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진짜 활동 안 하려고요?”
시우는 고기를 뒤집으려다 자신에게 질문하며 집게를 뺏어 가는 예찬을 보았다.
“아따, 이 형님. 진짜 뭐든 자기가 다 하려고 해. 그냥 좀 있어 봐요. 내가 고기만큼은 기깔나게 굽는다고.”
집게를 다시 가져오려던 시우는 뻗은 손에 콜라가 든 잔을 쥐여 주는 그의 행동에 작게 미소 지었다.
“활동은 왜 안 해? 지금 찾는 데 많잖아. 나한테도 너에 관해 묻는 사람 제법 많아.”
“그러게요. 방송하긴 해야 하는데, 그리 하고 싶지 않아서요.”
현수의 말에 시우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태훈이 물었을 때, 그냥 무섭다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다. 진욱은 지금도 자신을 볼 때마다 ‘노 저을 때 물 들어온다’며 방송하자고 은근히 제안해 왔다. 이참에 빛을 봐야 한다, 네가 무명이 길어서 망설이는 거다, 능력 있다, 이런 말 들을 때마다 솔직히 불편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에게 그리 말하는지 알지만, 가장 속상하고 가슴 아픈 건 자신이다.
“왜? 왜 안 해요?”
“일단 ‘Journey’ 나가고 좀 지켜보면서 하게요.”
“하긴 스케줄 들어온다고 막 잡지 마. 보고 아닌 건 적당히 쳐 내고, 제대로 된 것 몇 개만 하는 것도 몸값 올리는 데 도움 돼.”
계속 묻는 안과 다르게 현수는 시우가 들고 있는 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갖다 대곤 상황을 정리했다. 옆에서 안이 콜라 가지고 건배를 한다면서 얼른 자신의 잔도 부딪쳤다. 조금만 더 물었으면 대답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시우는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하지 못했다.
“코멘터리 어떻게 찍는대요?”
시우에 관한 이야기에서 방송 이야기로 주제가 바뀌자,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몸이 나른하게 풀렸다. 의자에 기대앉은 시우는 셋이 이야기를 나누는 걸 지켜보았다. 에반이 그때 그런 말만 하지 않았어도 이 자리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형, 2차 고고?”
음식점을 나온 시우는 예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끄럽고 북적북적한 고깃집보다 조용한 곳에서 한잔 기울이고 싶었다. 앞에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예찬이 안 된다고 하면 혼자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적당히 농담 따 먹기 같은 이야기를 하며 복잡한 머릿속을 날리고 싶었다.
“잘 가는 곳 있어요?”
“그냥 좀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면 좋겠는데. 아는 데 있어?”
안은 촬영이 있었고, 현수는 라디오 방송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에 둘을 배웅하며 시우는 예찬의 옆구리를 장난스럽게 툭 쳤다.
“네. 전에 촬영했던 곳인데 오늘 같은 날 밤에 거기서 한잔하면 진짜 좋을 거 같아요.”
“앞장서. 형이 살게.”
“무슨 형이 사요? 내가 밥 먹자고 했는데, 방금 고깃값도 현수 형이 내고. 술은 제가 삽니다.”
“내가 술 먹자고 했잖아.”
“제가 형보다 훨씬 더 많이 먹는데요?”
한마디도 지지 않는 예찬의 행동에 시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가 계산하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하니.
“쯧. 이런 데는 애인이랑 오라고.”
예찬과 밥을 먹는다고 말하고 진욱을 먼저 보냈기에 예찬의 차를 타고 이동한 시우는 눈앞에 펼쳐진 정경에 혀를 찼다. 이런 곳에 시커먼 남자 둘이 오고 싶냐?
“이 형은 진짜 무드도 없고, 예행 연습쯤으로 칩시다. 그럼.”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는 밤은 시원한 바람이 가득했다. 띄엄띄엄 놓여 있는 테이블 사이로 늘어뜨린 천이 하늘거리며 흔들렸다.
“뭐 마실래요? 여기 양주에 칵테일에 다 있어요.”
“너 먹고 싶은 거.”
푹신한 2인용 소파에 몸을 완전히 기대앉은 시우는 옆에 있는 쿠션을 끌어안았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잠이 들 것 같았다.
“형. 졸리죠?”
더 질문하지 않고 알아서 주문한 예찬은 나른하게 누워 있는 시우를 한번 보고는 휴대전화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안 자거든. 술 마시고 잘 거거든.”
찰칵―.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는 소리가 들렸지만, 시우는 그냥 그대로 있었다.
“대박 잘 나왔어. 나, 이거 SNS에 올려도 돼요?”
“안 돼.”
이 자식 셀카 찍는 줄 알았는데, 언제 또 자신을 찍었대?
“형이랑 친하다고 자랑하고 싶다고요.”
“왜?”
“형이 좋아서.”
“개부담. 나 좋아하지 마라.”
앞에 세팅된 음식을 보다 미간을 찌푸린 시우는 자신의 앞에 놓인 칵테일과 예찬의 앞에 놓인 맥주잔을 바꿨다. 그리고 직원을 불러 소주도 시켰다. 도대체 나를 뭐로 생각해서 칵테일이야.
“싫은데 좋아할 건데.”
“징그럽다.”
맥주에 소주를 적당히 섞은 시우는 시원하게 잔을 비워 냈다. 역시 술은 소맥이지. 먹는 순간 식도부터 위까지 타들어 가는 양주나 달달해서 계속 먹다가 한 방에 훅 가 버리는 칵테일은 싫었다.
“아! 진짜 사랑은 딴 사람이랑 한다고요.”
“듣던 중 반가운 말이네.”
비스킷 하나를 집어 아삭거린 시우는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밝디밝은 서울 하늘에선 별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빛나는 것이라고는 둥근 달과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뿜는 빛이 전부였다.
“사랑하는 사람 있다니까요.”
“어.”
“왜 안 물어봐요? 지금 피닉스의 강예찬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그거 나야?”
시우는 미동도 없이 그저 입만 달싹이며 건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아니. 와, 대박. 형, 근자감 쩔어.”
지금까지 싱글거리던 예찬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시더니 자신의 가슴 앞에서 두 팔을 교차시켜 X자를 만들었다.
“그럼 됐어. 나만 아니면 돼.”
“형. 진짜 재미없는 거 알죠.”
불퉁한 예찬의 말에 하늘을 보는 것을 멈춘 시우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예찬은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 상대로 자신을 고른 것이 분명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자신을 선택한 그의 마음을 무시할 수 없었다.
“짝사랑?”
시우가 비워 버린 맥주잔엔 그사이 예찬이 만든 소맥이 채워져 있었다. 고개를 끄덕거린 예찬의 앞엔 양주병과 잔이 놓여 있었다.
“말해. 내가 조언은 못 해도 들어 줄 순 있어.”
그런 날이 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날.
예찬의 이야기를 듣는 시우의 입꼬리엔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딱히 어떤 말을 해 줄 필요도 없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약간의 추임새만 넣어 주면 된다.
“그래서 뭐가 문제라는 거야?”
열심히 말을 한 예찬과 다르게 계속 술을 마신 시우는 알딸딸한 기분에 거의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래도 자신의 본분은 잊지 않고 한마디 질문도 던졌다.
“그냥 그렇다는 거지. 그쪽도 아이돌이고 나도 그러니까.”
“사내새끼가 뭘 징징대고 있어. 가서 나 너 좋아해. 너 나 좋아해? 콜? 하는 거지.”
“근데 에반 형이 고백 안 했죠?”
“뭔 헛소리야?”
예찬은 자신이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는 내내 계속해서 술만 마시던 시우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 그리고 돌아온 냉정한 대답에 한숨을 쉬었다. 에반 형 완전 저돌적인 줄 알았는데, 숙맥이었고만. 처음 시우에게서 나던 그 강한 페로몬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에반 형이 형 좋아하잖아.”
“술 취했으면 적당히 하지. 네가 지금 사랑 중이라고 온 세상이 핑크핑크 하냐?”
예찬은 오늘 받았던 그 공격적인 페로몬을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순간 몰아치다가 그도 깨달았는지 금세 거둬들여서 괜찮았지, 그가 그러지 않았다면 예찬도 방어하기 위해 자신의 페로몬을 둘렀어야 했다.
“아냐. 진짜야. 에반 형, 형 좋아해.”
예찬의 확답에 시우가 지은 표정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씁쓸하고 외롭고 차가운 느낌. 기뻐하거나 짜증을 낸 것이 아니었다. 시우의 표정은 굉장히 슬펐다.
“술이나 처드시든지 너나 고백하러 가세요.”
한마디 한 시우는 소맥을 또 원샷해 버렸다.
“혹시 에반 형이 고백하면 어떡할래요? 나랑 내기. 콜?”
딱 그때까지가 좋았다.
자신의 질문에 시우가 선택한 건 소파에 푹 기대서 눈을 감는 것이었다. 몇 번 대답해 달라고 재촉했지만, 술기운에 잠이라도 든 건지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일어난 시우를 마주한 예찬은 다리를 덜덜 떨었다. 휴대전화를 달라고 해도 주지 않고, 매니저 연락처를 달라고 해도 묵묵부답이었다.
알 수 없는 말을 반복하고 헤실거리는 시우는 말 그대로 공포 그 자체였다.
“형. 진짜 매니저 형이든 누구든 부를 수 있는 사람 연락처 좀 달라고요.”
“그래서…… 내가 가슴이 아파요.”
소파에서 그냥 주무시지, 잘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앉아서 웅얼거렸다. 혼자 산다면 데리고 가겠지만 숙소 생활을 하는 그에겐 참으로 난감한 순간이었다.
“내 가슴이 더 아파요.”
슬슬 오르던 술기운은 싹 날아갔고, 지문이나 동공도 아니고 패턴으로 풀어야 하는 비번 때문에 예찬은 미칠 지경이었다. 수없는 도전에 5분 잠금이 걸렸다. 술버릇이 이럴 줄 누가 알았냐고?
일단 5분 동안 건들 수 없기에 시우의 휴대전화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예찬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소파에 기대앉아 지켜보았다.
그때 갑자기 울리는 자신의 전화를 본 예찬의 얼굴에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미소가 지어졌다.
“형!”
“어디야?”
“촬영 다 끝났어요?”
“어디냐고?”
예찬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반가움에 미친 듯이 흔들렸을 것이다. 그리고 희망에 부풀어 밝은 그의 목소리와 다르게 상대의 목소리는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냉큼 자신이 있는 곳의 위치를 말한 예찬은 급히 손을 들어 얼음물을 주문했다.
지금 이곳으로 오는 사람은 구세주이면서 사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