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안녕하세요. ‘Journey’입니다. 벌써 여행 중반부인데요. 오늘 저희가 온 곳은 보시다시피.”
“놀이공원입니다!”
가운데 선 현수가 준비된 대로 멘트를 진행했지만, 그의 말을 끊고 안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산 넘고 물 건너 꼬불꼬불한 길로 가길래 진짜 대관령 양떼 목장 가는 줄 알았다니까요.”
“맞아! 그런데 놀이공원이래요.”
“여기서 뭘 할 거냐면요. 지금 저기 뒤에 저거 보이세요? 롤러코스터? 저거 이름이 뭐더라.”
지금까지는 뒤나 옆에서 딴짓하더라도 진행자의 말을 따랐던 멤버들이지만, 놀이공원 앞에서는 그런 것이 없었다.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어서 들어가서 놀고 싶은 생각이 가득했다.
간간이 뭉게구름이 있는 푸르른 하늘과 햇볕 아래 서 있으면 조금 더운 것 같지만, 그늘로 들어가면 곧바로 시원해지는 쾌청한 날씨까지 완벽하게 그들의 편이었다.
각기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그들의 앞에 피디가 일곱 개의 동물 머리띠를 내밀자, 현수가 그걸 받아 들었다.
“자, 게임이니 뭐니 이런 거 할 시간 없습니다. 그냥 마음에 드는 거 하세요. 여기 안이는 수달 쓰고. 예찬이, 너 옜다, 이거 북극곰, 딱이네. 그리고 에반, 너는 뭐 너네 팬덤에서 공식 흑표범이니까 뭔지 몰라도 이거 시커먼 거. 또 어디 갔냐. 루카, 이거 쓰고. 시우, 너 여기 토끼.”
눈에 보이는 대로 들고 있는 걸 하나씩 대충 건네주던 현수는 시우가 토끼 머리띠를 받지 않자, 그를 바라보았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시우의 눈은 다른 손에 있는 머리띠에 닿아 있었다.
“시우, 토끼 말고 이거?”
다른 손에 있던 것을 들어 보이자 시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게 뭐 중요해. 자, 그럼 루이 이거 토끼 쓰고, 이거 무슨 동물이냐? 모르겠다. 시우, 너 이거 하고.”
연갈색에 옅은 무늬가 들어간 머리띠를 받은 시우가 머리띠에 있는 보들보들한 귀를 만지며 작게 속삭이는 소리는 착용한 마이크를 타고 그대로 녹음되었다.
초식동물보다는 육식동물이지.
시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머리띠를 착용했다.
시우는 방송 자막을 보기 전까지 자신이 고른 것이 호랑이인 줄 알았다. 머리띠를 받아 든 시우가 배시시 웃으면서 ‘초식동물보다는 육식동물이지.’라고 중얼거리는 멘트 아래로 자막 한 줄이 달렸다.
[고양이도 육식동물입니다.]
“놀이공원에 들어오면 기본적으로 이런 걸 착용하고 그다음엔 군것질해야 합니다.”
현수가 멘트를 하든지 말든지 유독 큰 귀가 바람에 펄럭이는 코끼리 머리띠를 쓴 루카는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는 예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 왜요!”
“바꿔.”
“형, 뭘 바꿔요.”
“인간적으로 코끼리는 나랑 아닌 거 같아. 내가 북극곰 할 테니까, 바꾸자.”
“거참. 아무거나 쓰면 되지.”
시우는 별것도 아닌 것으로 투덕거리는 둘의 옆을 지나 얼른 현수 옆으로 갔다. 지난밤 잠을 설친 탓인지 저도 모르게 차 안에서 단잠을 잤다. 중간중간 다들 간식도 먹었다는데, 꿀잠 잔 자신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출출했다.
“간식 뭐 먹을까요? 오! 아이스크림 맛있겠다.”
핫도그에 솜사탕, 아이스크림. 온갖 먹을 것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아이스크림이었다.
“시우는 아이스크림?”
지갑을 열며 말하는 현수를 향해 시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뒤를 돌아보았다.
“나도 아이스크림이나 먹어야겠다. 야! 다들 뭐 먹을 거야?”
길에 늘어서 있는 간식 부스 앞에 멈춘 현수는 다들 뭐가 그리 할 것이 많은지, 천천히 걸어오는 멤버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우와, 형이 쏘는 거예요? 그럼 난 핫도그 먹을래요, 콜라도.”
“까짓거 내가 쏜다. 또 안이는?”
사람이 많은 놀이공원에서의 촬영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한국이었다면 야간 개장이 끝난 시간을 빌려 촬영할 수 있었겠지만, 이곳은 외국이었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촬영해야 했다. 최대한 촬영의 혼선을 없애기 위해 에반은 마스크를 착용했다.
카메라 감독님이 있긴 했지만, 몇 개의 셀프 캠을 멤버들이 나눠 들었다.
“아이스크림?”
시우는 자신의 위로 그림자를 만들며 말을 건네는 에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리띠가 삐뚤어져 있었기에 손을 들어 머리띠를 바로 해 주었다.
“피디님. 총 쏘는 거 하게 돈 주세요.”
“롤러코스터부터 타는 거 아니야?”
“여기 사파리 있는데 동물 보러는 안 가요?”
다들 주문한 음식을 들고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놀이공원행이라 멤버들과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생각이 다르고, 하고 싶은 것도 다르니 다들 피디를 독촉했다.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고 한 입 먹은 시우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핫도그를 바라보았다. 한 입도 먹지 않은 핫도그가 왜? 한 손엔 콜라와 다른 손에 핫도그를 든 에반이었다. 먹을 때만이라도 마스크 좀 벗지.
“핫도그부터 먹어.”
“응? 아이스크림 맛있는데?”
“너 아까 자느라고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그럼 너 먹고 남는 거 주든지.”
시우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었다. 먼저 먹고 남은 것을 달라니까 여전히 제 앞에 핫도그를 내밀고 있는 에반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알겠어. 먹는다, 먹어.”
결국 시우는 자신의 앞에 있는 핫도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맛있다는 표현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입에 든 핫도그를 다 먹어 갈 무렵 에반이 콜라를 내밀자, 그것 역시 마다하지 않고 먹었다. 원래 음식 생각이 없더라도 한번 먹기 시작하면 계속 먹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었다. 어쩌다 보니 아이스크림은 물론 에반의 핫도그까지 시우가 거의 다 먹었다.
그러면서도 앞서서 가는 멤버를 따라가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피디님. 롤러코스터요.”
“어. 지금 저쪽으로 가야지 총 쏘는 거 하는 곳인데요.”
“사파리는 오른쪽이에요.”
“다 모여.”
다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마디씩 내뱉자 결국 피디는 발걸음을 멈추고 모두를 불러모았다.
“공식 일정 다 소화하고 자유 시간 줄 테니까, 1번 롤러코스터, 2번 사파리, 그거 두 개는 예약한 거니까 일단 그것부터.”
자유 시간을 확인받고 나서야 다들 촬영에 진심으로 응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줄을 서야 했다.
안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예찬과 루카를 끌어 앞에 세워 그늘을 만들었다. 다들 동물 머리띠를 하느라 모자를 쓰지 못했기에 햇살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꺼내 풍경을 찍는 시우를 끌어와 예찬의 앞에 세웠다.
“진짜 에반 형. 형 팬 맞아요?”
아무래도 이걸 묻기 위해 끌어들인 것 같았다. 시우는 한쪽에서 현수와 이야기 중인 에반을 흘깃 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제 라이브라든지 그와 이야기를 나눈 것을 종합해 보면 정말 팬인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뭐라고 말할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거기다 솔직히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에반이 자신의 팬이라고? 그가 대놓고 코코맘을 이야기하고 직캠에 찍힌 자신의 허리 뒤에 있는 점을 말하지 않았다면 조금도 믿지 않았을 이야기였다.
그 모든 이야기를 에반의 입으로 직접 들었기에 그나마 조금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굳이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팬 맞아. 팬이 아니고서야 이런 미친 짓을 하는 걸 어떻게 이해해. 솔직히 팬이라고 해도 이해할 수 없긴 하다만.”
루카는 혀를 차며 한마디 하고 말았다. 알아도 눈감아 주고 모른 척하지만 무슨 영역 표시하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시우가 에반인지 에반이 시우인지 모를 정도로 둘에게서 같은 페로몬이 느껴졌다.
“왜요?”
알 수 없는 말에 시우는 에반 쪽을 흘깃 보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둘 다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기에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고 표현하긴 어려웠지만 느낌이 그랬다. 에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온몸이 간지러워졌다. 무엇보다 왼쪽 가슴 쪽이 간지러웠다.
부정맥에 이어 피부병인가? 해외여행을 다니다 보면 물이 좋지 않거나 환경적인 것으로 피부가 건조하거나 그런 트러블은 충분히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페로몬.”
시우가 에반에게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단 한마디로 예찬이 상황을 정리해 버렸다. 하지만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시우는 그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페로몬이라 말한 예찬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그리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에반이 어디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그러고는 여전히 자신들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서 있는 시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쳤어?”
갑자기 옆에 있던 안이 한마디 했지만, 시우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
눈만 말똥거리던 시우는 페로몬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자신의 팔뚝에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과장되게 킁킁거리며 다른 것이 있는지 찾고 싶었지만, 역시나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섬유유연제 냄새와 아침에 뿌린 향수 냄새가 전부였다.
“너 진짜 에반 형한테 죽었다.”
방금까지 시우의 옆에 있던 안은 조금 뒤로 물러난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모르는 알파, 오메가 세상에선 페로몬이 그렇게 중요한 거야?”
주위에 알파, 오메가가 있어야 알지. 이미 안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으로 봐서는 아마도 예찬의 페로몬이 강하게 나는 것 같았다.
“사람 참 난감하게 하는 거긴 하죠. 죽을 때 죽더라도 에반 형 어떻게 나오는지 볼 순 있겠다.”
어깨만 잡고 있던 놈이 두 팔을 벌려 콱 끌어안자, 시우는 저도 모르게 큽, 하고 숨을 들이켰다. 운동을 폼으로 한 것은 아닌지 단단한 벽에 부딪힌 것 같았다. 키도 큰 놈이라 절로 얼굴이 그의 어깨에 묻혔다.
“난 모르겠다. 너 살고 싶으면 카메라 앞에 꼭 서 있어. 설마 카메라 앞에서 널 죽이기야 하겠니.”
멀찍이 있던 안은 결국 다른 곳으로 가 버렸고, 모든 걸 지켜본 루카는 아직 이 상황을 모르고 여전히 현수와 대화 중인 에반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