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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27화 (27/187)

27화

“으어. 나 죽어. 나 못 해. 못 가.”

롤러코스터에서 내리자마자 간이 의자에 누워 손을 절레절레 흔드는 루카를 보면서도 예찬은 계속해서 에반을 흘깃거렸다. 그가 자신의 장난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는데, 아무렇지 않은 그를 보니 더 불안했다.

시우와 손을 잡고 다녔고, 바로 옆자리에서 롤러코스터를 탔는데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되었다.

에반은 이제 괜찮지? 라는 말을 하며 꼭 잡고 있던 손을 놓는 시우를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무섭게도 시우에게 씌워 놓은 자신의 페로몬은 그대로였다. 차라리 둘이 롤러코스터를 타고 붙어 있는 동안 바뀌어 있다면 마음이 편했을 것 같다. 현재 에반은 이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루카 형. 못 타겠다고 난리 치더니 그래도 재밌게 탔잖아요.”

“예찬아. 나 좀 업어라.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진짜 고소공포증? 그런 거 있다더니 사실이었어요?”

드러누운 루카의 앞에서 알짱거리던 루이는 결국 예찬의 등에 업히는 루카를 보고 큰 소리로 웃었다.

“몰랐어? 나 우리 팀 번지 뛰러 갔을 때, 혼자 못 뛰었잖아.”

“재밌었어?”

다들 각자 할 말을 하느라 오디오가 맞물렸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시우는 벗어 놨던 호랑이 머리띠를 야무지게 착용했다.

“사파리 5인용 차량 두 대 예약했으니까 두 팀으로 나눠서 탈 거야. 안전 동영상부터 먼저 보고.”

역시나 이리저리 흩어지는 멤버를 다음 촬영지로 몰아가는 것은 피디의 몫이었다.

사파리 투어 하러 가는 길, 시우는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는 에반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잠시 롤러코스터를 타느라 잊었던 것이 떠올랐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응?”

시우는 허리를 더듬어 차고 있던 마이크를 껐다. 그의 행동을 알아챘는지, 에반 역시 자신의 허리 쪽을 만지고 있었다.

“너 나한테 잘못한 거 있다며.”

“…….”

“혹시 지금 너 화났어?”

화난 것은 시우일 텐데, 반대로 자신에게 화가 났냐고 묻는 시우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맞지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수도 없었다. 에반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침묵이었다. 사과해야 하는 건 알지만,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예찬이가 다 말했어. 너 지금까지 계속 나한테 네 페로몬 씌웠다며. 그리고 지금은 예찬이가 씌워 놓은 것 같고. 너희끼리 제멋대로 페로몬 묻혀 놔도 모르는 나 바보 만드는 거 재밌었어?”

사람들을 따라 걸으며 말을 건네는 시우의 억양에는 큰 높낮이가 없었다. 걸음이 점차 느려졌고, 어느새 둘은 앞서가는 사람들과 멀어졌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한 음절 한 음절 그가 꺼내는 모든 음절이 에반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시우는 지금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그는 제게 실망했고 속이 상했으며 울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복잡한 감정은 담담한 말투와 태연한 표정에 완전히 몸을 숨기고 있었다.

“페로몬 따위 지워 버리고 싶은데, 지금 탈취제가 없대. 꼼짝없이 난 하루를 이러고 다녀야 해. 너희들은 재밌니? 이런 거 굉장히 예의 없는 어린아이들 장난 같아.”

예찬과 이야기를 할 때는 적당히 부드럽게 조절해서 이런 장난을 하지 말아 달라는 것으로 쉽게 마무리를 지었다. 예찬은 정중하게 사과했고, 옆에서 대화를 듣던 루카 역시 그러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 그렇게 그들에게 사과를 듣고 속상했던 감정을 툭 털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에반에게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올라오는 감정에 시우는 바닥을 보았다. 짓궂은 장난이니까 앞으로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사과를 들으면 끝날 일이다.

“코코.”

자신을 부르는 에반의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사과해. 그리고 앞으로 하지 않는다고 말해. 그럼 이해할게.”

앞서가는 사람들과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졌지만, 둘의 발걸음은 빨라지지 않았다.

“왜 울어?”

그에게 질문과 동시에 원하는 대답을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엉뚱한 말에 시우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안 울었다. 울지 않았다. 울고 싶지만, 눈물이 떨어질 것 같지만 참고 있었다.

왜 이런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속이 상하다. 불쾌했다. 이 감정이 옳은 감정인데 왜 슬플까?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울어. 너한테 화내는 중이잖아. 그래서 사과 안 할 거야?”

“미안해.”

에반의 사과를 들음과 동시에 시우는 지금껏 느리게 걷고 있던 발걸음을 멈췄다. 왼쪽 가슴이 콱 막혔다. 이런 아픔은 처음이었다. 멈춰 선 시우는 두 손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을 누르며 천천히 몸을 낮춰 주저앉았다.

이럴 일이 아닌데,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몸을 웅크리게 만들던 고통은 사라졌다. 끔찍한 고통은 사라졌지만 시렸다. 아팠다. 가슴을 누군가가 쥐어뜯는 것 같았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자신이 주저앉음과 동시에 몸을 낮춘 에반이 바로 앞에 있었다.

“이거 뭐야.”

숨을 몰아쉬며, 시우는 중얼거렸다. 이게 내 감정일까? 타인의 감정일까? 이런 복잡하고 이상한 감정은.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고통과 슬픔, 기쁨, 억울함. 자신이 아는 모든 감정이 마구 날뛰었다.

“코코.”

자신의 팔뚝을 잡는 손. 그리고 자신을 부르는 에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

사라졌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던 눈물까지 언제 그랬냐는 듯 멈췄다.

시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에반이 보였다.

시우는 얼른 소매를 끌어 엉망일 얼굴을 문질렀다. 자신의 팔을 잡은 그의 손을 슬쩍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

계속 자신을 보려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시우는 사선으로 고개를 내렸다.

“어쨌거나 앞으로 페로몬으로 장난치고 그러는 거 하지 마. 예찬이도 루카 형도 그러지 않기로 했고, 현수 형한테도 전한다고 했어.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하면 눈에 뭐 들어가서 그랬다고 해.”

시우는 할 말이 끝났다는 걸 표현하려 지금껏 끄고 있던 마이크를 다시 켰다.

“코코.”

“가끔 이래. 걱정할 거 아니야. 어서 가자. 우리 늦었어.”

에반은 종종거리며 가 버리는 시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기에 그의 턱선이 도드라졌다. 자신이 여기 멈춰 있는 시간만큼 시우는 멀어졌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숨을 가다듬는지 작은 어깨가 올라갔다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에반은 한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촬영은 이제 끝물이다.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그의 옆에 친구라는 이름으로 있을 수 있을까? 과연 그를 자신의 옆까지 끌어올려도 될까? 방금 자신에게 사과하라고 단호하게 말하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시우는 지금껏 자신이 한 행동을 짓궂은 알파들의 장난으로 여기고 사과를 원했다. 만약 모든 사실을 다 알았을 때, 그가 하는 결정을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자신과 같은 결정을 해 주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만약 그가 지금처럼 저를 등지고 걸어간다면 그걸 끝까지 볼 수 있을까?

한참을 앞서 걷던 시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자신을 찾는지 두리번거리던 그가 뒤돌아섰다. 방금 운 걸 숨길 순 없었다. 발개진 눈가와 코끝이 한눈에 들어왔다.

“빨리 와.”

방금 있었던 일은 모두 잊었는지, 그는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려 아래위로 마구 흔들고 있었다. 에반은 짧게 숨을 끊어 쉬고는 달렸다. 자신을 기다리고 서 있는 시우에게로 거침없이 뛰었다.

그리고 그 앞에 도착했을 때 시우를 꽉 끌어안았다.

“안 할게. 네가 싫어하는 그게 뭐가 됐든 안 할 테니까 화내지 마. 화내는 거 진짜 무섭네.”

“아오, 힘센 거 나한테 자랑하냐? 늦었어. 이따가 곰 먹이 주는 것도 한다는데, 혹시 그것도 무서워?”

시우는 에반의 품에 안긴 채,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들어 그의 등을 몇 번 툭툭 쳤다.

“그만 놓아주지 그래?”

처음엔 장난이지 싶어서 가만히 있었지만 끌어안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시우는 결국 한마디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놓아주자 손으로 그를 툭 밀었다.

“동물도 무서워. 그러니까 네가 해.”

에반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며 시우의 보폭에 맞추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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