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아. 진짜 맥주에 버터구이오징어 먹고 싶다.”
참 재밌지. 매번 회귀할 때마다 슬픈 일 몇 가지가 있었다.
운전을 할 수 없다. 술을 마실 수 없다. 꼬박꼬박 착실하고 성실한 학생이 되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제일 힘들었다.
멍하니 있던 시우의 입에서 자장가가 흘러나왔다. 우리 코코맘들이 자장가 듣고 싶다고 했는데.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잃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 제멋대로 라이브를 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게 소담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 것이다.
그때 불러 드릴걸. 내가 뭐라고 그걸 안 해 드렸을까? 코코맘님들은 노래를 불러 달라고 참 많이 요청하셨는데, 목을 풀지 않았다거나 잠겼다는 이유로 대충 넘겼다.
멀리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지막이 생각나는 대로 자장가를 불렀다. 한 곡이 끝나면 기억나는 다른 곡을 불렀다. 모든 가사가 다 기억나지 않았기에 허밍으로 소리만 내기도 했다.
또 잃을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 남은 무한한 시간에서 딱 한 번 가질 기회일지도 모른다.
“잘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이 피디의 말대로 자신을 걱정하고 밀어주는 태훈 형이 떠올랐다. 고생만 한 우리 태훈 형도 돈 좀 만져 봐야지. 소속 가수가 이따위라 늘 고생만 했으니까.
하지만 많은 생각 중 가장 앞서 있는 것은 두려움이다. 처음 세 번.
미치도록 인기가 얻고 싶었고, 누구보다 꿈에 부풀어 있는 시기에 겪은 일.
타인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
그리고 우연인지 어떤 것일지 모르지만 시우가 모든 욕심을 버렸을 때, 죽음으로 인한 회귀는 멈췄다. 자신의 죽음을 겪고 선택했던 평범한 대학생의 삶에서도, 그 뒤에 또 이어진 삶에서도, 그리고 지금.
시우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다. 욕심을 버리려고 노력했다. 그랬기에 그 노력을 알았기에 지옥 같은 회귀가 멈췄는지도 모른다. 회귀 날짜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이 아닌 회귀는 자정에 이루어졌다. 어디 어떤 상황에서도 정각 12시가 지나고 눈을 깜박이면 반지하 방이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인기를 욕심낸다면 회귀일까? 죽음일까?
미친 듯이 빠르게 돌아가던 두뇌가 멈췄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걸리자 모든 것이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다.
“가고 싶은 곳까지.”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시우는 파드득거리며 안고 있던 다리를 내리고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몇 걸음 떨어진 뒤쪽에 에반이 서 있었다.
“안 잤어?”
아주 작게 노래를 불렀고, 소리 없이 숙소를 나왔기에 누구를 깨웠던 것 같지는 않았다. 시우는 에반이 가까이 다가오며 내미는 컵을 받아 들었다. 미지근한 우유가 들어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을까? 이 우유는 처음부터 이렇게 미지근했을까? 아니면 아주 뜨거웠지만, 시간이 흘러 식었을까?
“가고 싶은 곳까지 가.”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에 중얼거린 말을 에반은 확실히 들은 것 같았다.
“말은 쉽지. 조금 당황스럽고 기분이 묘해.”
“내가 도와줄게.”
에반이 옆자리에 앉자 흔들의자가 느리게 움직였다. 시우는 내리고 있던 다리를 다시 올리고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진짜 내 팬이더라.”
시우는 앞을 바라본 채, 그가 건넨 우유를 마셨다. 멀리서 흐르는 강 위로 달빛이 반짝였다. 불편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 무난한 것으로 말을 돌렸다.
“팬이라고 했잖아.”
“그래서 나한테 그랬구나. 그럼 너 성덕이네. 이리 와, 한번 안아 줄까? 팬서비스 확실하게 해 줘야겠다.”
시우는 무릎에 볼을 대고 에반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자다가 나왔는지 잠옷 차림에 점퍼를 걸친 상태였다.
“성덕이지. 팬 중에 이런 모습은 나만 볼 수 있잖아.”
살짝 미소를 지은 에반과 시선이 얽히자 시우는 입술을 삐죽였다. 진짜 얼굴이 평생 까방권이네.
“잘났어, 아주. 그런데 안 자고 왜 나왔어?”
“잠이 안 와서.”
시우의 등 뒤로 팔을 두른 에반은 나긋하게 들려오는 시우의 목소리에 계속해서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 없었다.
“넌 왜 잠이 안 와? 난 지금 충분히 잠이 안 오는 상황이고.”
“불안해서.”
“웃겨. 네가 불안할 게 뭐가 있어. 난 지금 물고기 밥에다가 갑자기 이런 주목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심란하다만.”
빠져들 것 같은 눈에서 겨우 시선을 강으로 돌린 시우는 작게 한숨을 쉬며 우유를 한 모금 머금었다. 이제 들어가야겠지. 분위기가 자신이 들어가야 에반도 들어갈 것 같았다.
“그러게. 불안할 게 뭐 있겠어. 찾으면 되고, 찾으면 되고, 또 계속 찾으면 되지. 적어도 이제 누군지는 아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시우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에반의 허벅지를 툭 때리고는 일어났다.
“헛소리.”
“춥다. 어서 들어가자.”
밤이 늦을수록 떨어지는 기온에 시우는 몸을 푸르르 떨었다. 자신을 따라 일어서는 에반을 확인하고는 먼저 정원을 가로질렀다.
“뭐냐.”
갑자기 어깨가 묵직해지자 시우는 뒤돌아보았다. 방금까지 에반이 입고 있던 점퍼가 자신의 어깨에 있었다.
“어휴, 코코맘님. 유난이셔요. 나보다 너님이 아프면 더 큰일이랍니다.”
시우가 낮게 웃으면서 옷을 돌려주려 했지만, 에반은 그런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사람이 배려라는 걸 하면 좀 받아라.”
틱틱거리는 그의 말에 시우는 소리 내서 웃었다.
둘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 늦은 시간 정원에 설치된 카메라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 * *
“여기 대관령 아닌가요?”
“푸하하. 저기 양 있네. 있긴 있어.”
“네! 저희는 지금 대관령 양떼 목장에 가고 있습니다.”
“아, 무슨 소리야? 갑자기 양떼 목장이 왜 나와.”
“길도 구불구불한 게 딱 대관령 양떼 목장 가는 거지. 저 푸른 초원에 뛰노는 양들이여.”
보통 자유 시간이 많지만, 오늘은 단체 스케줄이 있었기에 멤버 모두가 모여 미니버스로 이동했다.
밤새 잠을 설친 시우는 카메라에 잘 잡히지 않는 끝 좌석 구석에 앉아 몰려오는 졸음을 쫓으려 눈을 부릅떴다. 앞에서 안과 예찬이 종알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있었지만, 세상에서 젤 무겁다는 눈꺼풀을 이길 수가 없었다.
“졸려?”
“아뇨.”
이기려 했는데, 결국 눈을 감았던가? 귓가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시우가 눈을 부릅뜨며 대답을 했다. 덕분에 평소보다 더 깊어진 쌍꺼풀에 놀란 표정을 지었던 시우의 눈꺼풀이 스르륵 내려앉는 것을 본 루카는 제 옆에 있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시우야.”
가물가물 눈꺼풀이 꼭 감기고 시우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돌아가려는 찰나, 이름을 불렀다.
“네!”
아! 어떡하지? 얘를, 진짜. 작은 머리를 파드득 들고 루카를 보는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하지만 이내 졸음을 이기지 못한 눈꺼풀이 사르륵 내려가는 것을 촬영 중인 루카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혼자 크큭거렸다.
“시우, 자니?”
루카의 촬영은 작은 부름에 몇 번 더 반응하던 시우가 결국 잠을 이기지 못하고 창에 머리를 톡 대고 눈을 감은 채로 작게 대답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동 시간이 조금 걸렸기에 더는 시우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시우의 휴대전화, SNS, 팬클럽엔 엄청난 파동이 일었다.
시작은 루카였다.
그는 그저 착실하게 자신이 오늘 해야 하는 숙제를 했을 뿐이다.
그게 방금 찍은 시우의 조는 모습이었을 뿐.
약 1분간 촬영한 영상과 함께 루카는 ‘밤에 뭐 하고 지금 자?’라는 멘트를 남겼다.
이미 현수, 루카, 안, 루이, 에반, 예찬, 시우의 팬들은 꼭 그 사람의 팬이 아니어도 수시로 그들의 SNS를 확인하고 있었다. 프로그램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 서로가 서로에 대한 정보를 흘리고 있던 것이다.
그러잖아도 정보가 한 줌도 안 되는 시우에 대한 궁금증이 폭발하는 와중에 지난밤엔 에반과 라이브를 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더군다나 에반이 직접 시우의 데뷔 때부터 팬클럽까지 가입하면서 덕질을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런데 하얗고 말랑말랑한 애가 자연 햇살의 조명을 받으면서 졸고 있는 모습이라니. 더군다나 루카가 말을 건넬 때마다 일어나려고 파드득거리며 꼬박꼬박 대답하다가 결국 잠에 푹 빠져드는 모습이 가감 없이 들어가 있었다.
살짝 흔들리는 작은 머리라든가 곱게 내려앉은 눈꺼풀. 그 아래로 드리운 촘촘하고 긴 속눈썹. 긴장을 풀고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잠든 시우는 너무 순한 어린아이 같았다.
그래도 깊게 잠들지 않았을 때는 루카의 말에 반응하려는 그 안쓰러운 모습에 다들 미소를 지으면서도 그냥 편하게 자게 내버려 두지,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안과 예찬이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주고받은 것까지 배경 음악인 양 깔려 있었다.
이미 킬링 포인트가 너무 많은 영상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또 하나의 동영상이 더 올라왔다.
루카 다음엔 에반이었다.
어두운 밤, 조명도 없는 곳. 어딘가로 나가는 에반이 찍고 있는 것은 정원 같았다. 넓은 정원을 가로지르는 것 같은 상황.
밝지 않았기에 처음엔 다들 도대체 이게 뭐지, 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론가 걸어가면서 찍은 동영상. 이내 풀벌레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자장가가 들렸다. 에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미 밖에 먼저 나와 있는 듯한 누군가가 부르는 노래. 가사를 틀리기도 하고 허밍으로 대체하기도 하는 그 자연스러운 노래를 부르는 사람에게 관심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구름에 가렸던 달이 살짝 빛을 내렸을 때,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약 2분 정도의 동영상은 결국 에반의 얼굴도, 노래를 부른 이의 얼굴도 나오지 않고 그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