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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26화 (26/187)

26화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에반이 냄새가 나서 네가 네 냄새 묻혔다는 거잖아.”

예찬에게 푹 안겨 있을 때도 그렇고 자신의 팔에 코를 묻고 아무리 킁킁대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지만, 지금 상황 돌아가는 걸 봤을 때 이것이 중요한 것 같았다.

“그렇죠.”

“야! 나는 내 건데 왜 너랑 에반이가 그래. 거기다 나는 너희들이 이렇게 장난치고 놀아도 모른다는 거잖아.”

웬만해선 화를 내는 일도 없고 좋은 게 좋은 것이며, 두루두루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적당히 사는 걸 지향하는 시우였다. 하지만 이번 건 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예찬은 입을 다물었다. 그랬다. 그냥 늘 에반의 페로몬을 묻히고 다니는 시우를 보고 에반을 골려 줄 생각을 한 것이지, 그들의 장난에 시우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아! 형, 미안. 그것까지는 생각 못 했어.”

“앞으로 이런 짓 하지 마. 나 모르는 상태에서 너희들끼리 그러지 말라고. 알겠어? 그나저나 이거 냄새 어떻게 없애? 탈취제 뿌리면 되는 거 맞아?”

다시 한번 팔뚝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아 보았지만, 시우가 느낄 수 있는 향은 지금껏 계속 맡은 향이 전부였다.

“그렇긴 한데. 형, 진짜 내 생각이 짧았어요. 절대 절대 안 할게요. 미안해요.”

거듭 사과하는 예찬이었기에 시우는 대충 손을 들어 흔들고는 괜찮다는 뜻을 표했다. 사람 많은 곳에서 크게 화내기도 그렇고, 앞으로 그러지 않는다는 말까지 들었기에 적당히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그건 그렇고 지금 탈취제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쩔 수 없지 뭐. 이참에 에반이한테도 이런 행동 하지 말라고 하면 되고. 그런데 무슨 향인데?”

당황하고 미안한 표정으로 그 큰 덩치를 숙이고 눈꼬리까지 아래로 늘어뜨린 예찬을 보자니 더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이들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나는 에반의 페로몬 향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저요? 전…….”

“아니. 에반.”

자신의 페로몬을 묻는 줄 알고 대답하려던 예찬은 제 말을 끊고 에반에 관해서만 묻는 시우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에반 형은 뭐, 그 뭐라고 해야 하지? 일단 박하 향은 아닌데, 시원하고 싸하고 뭐 그런 향? 페로몬 향이라는 게 딱 무슨 향이라고 단정 짓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대부분 가장 근접한 향으로 말해요. 딸기 향이라고 하면 다들 비슷하게 알잖아요. 그런데 사실 딸기마다 냄새가 좀 다르잖아요. 더 달콤한 것도 있고 향이 연한 것도 있고 그런 것처럼요. 거기다 페로몬이라는 게 기분이나 감정에도 영향을 받아요.”

“진짜 페로몬에서 감정까지 느낄 수 있다고?”

시우는 줄이 움직이는 걸 따라 걸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껏 관심이 없던 세계였다. 듣고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대충은요.”

“편하겠네.”

언제 예찬에게 경고를 했냐는 듯 태연해진 시우의 시선이 다시 에반에게 향했다. 만약에 자신이 그의 페로몬을 맡을 수 있다면 그를 아는 것이 조금 더 편했을까? 적어도 그가 자신에게 어떤 감정인지 직접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는 거 아닌가.

“뭐가요?”

“적어도 상대의 감정이나 그런 걸 페로몬으로 알 수 있다며. 이 사람이 나에게 화가 났는지, 날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그런 것들 말이야.”

“에이, 그렇긴 하지만 다들 페로몬 조절해서 티가 안 나죠. 내 감정이 나가는 건데, 그걸 흘리고 다니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방금 내가 형에게 페로몬 씌우고 그런 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아주 가까운 사이에서나 하는 거니까. 형이 베타니까 아무 문제가 없는 거죠. 보세요. 안이 바로 정색하고 다른 곳에 가 버렸잖아요.”

“뭐야. 그런데 나한테 에반의 페로몬 느껴진다며. 그럼 그 감정도 넌 알겠네?”

갑자기 깊게 파고드는 시우의 질문에 애써 웃고 있는 예찬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장난기 가득한 페로몬을 시우에게 씌운 건 어떻게든 용서받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페로몬의 뜻을 알려 줬다가는 정말 죽을 것 같았다.

“딱히 어떤 감정이 담긴 건 아니에요. 옆에 있어서 충분히 묻을 수 있는 그런 거예요. 음, 다르게 말하면 향수 뿌린 거 같은……. 아, 어렵다.”

진득한 소유욕이 가득한 페로몬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페로몬이라는 건 직접 느껴 봐야 아는 것이지 말로 설명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난감해하는 예찬을 보고 시우는 더 묻지 않았다. 어쨌거나 페로몬은 조절할 수 있는 것인데, 자신에게 에반의 페로몬 냄새가 난다는 건 그가 의도적으로 묻힌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에반은 현수와 잡다한 대화를 나누다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시우의 사진과 동영상을 올리기 시작한 뒤 저도 모르게 수시로 들어가서 확인하는 버릇이 생긴 것이었다. 자신에게 악플이 달리는 건 아무렇지 않았지만, 시우에 관한 건 늘 신경 쓰였다.

이것저것 해시 태그를 누르고 돌아다니던 에반이 한 SNS에 멈췄다.

[사진][사진][사진][사진]

#예찬 #촬영 #에반 #안 #루카 여행 중 만난 연예인. 근데 내가 좀 더 잘난 듯 ㅋㅋ 그나저나 #예찬이 누구랑 붙어 있는데 왜 둘이 같은 #페로몬 향 #풀 냄새? 이거 누구 거임?

둘 중 하나가 #페로몬 샤워 시켰나?

웃기네 지들끼리 다 해 처먹는 거냐?

#알파무리 #그들이사는세상 #쳇 #더러워서 #엄마한테전화해야지. #나도알파.

엄지를 몇 번 움직이자 사진이 옆으로 움직였다. 예찬이 시우의 어깨를 잡은 사진에 이어 예찬이 시우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둘이 다정하게 얼굴을 마주한 채 이야기를 나누는 사진으로 이어졌다.

사진보다 에반의 표정을 차갑게 만든 것은 내용이었다. 풀 냄새? 같은 페로몬 향. 이런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에반은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떼고 시우와 예찬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런 사진과 이런 내용이 돌아다니는 걸 모르는 그들은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키가 작은 시우가 예찬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젖히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생겼다. 예찬의 키로 인해 자연스럽게 생긴 그림자가 아닌, 예찬이 부채를 펄럭거리더니 자신의 머리 위로 들어 시우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에반은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신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미친 듯이 피가 솟구치는 것 같은 충동을 억눌렀다.

자신이 선을 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리고 예찬은 지금 자신을 자극했다. 시우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던 예찬이 돌아봤고, 그와 시선이 얽혔지만 에반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지금 다가가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많은 사람 중에서 누가 이 SNS를 올렸는지 찾는다는 건 말도 되지 않았다. 찾는다고 해도 무얼 할 수 있을까?

글을 올린 이는 여전히 이곳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지금도 몰래 자신들을 찍고 있을 테지.

방금까지 예찬과 같은 페로몬 향이 나던 시우의 향이 바뀐다면 오히려 더 일을 크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뭐 해? 안 가?”

놀이기구가 한 타임 돌고 왔는지 사람들이 움직였고, 에반은 자신을 툭 치는 손길에 몸을 돌렸다. 잠시 그들을 보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답답하다. 말을 할 수도 없다. 언제까지 이런 시간이 이어질지 모른다는 것에 에반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내뱉었다.

남들보다 훨씬 긴 시간을 살고도 깨닫고 배운 것이 없는 것 같다. 기다림과 참을성만큼은 뛰어나다고 여겼는데, 상상했던 것이 현실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천천히 한 걸음씩 놀라지 않게. 타는 속을 삭이는 에반의 주먹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셀프 캠 들고 탈 수 있겠어? 놀이기구 잘 타는 사람 손들어 봐.”

시우는 흩어져 있던 멤버를 모으고 확인하는 피디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시우?”

“네. 저 놀이기구 타는 거 좋아해요.”

“놓치면 대형 사고야.”

머리띠까지 스태프에게 넘기는 상황이라 셀프 캠을 들고 타겠다는 시우와 예찬, 현수에게 피디는 몇 번이나 당부했다.

에반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우를 지켜보았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이 즐겁다는 듯 방싯방싯 웃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페로몬을 온몸에 두른 그는 해맑았다.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뻗지는 않았지만, 그는 타인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것엔 익숙했다. 친해진 멤버들이 머리를 만지고 장난스럽게 끌어안아도 빼는 법이 없었다. 사람 손에 길든 고양이 같았다. 먼저 다가가지는 않아도 다가오는 건 마다하지 않는 그런 고양이.

“코코. 나랑 같이 타.”

뒤로 빠져 있던 에반은 단번에 그와의 거리를 좁히고 옆으로 다가갔다. 젠장. 괜찮을 줄 알았는데, 충분히 이해하고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생각보다 훨씬 더 짜증 나는 상황이었다.

“응? 에반이는 셀프 캠 안 챙겨? 놀이기구 싫어해?”

예찬은 에반이 다가오는 걸 느끼자마자 얼른 현수의 뒤로 도망갔다. 카메라 앞에서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이렇게까지 가까이 왔으니 에반이 아는 건 시간문제였다.

“무서운데 손잡아 줄 수 있어?”

롤러코스터가 무섭긴 무슨, 스카이다이빙도 좋다고 뛰어내리던 에반이었다.

“진짜? 네가 무서운 것도 있어? 이리 와. 내가 손 꼭 잡아 줄게.”

한 손으로 셀프 캠을 들고 다른 손으로 시우는 에반의 손을 먼저 잡았다. 잡을 때마다 느끼지만 참 크고 따뜻한 손이었다. 저 멀리 자신들이 탈 롤러코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떨려?”

롤러코스터의 그 짜릿함을 즐기는 시우의 머릿속에서는 조금 전 예찬과 나눴던 페로몬 이야기가 완전히 잊혔다. 느낄 수도 없는 그런 것은 시우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에반을 보면 단단히 한마디 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곳이 카메라 앞은 아니었다.

“응.”

시우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이 무서워서 떨리냐고 물었겠지만, 에반은 긍정의 대답을 했다. 시우가 자신의 손을 먼저 잡았다는 사실에 떨렸으니까. 태연하게 가장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의 페로몬을 뒤집어쓰고 있는 그를 보고도 좋았다.

손가락을 움직여 작고 가는 그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웠다. 살짝 자신을 보는 듯했지만, 시우는 어떻게 손을 잡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란히 옆자리에 앉은 에반은 시우가 들고 있는 셀프 캠을 받아 들었다. 무서운데 잘 들 수 있겠냐고, 위험하다고 자신이 계속 들겠다고 했지만 에반은 그저 사람 좋은 미소만 지었다.

“진짜 괜찮겠어?”

“걱정하지 마.”

둘의 모습이 잘 나오게 셀프 캠을 들고 다른 손으로 시우의 손을 잡았다. 철컥거리는 소리, 빠른 속도가 더해진 롤러코스터는 세상 모든 것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출발하는 순간부터 기분 좋게 올라간 시우의 입꼬리는 내려오지 않았다. 빠른 속도에 신이 날 때마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큰 소리로 웃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에반은 시우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에반의 시선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셀프 캠은 환하게 웃으며 스릴을 즐기는 그를 가득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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