 같으면서도 자신과 눈이 마주치면 표정을 굳히곤 했다. 게임 준비 전 자신을 향해 대놓고 미쳤냐고 말했고, 제가 입고 있던 옷을 입고 있기를 강요했다.
괜한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아서 후다닥 그의 옷을 입고 물에 들어갔다. 그랬더니 옆으로 다가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볼품없는 자신의 몸을 가렸으니까? 아니면 카메라를 향해 어설프게 날리던 하트를 멈춰서 그랬나?
하지만 게임 중간중간 눈이 마주쳤을 때, 매번 변하는 에반의 눈빛을 따라갈 수 없었다. 환하게 웃고 있다가도 왜 그렇게 차가워지는 것인지.
더군다나 현수 형에게 끌어안겨 있다가 눈이 마주쳤을 때는 진짜 온몸에 소름이 다 돋았었다.
“하아. 진짜 나한테 왜 그러냐.”
욕실을 나와 옷을 챙겨 입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처음엔 굵고 짧게 불꽃같이 살길 꿈꾸었지만, 몇 번 살아 본 지금은 그저 가늘고 길게 사는 것으로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그런 시우에게 에반은 참으로 해로운 인간이었다.
잔뜩 찢어진 스키니진에 흰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시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리카락 색마저 화려한 다른 멤버들이 떠오르자, 형질상 어쩔 수 없이 외모에서 잔뜩 밀리니 괜히 의상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쨍한 색의 옷을 가지고 올걸. 눈에 띄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완전히 묻히는 건 싫었다.
“포기를 몰라요, 포기를. 김시우, 이만하면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냐.”
자신을 타박하며 오버사이즈 핏의 흰색 셔츠를 걸쳤다. 청스키니진에 화이트가 메인 컬러니 신발은 짙은 청색의 스니커즈를 신고 몇 개의 목걸이를 레이어드해서 걸었다.
“귀걸이는 뭐가 좋을까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치렁거리는 귀걸이를 들었다가 자신의 목에 여러 개 걸린 목걸이를 보고는 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좀 화려하고 큰 디자인의 귀찌를 한쪽에만 하고 백팩을 챙겨 나갔다.
“헉.”
방을 나오는 순간 자신의 뒤를 덮친 무언가에 깜짝 놀라 들고 있던 백팩을 놓쳤다.
“우리 시우 왤케 귀여워.”
뒤에서 꼭 끌어안은 강한 힘에 눈만 데굴거리던 시우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상대가 현수임을 알아차렸다.
“뭘 이렇게 놀라. 너 잘 먹고 살 좀 쪄. 아침도 커피가 뭐냐, 커피가. 아까 벗은 거 보니 애가 비쩍 말랐어.”
장난이었는지 쉽게 풀어 주고는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올리며 타박하는 현수의 잔소리에 시우는 작게 미소만 지었다. 최근 10년 정도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그룹 생활을 할 때는 이런 일이 늘 비일비재했다.
샤워 한번 하려면 번호를 정해서 기다려야 했고, 식사라도 한번 할라치면 난리였다. 이렇게 외출 준비를 하는 것까지 모두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갑자기 뒤에서 그러면 놀란다고요.”
“하긴 넌 솔로 가수라 모르긴 하겠다. 그룹 생활 하면 늘 이러고 장난쳐서. 오늘 나가서 점심 먹을 때 내 옆에 앉아.”
“왜요?”
“내가 진행하니까 옆에 있으면 좋잖아.”
“괜찮은…….”
“뭐가 괜찮아. 너 은근슬쩍 빼는데, 내가 그런 거 못 봐서 그래. 옆에서 리액션이나 잘해.”
할 말이 끝났는지 기껏 열심히 만진 머리까지 흩트려 놓고 휘파람을 불며 먼저 가 버리는 현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Journey’ 멤버들은 참 이상했다. 솔직히 남을 밟지 않으면 올라가기 어려운 곳이 이 세계였다. 누군가보다 위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아래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밟았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어쨌거나 그런 피라미드 구조였다.
같은 그룹이더라도 방송에 나갈 때는 다른 멤버보다 튀기를 바랐다. 음악 방송 무대에서 엔딩에 서로 잡히고 싶어 했다. 이런 버라이어티 쇼라면 더 웃겨야 했고, 망가진 모습으로라도 한 번이라도 더 카메라에 잡혀야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들의 눈에 들어야 하는 곳이었다.
이미 다들 확실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인가? 시우가 뒤에 빠져 있으면 누구든 다가와서 말을 걸고 같은 프레임에 들어가도록 유도했다. 방금도 현수가 일부러 자신을 챙기러 온 것이다. 현수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시우는 제일 구석 자리에 앉을 생각이었다.
일부러 찾아와 이런 말까지 하고 갔기에 오늘 점심엔 꼼짝없이 현수의 옆에 앉아야 했다. 백팩을 챙겨 한쪽 어깨에 메고 나가는 시우의 발걸음엔 힘이 없었다.
리액션 진짜 못하는데. 어떡하지?
* * *
예상 점심 식사 시각은 1시였지만 지금 시계는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침에 커피 한 잔 마시고 한 시간 넘게 물놀이를 했더니 말 그대로 시장이 반찬이었다. 지금 주위에서 뭔 일이 일어나든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크림파스타가 먼저였다. 아까 현수 형이 리액션에 대해 언질을 주었다. 하지만 리액션도 배가 불러야 가능했다.
시우는 야무지게 포크와 스푼을 이용해 크림파스타를 돌돌 말았다. 먹기 좋게 포크에 면이 말리자 입을 벌리고 파스타를 쏙 넣었다. 입을 다물고 오물거리면서 오이피클을 하나 포크로 찍어 먹었다.
꼭꼭 씹고는 아삭한 오이피클을 하나 더 먹고 콜라를 집어 들었다.
“다들 먹으면서 들어. 오후 관광할 팀 나눠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두 명, 두 명, 세 명으로 나눠야 한다는데.”
진행할 거라고 말했던 현수가 말을 꺼내자, 시우의 마음이 급해졌다. 아, 조금만 더 먹고 하면 안 돼? 다들 배가 고팠기에 그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리액션을 해야 했지만, 피클을 씹고 있었기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콜라, 콜라. 어서 먹고 리액션 해야지. 시우는 콜라를 얼른 마셨다.
“뭐야. 아무도 대답 안 할 거야? 그럼 나를 기준으로 지금 오른쪽에 있는 사람으로 팀 하자. 마지막 끝쪽이 세 명 하고.”
나름 게임을 하거나 어떤 방법을 제안하면 무조건 좋다고 해야지, 라고 생각하던 시우는 미처 빨대를 놓지 못하고 눈동자만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떤 방법을 통해 팀을 정하든 일단 지금은 에반만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시우의 왼쪽에는 현수가 앉아 있었다.
현수가 파트너로 정해졌으니 마음이 편해진 시우의 시선이 스테이크로 향했다. 시우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가운데 놓여 있는 스테이크를 한 점 잘라 먹었다. 이 집 스테이크도 잘하네. 스파게티도 맛있더니. 다들 불만이 없는지 처음부터 없던 반응은 지금도 없었다.
“형!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스테이크가 맛있어서 한 점 더 먹으려는 찰나, 들린 큰 소리에 깜짝 놀란 시우의 어깨가 눈에 띄게 들썩였다.
“뭐가 그런 게 어디 있어? 나랑 시우랑 가고. 루카랑 예찬이랑 가고. 너는 루이랑 안과 함께 다녀오면 되지. 뭐가 문제야.”
테이블 끝쪽에 앉아 있던 에반이 벌떡 일어나 있었다. 한 손에는 나이프를 꼭 쥐고 있었다. 아마도 처음부터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에 음식이 들어 있어서 제때 말하지 못한 것 같았다.
“왜 형이 코코랑 가요?”
아! 갑자기 입맛이 떨어졌어. 시우는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진짜 나한테 왜 이러냐고. 너 진짜 내 팬이냐? 그런데 팬이라고 해도 많이 이상하잖아. 나 오메가도 아니라고. 아까 네가 나 노려봤잖아. 욕했잖아. 이 나쁜 놈아!
“시우가 내 옆에 있으니까? 나랑 시우가 팀 하는 거 싫어? 그럼 날 기준으로 왼쪽이랑 팀 하기. 나랑 안. 너랑 루이. 루카, 예찬, 시우. 이렇게 해.”
흥분한 에반과 다르게 현수는 시우의 개인 접시 위로 피자 한 조각을 올려 주었다. 오늘 시우 덕분에 수구 게임도 이겼고, 시우에게 유독 집착하는 에반을 놀리기 위함이었다. 시우만 모르고 있었지, 현재 시우의 몸에선 현수의 페로몬 향이 강하게 풍겼다.
에반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며 수구를 하는 동안 열심히 묻혔건만, 시우가 씻고 나오는 사이 다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일부러 껴안고 에반을 약 올리기 위해 점심 먹을 때도 자신의 옆에 앉으라고 신신당부했다.
아마 이곳의 모든 멤버는 에반 편이 아닌 현수 편일 터였다. 지금 시우에게 현수의 페로몬 향이 진하게 나자, 다들 웃으면서 에반을 훔쳐보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시우에게 말하지 않았고, 굳이 탈취제를 뿌려 주거나 현수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돌 생활을 해 오면서 에반을 제법 잘 안다고 자부하는 현수였다. 방송이 겹쳐 대기실에서 만나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밖에서 보낸 시간도 많았다.
시우가 오메가였다면 혹시 첫눈에 반했나 생각하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고. 어쨌든 에반은 지금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
“어? 나 안 먹어도 돼요.”
“맛있어. 이거 안 먹었잖아.”
현수는 피자를 보고 얼른 거절하는 말을 하는 시우에게 친절하게 말했다. 지금 에반이 발끈하는 이유는 단순히 같은 팀이 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페로몬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시우에게 다가가 그 페로몬을 자신의 페로몬으로 덮거나 탈취제를 뿌리고 싶어 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에반이 시우에게 다가갈 것 같은 상황이 되면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번번이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거나 다양한 상황에서 시우 근처에는 가지도 못한 에반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못했다.
“아, 진짜 차라리 게임 해요. 정정당당하게.”
잠시 피자에 집중하던 시우는 에반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한 손에 나이프를 꼭 쥔 채 에반은 테이블 반대편 끝에 서 있었다.
“눈치 게임. 1!”
에반이 게임을 하자는 말을 끝내자마자 지금까지 이 상황을 관망하던 루카가 벌떡 일어나며 숫자 1을 외쳤다.
“2.”
“3.”
순식간에 루이가 일어났고, 다음이 현수였다.
“4!”
“5.”
“6.”
“크큭큭큭…….”
정말 순식간에 게임이 끝났고, 끝까지 숫자를 외치지 못한 것은 에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