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문을 닫고 들어온 에반을 보곤 시우는 보란 듯이 입고 온 청바지를 벗었다. 방금 숍에서 화해하기로 한 거 아닌가? 왜 자신을 향해 순간순간 날을 세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여기서 뭘 더 어떻게 조심한단 말인가? 예찬이가 남도 아니고, 자신은 오메가도 아니었다.
아니 설사 자신이 오메가라고 해도 에반이 자신에게 이렇게 할 명분이 없었다. 막말로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열흘 정도 같이 프로그램 촬영한 사이, 딱 그 정도 사이였다.
솔직히 무언가 간질간질하고 이상한 그런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같지만, 그런 감정이나 생각 따위는 옆으로 밀어 버렸다.
누가 보든 말든 청바지를 벗어 놓고 준비된 바지에 다리를 꿰어 넣었다. 연예인, 가수 이런 직업을 가지고 살면서 옷 갈아입는 것으로 내외하는 건 말도 안 되었다. 물론 이곳에 여자분이 계셨다면 시우도 행거 뒤쪽으로 가서 조심해서 입었겠지만, 지금은 내외할 사람이 없었다.
“예찬아. 끝나고 밥 먹자고?”
시우는 에반을 보고 있는 예찬을 불렀다.
“아, 네. 형.”
방금까지 생글거리던 예찬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있는 걸 보는 순간 시우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페로몬이었다. 자신은 느끼지 못하지만 에반과 예찬의 사이에 그 미묘한 것이 오고 갈지도 모른다.
바지를 잘 정리해서 입은 시우는 짧은 한숨을 쉬고 여전히 문 앞에 서 있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예찬이 너 시간 되면 밥 먹고 2차로 술 어때?”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초록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이 끝났을 때, 그의 표정은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데 형.”
머뭇거리는 예찬의 손을 잡아당겨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제 이름이 붙어 있는 재킷을 집어 들었다.
“나 옷 다 갈아입었어. 에반이 옷 갈아입게 비켜 주자. 쟨 남 앞에서 옷 갈아입는 거 싫어하는 거 같으니까 우리가 피해 줘야지.”
시우는 예찬의 손을 놓지 않고 앞장섰다. 그리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옆을 지나쳐 대기실을 벗어났다.
밖으로 나와 대기실 문을 닫은 시우는 그제야 꼭 잡고 있던 예찬의 손을 놓았다.
“형, 괜찮아요?”
시우는 예찬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몰랐다.
“내가 뭘?”
촬영장으로 향하며 파르르 떨리고 있는 두 손을 맞잡았다. 손끝이 시렸다. 본래 체열이 많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가을 초입이었고, 조명과 많은 사람의 열기로 달아오른 세트장 안엔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다.
춥다. 믿을 수 없었지만, 시우가 가장 먼저 느낀 기본적인 감각은 추위였다. 시리도록 추웠다. 한겨울 허허벌판에 외투 없이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당황스러움에 두 팔로 상체를 감싸고 팔뚝을 쓸자 이상한 감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그날도 그랬다. 놀이공원에서 에반과 트러블이 있던 그때. 분명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인데, 마치 제 감정이 아닌 것 같았다.
방금의 이 추위는 정말 자신이 느낀 추위일까?
혼란스러운 감각에 빠져 있을 새도 없이 촬영이 시작됐다.
크로마키 앞에서의 촬영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일곱 명을 모아 놓고 다양하게 사진을 찍었지만, 다들 현직 그룹 아이돌이었기에 그런 일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시우 형. 누가 보면 그룹 활동 하는 줄 알겠어요.”
피디와 촬영 감독이 딱히 요구하는 포즈는 없었다. 하지만 대충 크로마키 앞에서 단체로 찍는 사진의 포즈는 한정적일 수밖에. 그리고 시우는 그들과 위화감 없이 부드럽게 잘 어울렸다.
바로 옆에서 자신과 등을 대고 있던 루이의 말에 시우는 자본주의 미소를 지었다. 그룹 활동 너보다 길게 했을걸. 그룹으로 세 번에 연습생까지 계산하면 최소 20년 이상이니까.
다행 중 불행인지 불행 중 다행인지 키와 체격 차이 때문에 시우의 주위에 붙어 있는 사람은 루이와 안이다.
“몰랐어? 시우 형. 지금 인생 2회 차잖아.”
“아! 인정, 인정. 진짜 시우. 최소 2회 차다.”
갑자기 시우의 인생 2회 차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예찬이 2회 차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현수가 인정했다. 사이에 낀 시우는 그 언제보다 환한 표정을 지었다. 2회 차는 무슨, 이제 세는 거 포기했거든요?
단체 사진이 끝난 뒤엔 소그룹 촬영이었다. 대기실에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시우는 크로마키 앞으로 들어갔다.
“예찬이 시우 높게 들 수 있겠어?”
“시우 형 드는 건 일도 아니죠. 제가 우리 그룹 멤버들도 다 들고 다니는데요.”
“차라리 업히는 게 낫지 않을까요?”
예찬을 올려다본 시우는 업히는 걸 제안했다.
“그럼 일단 업는 것부터 해 보자. 예찬이는 힘들면 시우 내려놓고.”
시우는 자신에게 등을 내보인 예찬의 어깨를 짚고 가볍게 그의 등에 올라탔다. 허벅지를 단단하게 잡아 주는 예찬 덕분에 편히 업힐 수 있었다.
“오! 예찬이 힘 좋아. 다음에 나 업어 줘.”
다들 촬영이 끝났지만 남아서 촬영을 구경하기도 하고, 이 촬영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피디님 옆에 서서 아이스크림을 먹던 현수가 휘파람을 불었다.
“싫거든요!”
감독님의 장난스러운 말에 예찬은 무릎을 굽혀 시우를 내려 주며 빼액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크로마키 앞으로 난입한 현수가 냉큼 그의 등에 올라탔다.
“악! 무거워! 살려 주세요! 현수 형이 절 압사시켜요.”
“근돼. 이렇게 비리비리한 모습 보여 주면 팬들이 걱정한다. 네 근육은 공기 채운 거냐?”
“근돼라 부르지 말라고요! 우리 팬들도 나 그렇게 안 불러!”
“근돼한테 근돼라 부르지, 시우보고 근돼라고 불러?”
“거기서 시우 형 이야기를 왜 해요.”
“근육 돼지, 달려!”
촬영 현장을 담는 카메라가 그들의 장난을 찍는 동안 시우는 감독님 옆으로 가서 촬영본을 확인했다.
“카메라가 시우를 제대로 못 담네……. 시우, 에반이랑 커플 컷 한 번 더 가고 바로 개인 컷 가자. 괜찮지?”
제법 잘 나왔다고 생각하던 시우는 실물이 훨씬 낫다고 치켜세워 주는 감독님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에반과 커플 컷이라니.
지금껏 제법 많은 사람을 만났다고 자부할 수 있는 시우에게 이렇게 어려운 사람은 처음이었다. 친한 것 같고 편한 사이인 듯하지만 불편하고 어색한 사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진 평행선을 걷는 것 같았다. 손을 잡을 만큼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순간, 정신 차리고 보면 둘 사이에 넓은 공간이 생겼다.
“자, 마주 보고 세상에서 우리가 젤 친해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 장난처럼 건네는 촬영 감독님의 말에 한껏 올라가 있던 시우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세상에서 젤 묘한 사이인 것 같습니다.
“저녁에.”
“아까 다 들었잖아.”
에반이 말을 꺼내자마자 시우는 웃는 얼굴로 그의 말을 끊었다.
돌아온 건 에반의 깊은 한숨이었다.
“표정이 이상하네. 다시 우리는 친하다, 절친이다, 소울메이트다.”
그 짧은 시간의 표정 변화를 찾아낸 감독님의 말에 시우는 홱 등을 돌렸다.
얼굴 보고 웃는 게 힘들면 얼굴을 안 보면 되잖아. 서로 등을 대고 있어도 나름 친하게 보일 수 있다고.
뒤돌아선 시우는 살짝 표정을 풀었다가 다시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순간 시우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뒤돌아서면 같이 뒤돌아서서 등을 맞댔던 것 같은데, 에반이 선택한 건 뒤에서 끌어안는 것이었다.
“으아아…….”
뒤에서 받쳐 준다고 해도 무게중심이 뒤로 쏠리자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던 시우의 등이 단단한 가슴에 닿았다.
“소울메이트래.”
낮에 웃는 소리와 함께 속닥거리는 에반의 목소리에 시우는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순간 몸에 열이 확 올랐고, 시우의 하얗고 말랑말랑한 귀가 붉어졌다.
“누가 네 맘대로 내 몸에 손대래. 당장 손 떼.”
가까이 있었기에 모깃소리로 웅얼거리는 시우의 말이 정확히 들렸다.
“코코.”
“시우야.”
에반은 코코라 불렀지만, 대답이 없자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왜.”
퉁명스러운 대답이 들렸다. 이 와중에도 그 작은 손으로 제 얼굴을 꼭 가리고 있는 모습이나 붉어진 귀를 보자 흘러나오는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나 너무 미워하지 말아 줄래?”
“포즈는 좋은데, 시우 얼굴 좀 보여 주자.”
둘이 붙어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모르는 감독님의 말에 시우는 파드득거리며 몸을 바로 세우려 했다. 에반은 시우를 장난스럽게 꼭 끌어안았다 놓아주었다.
“아! 특이한 포즈 하려 했는데 안 되겠어요. 그냥 노멀하게 갈게요.”
시우는 오버스럽게 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면서 장난을 쳤다. 화르륵 달아올랐던 귀도 다시 방금 쪄낸 말랑말랑한 백설기같이 하얀색으로 돌아왔다.
“아니. 미워할 건데.”
자연스러운 포즈가 어깨동무라는 사실에 시우는 어금니를 으드득 깨물고는 뭉개지는 발음으로 말했다.
“진짜?”
정말 자연스러운 연기구나. 놀라는 표정과 함께 자신을 보는 에반의 시선에 시우는 만만찮게 놀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응. 미워할 거야.”
“하―.”
아니 왜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갑자기 바닥에 쪼그리고 앉는 건데?
시우는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고 선 채 에반을 내려다보았다.
아래에서 저를 올려다보는 그 표정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날 것 같아 고개를 반대쪽으로 팩 돌렸다. 이게 진짜 연기인 것인지 지금 그의 감정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커플 촬영보다 단독 촬영은 너무나도 쉬웠다. 소고기를 꼭 먹으러 가야 한다며 자신의 앞에서 재롱을 떠는 예찬이 있었기에 더 편했다. 거기다 시우와 예찬이 밥을 먹는다는 말에 현수와 안이 남아 있었다.
“에반은?”
“에반 형은 다른 스케줄 있대요.”
촬영이 끝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시우는 현수와 안의 대화를 듣고 크로마키 앞에 서 있는 에반을 보았다. 감독님의 요구에 그는 시시각각 다른 자세와 표정을 만들어 냈다.
“그래? 그럼 가자. 어물쩍거리다가 저녁 식사 시간 걸리면 시끄럽고 영 아니다.”
현수의 손에 등 떠밀려 촬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스태프와 피디, 감독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던 시우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보았다.
‘나 너무 미워하지 말아 줄래?’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아 얼른 손을 들어 귀를 털었다. 그리고 촬영장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