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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15화 (15/187)

15화

현수가 버럭 소리 지르는 것과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 페로몬에 남은 건 짧은 침묵이었다.

“이거 안이 오면 저부터 시작하면 되는 거죠? 그런데 피디님, 이거 종이가 너무 얇아요.”

전부 베타인 피디와 스태프를 비롯해 방금 에반이 뿜어낸 페로몬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은 시우에게 중요한 건 종이의 두께였다. 일단 자신이 예찬에게 넘기는 건 괜찮을 것 같은데, 이게 저기 마지막까지 갈 때까지 잘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본디 이 게임이라는 것이 의도적인 스킨십을 유도하는 것이라지만, 시우는 심란한 마음으로 양손 엄지와 검지로 잡고 만지작거렸다.

웜마. 이 피디님, 진짜 이를 가셨나 보네.

힘을 준 것도 아니고 살짝 비비적거렸는데, 힘없이 픽 찢어진 종이를 든, 방향성을 잃은 시우의 동공이 피디 옆 작가님께 향했다. 이보세요, 말 좀 해 보세요. 일단 제가 그 엄청난 일을 당할 당사자가 아닌 것 같아 다행이지만.

“어머. 우리 시우 손힘이 세네.”

허망하게 찢긴 종이를 들고 있던 시우의 손에서 후다닥 종이를 수거해 가는 메인 작가님의 입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다.

“안이 왔네. 그럼 시우, 예찬, 루이, 현수, 안, 루카, 에반 순서로 가도록 하고. 다섯 번이니까 시간도 많이 안 걸릴 거야. 후딱 찍고 끝내자. 내일 긴 시간 이동하려면 푹 쉬어야지.”

“어!”

마이크를 착용하느라 어수선한 사이 작가님께 종이를 받은 예찬이 또 보기 좋게 종이를 찢어 버렸다.

“예찬아. 살살 다뤄야지.”

살짝 구박하듯 말하며 작가님이 종이를 받아 가자, 예찬의 떨리는 눈이 시우를 향했다.

형도 아는 거죠? 이 종이. 미쳤다는 거.

응. 알아. 그러니 우리는 목숨 걸고 이 게임을 방해해야 해.

둘은 눈으로 대화를 나눴다. 방송을 위해서는 모두가 원하는 장면이 나와야 하지만, 왜 굳이 우리가 그렇게까지?

“빨리하고 끝내자.”

다들 어수선하게 장난치고 있는 사이 에반은 팔짱을 끼고 제일 끝쪽에 삐딱하게 서 있었다. 얼굴에 불만과 불편함이 가득했지만, 그것이 방송에 나간다 해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진짜 이거 2분 안에 다섯 번 성공하면 내일 저희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다는 거죠?”

피디님의 큐 사인이 떨어지자, 루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피디를 보며 말을 꺼냈다.

“네. 원하는 것 다 들어드립니다.”

피디가 목소리로만 출연하자, 다들 웃고 떠들며 자연스러운 상황을 연출했다.

“자, 성공해서 우리 피디님 주머니 좀 털어 봅시다. 시우, 잘할 수 있지?”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시우는 한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다른 손으로 최대한 종이가 찢어지지 않게 팔랑거렸다.

그러곤 옆에 있는 예찬과 시선을 마주쳤다. 둘은 무언의 눈빛으로 굳은 결심을 했다. 우리 선에서 끝내자. 뒤로 넘기지 말자.

“시작!”

피디의 말과 함께 메인 작가가 타이머를 눌렀다. 시우는 재빨리 종이를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대고는 가볍게 흡입해 종이가 떨어지지 않게 주의했다.

그와 함께 다음 타자인 예찬이 시우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숙이며 시우에게로 다가왔다.

“에츄!”

시우의 재채기와 함께 종이가 팔랑거리며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서서히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다들 박장대소했고, 시우는 머쓱함에 코를 문질렀다. 무언가 시우의 고의성이 있는 것 같은데,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기에 의구심만 품은 채, 바로 게임을 이어 갔다.

“빨리. 빨리. 그럴 시간 없어.”

뒤에 서 있는 루카가 재촉하자, 시우는 아차 했다는 표정을 짓고는 홱 몸을 돌려 종이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 또 얼른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흡입해서 입술에 착 붙여야 했지만, 이번에는 푸스스, 하고 웃어 버렸다.

또다시 종이가 허공을 팔랑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30초 지났습니다.”

뒷사람들이 애가 타든 어쨌든, 시우는 크게 심호흡하며 웃음을 가다듬고 종이를 들었다. 연기자를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예찬은 아예 시우의 양쪽 어깨를 잡고 대기 준비를 완벽하게 마친 상태였다.

아, 벌써 두 번이나 해서 이번에는 마땅한 핑곗거리가 없는데. 어쩔 수 없구나.

시우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종이를 붙인 입술을 예찬 쪽으로 향했다.

“크흐흐흐.”

닿으면 얼른 몸을 돌려 종이를 챙겨야지 하고 굳게 마음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예찬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 타임. 타임. 잠시만요!!”

이미 시간은 다 흘러갔고, 웃음이 터진 예찬은 아예 주저앉아 터진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뒤에서 머리만 빼꼼히 내밀고 앞의 상황을 지켜보던 루카가 앞으로 나가면서 게임을 파투 내 버렸다.

“김시우!”

같이 웃음이 터진 안은 주저앉은 예찬의 등을 퍽퍽 치고 있었고, 현수는 손을 까딱여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우를 자신의 쪽으로 불렀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현수에게 걸어가는 시우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앞에서 시간 다 잡아먹으면…….”

한번 퍼진 웃음은 쉽게 수습되지 않았다. 분명 시우를 나무라는 그런 분위기였지만,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숙인 시우와 마주한 현수마저 웃고 말았다.

다들 주저앉거나 배를 잡고 웃는 와중에 에반만이 여전히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 있었다.

“피디님. 우리 기회 몇 번 줘요?”

그나마 빨리 웃음을 수습한 루이가 질문을 던졌다.

“세 번.”

“자, 이런 식으로 하면 곤란합니다. 다들 잘 아시겠죠? 웃겨도 웃음 참고.”

현수는 박수를 몇 번 치며 주의를 끌고는 아주 깔끔하게 이 상황을 정리했다. 현수를 시작으로 연습 게임이다, 무효다를 외치는 멤버의 행동에 피디는 손을 들어 올리곤 흔들었다.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 현수는 자신의 앞에 있는 시우를 밀어 끝으로 보내 버렸다.

“예찬이 나랑 자리 바꿔. 내가 시작한다.”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한 현수는 제일 앞자리로 가면서 저와 반대편 끝으로 가는 시우를 흘깃거리곤 시선을 돌렸다. 분명 시우를 보는 것 같았지만, 현수는 정확히 에반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세상만사 모든 것에 흥미가 없다는 듯 시큰둥하고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서 있던 에반이 지금껏 하고 있던 팔짱을 풀고 있었다.

시우는 제일 끝에 서서 빼꼼히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제 걱정 따위는 없었다. 저 얇디얇은 종이는 이곳까지 올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중간 자리에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예찬이 있었다.

어차피 인생 나만 아니면 되는 것 아닌가? 제작진과 시청자들이 원하는 장면은 앞에서 나올 것이 분명했다. 팔짱을 푼 에반과 다르게 이번엔 관객 모드인 시우가 팔짱을 꼈다.

“우와. 이거 뭐.”

자신만만하게 앞자리로 와 종이를 잡은 현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고 피디를 바라보았다. 누가 마분지를 준비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좀 안 찢어지는 기름종이 같은 거라도 주든가. 이건 크리넥스 티슈급 부드러움과 얇음을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 보기엔 A4 용지 같은 뻣뻣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런 종이는 뭐라고 부르는 것이며, 어디서 구하셨어요?

현수는 의문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스태프들을 보며 차마 종이를 입술로 가져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처음 시우와 예찬이 하는 걸 보면서 왜 저래? 하고 생각했던 자신을 한탄하고, 왜 자리를 바꿨는가에 관한 생각이 짧은 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상황도 모르고 자신의 옷깃을 잡고 빨리 시작하라고 종용하는 루이를 보며 현수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저 형 왜 저래?”

시우는 종이를 잡고 당황하는 현수를 보니 웃음이 또 터져 나올 것 같아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오히려 이 상황을 모르는 에반이 자신에게 작게 속삭이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종이.”

입고 있는 커다란 후드 티셔츠 소매가 손을 다 덮은 상태로 입을 가리고는 작게 말하는 시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에반이 상체를 살짝 숙여 시우의 눈높이에 몸을 낮추었다.

“뭐?”

“저거 종이 겁나 얇아. 미쳤어.”

시우는 슬쩍 고개를 돌려 손으로 카메라 쪽을 가린 채 에반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얇다고?”

에반은 자신이 들은 말이 정확한 건지 몰라 한 번 더 확인했다.

“응. 보기엔 튼튼해 보이지? 저거 살짝만 세게 잡아도 쫙 뜯어져. 내 전 재산을 걸고 저 종이 여기까지 안 와. 아니 못 와.”

종이가 얇고 어쩌고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금 손으로 가린 채 자신의 귀에 속살거리는 시우의 입김이 너무 간질거렸다.

할 말을 다 했는지, 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웃음만 치는 시우의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쯧. 여기까지 와야 하는 거 아니야?”

에반은 본심을 숨기지 못하고 말을 툭 내뱉었다. 둘이 속살거리는 사이 게임이 시작됐지만, 현수의 입술에서 루이에게로 옮겨지는 사이 첫 번째 종이가 찢어져 버렸다.

“왜 와. 진짜 못 온다니까. 벌써 찢어……. 으흐흐흫.”

여전히 시우는 소매에 입을 대고 중얼거리다, 현수의 손과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는 또 웃어 버렸다.

“이거 종이가 이상한 거라니까요! 와, 진짜.”

또 허망하게 기회가 날아가 버리자, 현수가 종이를 손끝으로 잡고 변명 아닌 사실을 마구 뱉어 냈다. 하지만 스태프를 비롯해 모두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종이의 실체를 아는 시우, 예찬조차 이미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신이 나 있었다.

“우리가 다 테스트했어. 가능해.”

시우의 동그란 눈이 스태프를 향했다. 어느 분들이 성공하셨어요? 님들 신이세요? 이게 가능하다고요?

“거짓말. 이거 진짜 불가능. 자. 여러분, 이거 봐요. 이 종이가 어떤 종이냐면.”

종이의 진실을 아는 예찬이 속이 터졌는지 갑자기 앞으로 나와 현수가 들고 팔랑거리는 종이를 가져왔다. 그리고 보란 듯이 앞에서 쫙 찢었다.

“야야. 예찬이가 하면 당연히 안 믿지. 네가 힘센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예찬을 팔로 툭 친 안이 나와 새 종이를 하나 집었다. 그리고 찢는 모습을 보여 주려고 이리저리 각도를 잡는 그 와중에 연약한 종이 가운데가 미세하게 찢어졌다.

“헐.”

안은 양손으로 잡았다가 두 조각 나 버릴 것 같아 얼른 한 손을 놓고 종이를 자신의 눈높이로 들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기 위해 눈앞으로 가져갔다. 얕게 숨을 쉬고 있을 뿐인데, 종이가 팔랑였다.

“콜! 그럼 나랑 시우랑 둘이서 다섯 번 주고받으면 성공한 거로 하죠.”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에반이 돌연 앞으로 나가면서 폭탄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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