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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12화 (12/187)

12화

시우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조금 멀리서 걸어오는 현수를 보고 한 손을 들어 흔들었다. 눈치 게임이 끝나고 멍하니 서 있던 에반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릴 적,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열심히 모은 별 딱지 100개로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케이크를 선물 받았다. 그런데 받자마자 케이크를 압수당한 표정, 딱 그런 표정이었다.

“딸기? 바닐라?”

현수가 양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보이자, 시우는 웃으면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선택했다. 늦은 오후.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 가득한 길을 천천히 걸으며 시우는 현수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점심 식사가 끝난 후, 자연스럽게 처음 정했던 팀으로 움직였다. 현수와 시우는 발길 가는 대로 돌아다니다가 또 내키는 곳에서 저녁을 먹는 것으로 정했다.

“형. 이 길 따라 쭉 가면 강 나온대요.”

시우는 현수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간 사이 갈 만한 곳을 검색하고, 지도 앱을 켜서 확인한 것을 말했다.

“강? 그거 우리 어제 여기 올 때 본 그 강인가?”

“네. 그 강이래요. 거기 강 앞에 벤치도 있고 나무도 많고 공원처럼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 많다네요.”

“그래, 그럼 음식 테이크아웃 해서 밖에서 먹을까? 맥주 마셔도 돼요?”

현수는 뒷걸음질 치면서 자신들을 찍고 있는 카메라맨 옆에 있는 작가님을 바라보았다. 현수의 말에 급하게 손을 흔들더니, 입 모양으로 확인해 본다는 작가의 말에 시우는 배시시 웃었다. 단칼에 안 된다고 말한 건 아니니까 가능성 있지 않을까?

“한강에서 먹는 치맥이 최고지.”

“형도 한강에서 치맥 해요?”

시우는 도로 쪽을 걷고 있는 현수를 보고 질문하다 달려오는 오토바이를 발견하고는 현수의 옷깃을 잡고 자신 쪽으로 당겼다. 그러고는 은근슬쩍 그와 자리를 바꿔 자신이 도로 쪽에 섰다.

아무래도 안쪽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상점을 구경하기도 좋고 안전했던 것이었다.

“당연하지. 밤에 작업하다가 필받으면 드라이브 삼아 나가서 치맥 한잔. 새벽에 사람도 없고 사람들 시선도 없으니 편하게 먹기 좋지. 그래서 내 차에 항상 돗자리 있잖아.”

“엥? 혼자요?”

“혼자 가서 어떻게 맥주 마시냐. 음주 운전 할 일 있어? 있어, 카이저 멤버 중에 술 못 먹는 애. 너는?”

“전 집이 한강 앞이라서 산책 삼아 나가서 혼자 많이 마시죠.”

“에이! 무슨 술을 혼자 마셔, 청승맞게. 앞으로 형 불러. 형이 언제든 같이 마셔 주마!”

“그게 무슨 재미예요. 한강에서 먹는 맥주는 약속 잡고 먹기보다 형 말대로 딱 느낌 왔을 때, 그때 마시는 거죠.”

“어쭈. 술 좀 드시는 것 같습니다?”

“못 마시지는 않습니다만.”

정말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강을 향해 걷던 시우와 현수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피디와 통화하고 온 작가님이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오늘 저녁은 테이크아웃 해서 강을 보며 먹는 것으로 결정 나는 순간이었다.

* * *

시우는 생수 한 병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서며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챙겨 온 노트북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그리고 늘 자신이 이용하는 라이브 앱에 접속했다. 우리 코코맘을 만날 시간이었다.

어제 피디님이 프로그램을 공개하지 않는 선에서 개인 방송을 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늘 해야겠다고 결심도 했으니 모든 공식 일정이 끝난 지금이 적당했다.

현수와 같이 마실 때는 몰랐었다. 평소 즐기는 만큼 먹었지만, 술기운이 올라오지 않기에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숙소로 복귀하고 따뜻한 물에 샤워까지 하고 나니 뒤늦게 알딸딸한 것이 기분이 좋아졌다.

“아. 술 먹고 해도 되나?”

시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쓰다듬고 룸의 조명을 조절했다. 노르스름한 조명이 살짝 달아오른 것 같은 볼을 숨겨 주었다.

의자에 편히 앉아 카메라를 이리저리 움직여 자신의 얼굴이 잘 나오게 조정하고 라이브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시우예요.”

보통 시우가 하는 방송은 참여 인원 한두 명으로 시작했다. 많이 들어온다고 해도 50명이 넘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사람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기보다 바로 시작하는 편이었다. 짧게 인사하고는 여전히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여기는 밤인데 거기는 지금 낮이겠네요. 우리 코코맘 바쁘시겠다.”

늘 보는 익숙한 아이디에 잘 지냈냐는 말이 보이자 시우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나 술 마셨어요. 정말 멋진 곳에서 진짜 진짜 멋진 형이랑요. 누군지 말하면 우리 코코맘 정말 놀랄 거야.”

시우는 살짝 몸을 숙이고는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소곤거렸다. 그러자 누구냐는 말이 곧 올라왔지만 ‘비밀’이라고 대답했다.

의자가 딱딱하고 불편했기에 몸을 들썩거리다 결국 두 다리를 가슴 쪽으로 끌어안아 쪼그리고 앉았다.

“여기 의자 불편해요. 보시면 알겠지만, 제 방이 아니고 숙소랍니다. 지금 이 넓은 룸을 혼자 쓰는데, 내일 되면 어떻게 변할지 몰라요.”

중간중간 이야기가 끊기면 시우는 그때그때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자 제대로 노래를 불러 달라는 요청이 들어와 또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평소라면 절대 부르지 않았겠지만, 술의 힘인 것인지 ‘그럴까요?’라고 말하며 시우는 틀어 놓은 음악의 볼륨을 줄였다.

“무슨 노래가 좋을까요? 지금 여긴 밤이니까 잔잔한 노래가 좋을 것 같아요.”

라이브를 시작하기 전 들고 온 물병을 테이블에 같이 뒀기에 물병을 따면서 채팅창을 유심히 살폈다. 듣고 싶은 노래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며 시우는 지금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을 골랐다.

“무슨 자장가예요. 거기 지금 한낮이잖아요.”

물을 한 모금 마신 시우는 채팅창에서 자장가를 발견하곤 소리 내어 웃었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가만히 있으면 새초롬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시우였다. 하지만 이렇게 웃을 때면 올라간 눈꼬리가 살포시 접히면서 그 누구보다 귀여워졌다. 광대가 동그랗게 솟아오르고 입도 귀여워졌다. 그 모습이 정말 쿼카 같았다.

“코코. 나 이것 좀 해 줘.”

그래도 자장가를 불러 달라는 글과 잔잔한 팝송이 번갈아 올라왔다. 그걸 지켜보던 시우의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갔다.

분명히 그럴 리가 없는데,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시우의 고개가 뒤로 홱 돌아갔다.

라이브 하려고 샤워 후 나가서 피디님께 허락도 받고 혹시나 목이 마를까 봐 생수도 챙겨 왔다. 심지어 들어오면서 자신의 방문도 잠갔다. 누가 들어오진 않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그랬다.

그러니 지금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 네가. 지금. 여기 그런 모습으로 있는 거니?

눈앞에 펼쳐진 장면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아 시우는 입을 멍하니 벌린 채 바라보았다.

편안한 잠옷 바지를 입고 상의는 어설프게 걸친 채,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있는 에반이 눈에 들어왔다.

“너. 너……. 너 여기 왜 있어?”

시우는 여전히 그를 보면서도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재빨리 라이브를 끝냈다. 피디님이랑 이야기하면서 오늘은 혼자 방송을 하기로 했었다. 혹시 봤을까? 우리 코코맘님들이 입이 무겁긴 하지만.

“여기 욕실 비었길래. 그런데 나 이것 좀 해 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시우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에반의 행동에 뒷걸음질 치고 싶었지만, 테이블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뭐?”

수건을 머리에 올려놓은 채, 잠옷 상의를 걸친 에반의 말을 또 알아듣지 못하고 시우는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눈을 어디 둬야 할지, 행동은 어떻게 해야 할지 두뇌가 멈춰 버린 것 같았다.

“단추.”

“네가 하면 되잖아.”

“이거 안 보여?”

아니 나이가 몇 살인데 단추를 대신 끼워 달라고 해? 시우의 말에 에반은 자신의 왼손을 들어 보였다. 그의 세 번째, 네 번째 손가락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럼. 그…… 그냥 티셔츠 입으면 되잖아.”

아까 점심 식사 후 팀별로 흩어질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갑자기 왜 손가락에 붕대를 했을까? 괜찮냐는 말을 해야 하는데, 시우의 입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이거 입으래.”

시우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며 에반은 옷을 끌어 아래부터 단추를 혼자 채우려고 꼬물거렸다.

“왜?”

방어적인 자세로 서 있던 시우는 헛손질하는 에반의 손을 보다 못해 그의 옷 끝을 잡았다.

“커플룩? 어쨌든 오늘 입으라네.”

정말 여행처럼 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방송은 방송이었기에 출연진들이 제시하는 건 다 해야 했다. 누군지 몰라도 오늘 밤 에반이 해야 하는 건 커플 잠옷을 입는 것인가 보다. 겨우 하루가 지났지만, 에반이 소소하게 하는 건 제법 많았다. 협찬받은 의상부터 액세서리까지. 그가 찍은 CF 제품 PPL도 들어갔기에 어떤 부분에서 그에겐 자유가 없었다.

시우는 말없이 그의 단추를 아래에서부터 하나씩 채웠다. 아마도 자신이 피디님과 이야기를 하러 나간 사이 그가 들어온 것 같았다. 거기다 자신이 이 방에 크게 음악을 틀어 놓았다. 그 바람에 에반이 씻으면서 나는 자연스러운 물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꼭 누구의 잘못이라고 잘잘못을 가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방송을 시작한 제 잘못이 더 큰 것 같았다.

한편 코코맘들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멍하니 눈에 보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구 하나 자신이 보고 있다는 걸 알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분명히 기분 좋은 코코가 노래를 불러 주려고 했는데? 왜 헐벗은 에반이 코코의 방 욕실에서 나오는 것일까? 너무 자연스럽게 우리 코코를 불렀고, 왜 단추를 채워 달라고 해? 갑자기 너무나도 엄청난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순간 허둥거린 코코의 손이 앞을 가렸고, 분명 그는 라이브를 끄려고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귀여운 코코의 손이 누른 것은 ESC키가 아닌 숫자 1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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