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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36화 (36/187)

36화

시우는 눈을 껌벅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에반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치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등석 가운데 좌석에 나란히 앉았고, 친절한 승무원들의 도움으로 아주 편안한 비행이었다.

식사도 맛있었고, 계속해서 가지라는 에반의 카메라에 찍힌 자신의 모습도 원 없이 감상했다. 언제 그런 걸 다 찍었는지, 놀라서 쳐다봤더니 그는 그저 웃었다.

오히려 홈마보다 더 잘 찍지 않았냐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밤 비행의 장점대로 숙면도 취했다.

“아……. 집에 가서 편하게 자고 싶다.”

도롱거리면서 그렇게 단잠을 자고 일어나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시우는 뻐근한 목을 천천히 돌렸다. 목, 어깨, 손가락, 손목을 느리게 움직이면서 잠든 몸을 깨운 시우는 두 팔을 머리 위로 쭉 뻗고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더 자면 깨우려고 했는데, 혼자 잘 일어나네.”

바로 옆에서 들리는 에반의 말에 시우는 피식 웃었다. 사람 챙기는 걸 어찌나 좋아하는지. 책임감도 강하고 상황 파악 능력도 뛰어나고 임기응변까지. 그러니까 아마도 그런 엄청난 그룹의 리더로서 큰 문제 없이 잘 지내 왔을 것이다.

“혼자서도 잘해요, 가 내 신조야.”

“가끔은 옆 사람에게 부탁하고 기대도 되잖아.”

“혼자 할 수 있는 걸 왜 굳이 그래? 여러 사람 피곤하게. 우리 이제 공항에서 나가면 보기 힘들겠다. 언제 볼 수나 있으려나?”

착륙을 알리는 기장의 안내에 시우는 지금껏 풀고 있던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에반의 시선이 이상해 시우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전벨트.”

몇 초간 이어지는 침묵의 시간을 깬 건 시우의 목소리였다.

“목소리 듣고 싶으면 전화하고, 보고 싶으면 만나러 가도 되긴 해?”

그런 말을 왜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심각하게 해? 시우는 피식 웃으며 언제든 원할 때 전화하라고 대답했다. 처음엔 몇 번 할지 모르겠지만, 서로 바빠지면서 연락이 뜸해질 것이 뻔했다. 거기다 무슨 연락을 물어보고 해? 서로 연락처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농담 아닌데.”

시우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에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무슨 연락하고 안 하고 그런 걸 가지고 농담해. 연락하면 당연히 받을 거고, 만나고 싶으면 시간이 맞을 때 만나는 거지.”

“네가 한 말 지켜.”

“아. 네, 네. 그럴게요.”

시우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미 알고 있다. 오늘 공항에서 헤어진 이후 에반을 다시 만나는 날은 아마도 첫 방이 나가는 날일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는 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활주로를 타고 천천히 운행하던 비행기가 멈추고 안전 표시등이 꺼지자 시우는 백팩에 짐들을 정리해 넣었다. 바쁜 일도 없는데, 굳이 서둘러서 사람들과 뒤섞이기 싫었다.

에반 역시 같은 생각인지 서두르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꺼내 전원을 켜자 바로 전화가 울렸다.

“어. 형.”

매니저라고 일컫기는 그렇지만, 그래도 회사에서 이런저런 많은 일을 해 주는 진욱 형이었다.

“야, 너 어디냐? 나왔냐?”

“아뇨. 저 사람들 좀 빠지면 나가려고요. 차 공항 주차장에 있어서 혼자 가도 되는데, 대표님이 저 데리러 공항 가랬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시끄러워요? 형 목소리 잘 안 들려요.”

시우는 에반이 준비를 끝낸 것을 보고는 백팩을 한쪽 어깨에 걸쳤다.

“일단 나오지 마. 거기 있어.”

“에? 여기 있으라고요? 왜?”

천천히 걷던 시우는 다급한 형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에반을 보았다. 갑작스럽게 비행기 시간을 바꿨는데도 그의 팬들이 몰린 것 같았다. 그러면 에반과 떨어져 나가면 되지 않을까?

눈이 마주치자 에반은 시우의 후드 티셔츠의 후드를 끌어 머리에 씌웠다. 그리고 포장도 뜯지 않은 새 마스크를 제게 내밀었다.

“내가 좀 받을게.”

그리고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그에게 통화 중이던 휴대전화를 넘기고 군말 없이 마스크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에반입니다.”

갑자기 왜 그가 전화를 달라고 했는지 감이 오지 않았기에 느리게 발을 맞춰 걷는 시우의 시선이 에반에게 닿아 있었다.

“지금 저희 쪽 사람들이 나왔을 텐데, 그쪽에 같이 계시죠. 같이 휩쓸릴 거 같습니다.”

나? 내가? 아니야. 난 혼자 뒤에 조용히 가고 싶어. 네가 먼저 가.

눈을 동그랗게 뜬 시우는 빠르게 손짓을 하면서 같이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코코. 네가 아직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데, 너도 이제 이런 일에 익숙해져야 해. 마스크부터 바로 쓰고. 답답해도 고개는 약간 숙이고.”

통화를 끝낸 에반은 보란 듯이 캡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완벽하게 착용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의 눈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그가 자신보다 키가 컸기에 바로 옆에서 올려다보아서 보이는 것이지, 멀리서 본다면 얼굴을 거의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캐리어를 찾는 것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자신들을 흘깃거리는 시선이 있긴 했지만 그런 건 의식조차 되지 않았다.

시우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출국장으로 향하는 문이 무섭게 느껴졌다. 아직 거리가 있음에도 밖에서 일어난 소란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에반아. 너 먼저 나가면 안 돼? 너 가고 조용해지면 나 나갈게.”

자동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선 시우는 쓰고 있는 후드를 만졌다.

“뒤에 딱 붙어서 따라와. 어떤 소리가 들려도 반응하지 말고, 그냥 바닥만 보고 내 뒤만 따라와. 혹시 누가 옷을 잡거나 건드려도 멈추면 안 돼. 잘 따라와.”

고민하도록 내버려 뒀다간 시간만 흘러갈 것이 뻔했기에 에반은 시우의 마스크를 만져 주고 후드를 쓴 머리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 * *

진욱은 당황스러운 상황에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최근 시우의 인기가 많아진 건 기획사 측에서도 알고 있다. ‘Journey’ 측에서 미리 손을 써 놔서 뉴스에 뜨진 않았지만, 시우는 알음알음 퍼져 나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우를 섭외하고 싶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혼자서 여행도 잘 다니는 애를 굳이 데리고 오라는 말에 진욱은 생각 없이 나왔다. 그냥 만나서 데리고 오면 되는 건데.

분위기상 이곳에 있는 대부분이 에반을 보러 온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시우도 지금 같이 나오는 길이었다.

“김시우 씨 타고 갈 차는 어디 있습니까?”

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에반과 통화한 진욱은 조심스럽게 에반 측 사람들로 보이는 이들에게 다가가야 했다. 혼자 덜렁 온 자신과 다르게, 잘나가는 연예인 한 명을 데리러 오기 위해서 네 명의 경호원과 매니저 한 명이 나와 있었다.

“공영 주차장.”

“하. 차를 거기 세우시면.”

진욱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질문을 하고는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숨기지도 않고 머리를 쓸어 넘기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쪽 기획사는 모니터링 안 합니까? 지금 난리 난 거 몰라요?”

사람이 좋게 말하면 되지, 이게 그렇게 짜증 내면서 말할 일인가를 떠올리던 진욱은 이미 흥분해서 몰려 있는 사람들을 보니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말 그대로 휩쓸려 버리면 시우를 찾지도 못할 것 같았다. 이 상황에 이 팀이 에반만 데리고 싹 빠져 버린다는 생각을 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일단 우리 차 타고 나갑시다. 애먼 기획사 때문에 우리 애 다치면 일 더 커지는 거 알긴 하죠?”

결국 혼자 말하고 결정해 버리는 남자를 보면서도 진욱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을 경험해 봤어야 알지. 거기다 회사로 며칠 사이 섭외 전화가 좀 오긴 했지만, 모든 것은 시우가 돌아온 후 그와 상의하고 결정하려는 것이 기획사 입장이었다.

* * *

두어 걸음 앞서간 에반이 자동문에 가까워지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플래시 세례와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이 들렸다.

“으아.”

TV에서나 보던 장면이 자신의 일이 될 줄이야. 그 압도적인 기운에 시우는 손을 올려 입을 가렸다.

“코코. 정신 차리고 잘 붙어.”

에반이 나감과 동시에 그의 양옆으로 경호원이 붙었고 자연스럽게 그들은 시우까지 커버했다. 소란스러움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 눈을 번쩍이게 만드는 플래시.

뒤처지지 말고 잘 따라가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반이 시킨 대로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기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의 넓은 등과 파란 재킷의 끝부분뿐이었다.

“허억.”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백팩에 달려 있던 끈을 누군가가 잡아당겼고, 시우의 몸이 그쪽으로 홱 돌아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다.

엄청난 환호성과 함께 얼떨결에 고개를 든 시우의 눈엔 수많은 카메라와 휴대전화가 들어왔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카메라와 휴대전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눈앞에 검은 점들이 무수하게 생겨났다.

가방을 잡아당기는 힘이 세지고 자신을 향해 뻗는 손 중 하나가 후드를 확 잡아당겼다.

모든 사고 회로가 멈춘 시우를 끌어낸 것은 에반이었다. 갑자기 환호성이 터진다는 건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리는 것이다. 살짝 몸을 돌린 에반은 바로 시우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의 어깨를 낚아채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 상황에도 후드를 잡고 있는 손 때문에 시우의 입에서 컥― 하는 숨 막히는 소리가 나왔다.

한 팔로 어깨를 끌어안고 그대로 걸어가려던 에반은 결국 몸을 돌려 시우를 끌어안으며 그의 후드를 세게 잡아당겼다.

“고개 들지 마. 그냥 걸어.”

머뭇거릴수록 혼란만 생기는 일이다. 에반은 시우의 어깨를 감싼 손을 풀지 않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시우는 자신이 스스로 걷는 것인지 끌려가는 것인지 아니면 떠밀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만나기로 한 진욱 형을 찾을 겨를도 없었다. 에반이 통화로 이쪽 팀과 같이 있으라고 했으니 어딘가 있을 것은 분명했다.

차가운 바람이 느껴지는 것도 잠시 시우는 앞에 있는 차로 떠밀려 들어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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