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휴대전화 전원을 켜는 순간 시우의 고민은 말끔히 해결되었다.
[형. 잘 들어갔죠? 저 숙소 가야 해서. 에반 형이 데려다준 거예요. 혹시 기억 못 할까 봐.]
친절한 예찬의 문자가 있었다.
시우의 시선이 다시 식탁으로 향했다.
언젠가 라이브 중에 해장으로 콩나물해장국을 좋아한다는 것과 즐겨 가는 곳을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저 자두와 해장국의 출처가 확실해졌다.
“또 너구나.”
식탁 의자에 앉아 자두에 손을 뻗었다. 잘 익어 붉은 자두의 향긋한 향에 침이 고였다. 매끄러운 자두의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자두를 입술에 댔다.
풍부한 즙과 함께 그 새콤달콤함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자두 한 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또 먹고 싶었다. 지금까지 먹었던 자두 중 으뜸이라고 할 만큼 맛이 좋았다. 이래서 한 알만 두고 간 것일까? 정갈한 메모에 시선이 갔다.
자두를 먹는 동안 기억을 더듬었지만 제가 기억하는 건 예찬과 함께 있는 것이 전부였다.
[혹시 나 아무도 몰라랑 반지하 방 이야기했어?]
예찬에게 메시지를 보내 놓고 시우는 욕실로 들어갔다. 입이 텁텁하고 속이 메슥거렸었는데, 자두 한 알을 먹는 사이 숙취는 완전히 사라졌다.
[아! 그거 무슨 말이에요? 형, 반지하랑 아무도 모른다는 말 계속했잖아요. 그런데 속은 괜찮아요? 해장국 먹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필름 끊긴 거 맞네. 시우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괜찮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기억에는 없지만, 에반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 맞는다면 지금이라도 연락해 감사함을 전해야 했다.
예찬이와 있을 때, 반지하 방 이야기까지 했다면 아마 그 뒤 자신은 쭉 잠만 잤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술버릇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잠든 사람 옮기느라 고생했을 테고, 해장국과 자두까지 사 두고 간 사람이다.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이미 정오가 지난 시간이었기에 시우는 메시지를 쓰기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일정하게 들리는 수신음과 다르게 그의 심장은 제멋대로 뛰어 댔다. 초조함이 밀려와 엄지 손끝을 이로 꾹꾹 깨물었다. 그가 전화를 받길 원하면서도 한편으로 받지 않기를 바랐다. 나중에라도 전화했던 것을 그가 안다면 나름 연락하려고 했다는 뜻으로 보일 테니까.
“네.”
“……아.”
시우의 기대와 다르게 곧 안내 음성이 들리겠구나 싶은 찰나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끊을 생각에 들떴던 시우는 깜짝 놀라 여보세요, 라는 말 대신 작은 소리를 냈다.
“김시우 씨?”
에반의 목소리도 아니고 자신을 씨라는 호칭까지 붙여서 부르는 것에 시우는 자신의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했다. 분명 그에게 직접 연락처를 받았고 ‘에반’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아 잘못 건 것은 아니었다.
“네. 제가 김시우인데요.”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뵀던 에반 매니저입니다.”
상대가 에반의 매니저임을 확인하고서야 시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가한 자신과 다르게 그는 오늘도 스케줄이 있는 듯했다. 그럼 도대체 몇 시에 와서 자신을 데려다주고 해장국까지 사 놓고 나간 걸까?
“아! 안녕하세요. 매니저님. 저 에반…….”
“지금 촬영 중입니다. 용건 말씀해 주시면 촬영 후 연락드리라고 하겠습니다.”
깍듯하게 존칭을 써 주는 말투가 부담스러워진 시우는 아니라고 말하며 저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들고 있지 않은 다른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그…… 오늘 촬영 늦게 끝날까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시우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 * *
한가한 주차장에 차를 세운 시우는 차마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손끝으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지극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양평의 한적한 곳에 있는 스튜디오. 몇 걸음 걸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에 에반이 있다.
시우가 전화를 걸었을 때, 막 촬영을 시작한 참이라 꽤 오래 이곳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제안한 사람은 에반의 매니저지만 그에 응한 건 자신이다.
“진짜 내가 회귀 하나 믿고 이 짓 한다.”
두 주먹을 몇 번 쥐었다 놓은 시우는 휴대전화를 들어 버튼을 눌렀다. 조금 전 통화로 에반의 매니저 연락처를 받아 냈다.
“저 지금 주차 끝냈는데요.”
그의 매니저가 만류했지만 사과하러 오는 길에 빈손으로 올 순 없었다. 그렇다고 에반의 것만 하나 달랑 들고 올 수도 없어서 스태프들 것까지 샀다.
차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고 사 온 음료를 정리했다. 두 명이면 어떻게든 다 들고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빈손으로 오셔도 좋아했을 겁니다.”
같이 짐을 나눠 드는 매니저의 말에 시우는 어색하게 웃었다. 지금 자신은 에반의 주위 사람에게 뇌물을 먹이는 것이다. 자신의 민망함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그리고 사람은 배가 부르고 기분이 좋으면 자연스레 너그러워졌다.
그게 에반에게도 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오는 거 알고 있어요?”
“아뇨. 말 안 했습니다.”
“그럼 촬영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릴게요.”
시우는 볼캡을 조금 더 눌러썼다. 그를 보러 왔으면서도 그가 자신을 보지 못했으면 좋겠다. 제 술버릇은 자신도 알기에 그에게 큰 민폐를 끼치진 않았을 텐데, 이상하게 무언가 찝찝함이 계속 가슴 한쪽에 머물렀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시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고풍스러운 서재를 재현해 놓은 곳. 스리피스 정장을 갖춰 입은 에반이 책장에 기대서 있었다. 이곳에서 꽤 떨어진 곳이었는데, 한 손에 책을 들고 그걸 보는 듯한 제스처를 하고 있던 그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촬영 분위기를 위해 깔아 놓은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주위를 감쌌다. 고개를 든 에반의 시선은 정확히 시우의 얼굴을 향했다. 카메라가 아닌 입구에 서 있는 시우에게.
곧이어 지금껏 무표정하던 그의 표정이 느릿하게 변했다.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고 무심하던 눈빛이 바뀌었다.
“오. 에반, 지금 표정 좋은데?”
카메라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멍하니 서 있던 시우는 양손 무겁게 들고 있던 음료 트레이를 살짝 들어 그에게 보였다. 착각이 아니라면 지금 에반은 계속 자신을 보고 있었으니까.
“누구 왔어?”
카메라 감독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에반의 시선이 카메라가 아닌 다른 곳을 향했고, 은은하게 미소를 짓던 에반은 어딘가를 향해 자신을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보는 듯 편안하고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거칠었다.
“안녕하세요.”
세트장에 있던 사람들의 집중력이 흐트러지자 시우는 꾸벅 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옆에 그의 매니저가 같이 있었으니 망정이니 혼자였으면 정말 이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도망갔을 것이다.
“그럼. 잠시 쉬어 가죠.”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세트장에서 걸어 나오는 에반을 보던 시우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매니저와 함께 스태프에게 음료를 나눠 주었다.
“아! 이름이…… 미안해요. 요즘 굉장히 핫한 분인데.”
“에반이랑 ‘Journey’ 같이 찍으신 분 맞지?”
볼캡을 쓰고 있었지만, 살짝 드러난 얼굴을 보고 스태프들은 누구인지 나름대로 추측한 모양이다.
“김시우 씨?”
시우는 음료를 건네주다 음료는 받아 가지도 않고 갑자기 자신의 손을 감싸 쥐고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보았다.
“우와. 진짜 내가 김시우 씨 섭외하려고 얼마나 난리였는데, 여기서 이렇게 보네요.”
“아, 안녕하세요.”
누군지 모르겠지만 일단 인사를 한 시우는 어색함에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내 소개를 안 했네요. ‘Gossip’ 에디터 최지원입니다.”
태훈 형을 통해 잡지사나 방송국에서 섭외 요청이 많이 들어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Gossip’에서까지 연락이 왔는지는 몰랐다.
“진짜 시우 씨. 저희랑 작업 한 번만 해 줘요. 조건은 어떻게든 다 맞춰 드릴게요.”
유명 잡지사 에디터의 러브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시우는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우리 그럴까요? 대서특필 한번 하고 곧 입대한다는 내용 써 보고 싶으신가요? 이렇게 말할 순 없지 않은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여전히 손을 잡힌 채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던 시우를 끌어낸 건 에반이었다.
“두 분 친하다는 말이 있더니 정말이었네요. 에반 씨 촬영장까지 시우 씨가 다 오고.”
“같이 촬영하다가 친해졌어요. 다음에 기회 되면 저도 꼭 같이 일해 보고 싶네요.”
시우는 그녀의 손에 잡힌 손을 조심스럽게 빼내고는 옆에 있는 음료 하나를 집어 에반에게 내밀었다.
“시우 씨. 그 말 지켜 주셔야 해요.”
“진짜 어떻게 왔어?”
시우가 건네는 음료를 받아 든 에반은 슬쩍 몸을 움직여 그녀의 시야에서 시우를 가려 버렸다.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연락이 올 것 같긴 했지만, 촬영장까지 올 줄이야. 거기다 지금 스태프들이 들고 있는 음료도 그가 사 온 것이었다.
“어제 일.”
“자두가 아니고?”
한번 올라간 에반의 입꼬리는 쉬이 내려가지 않았다.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기에 볼캡에 가려 그의 얼굴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에반은 시우의 손을 잡고는 대기실로 이끌었다. 길게 쉬지는 못하겠지만 잠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있었다.
“자두 진짜 뭐야? 사 줄 거면 많이 사 주지, 한 개는 또 뭐고.”
“덕분에 네가 여기까지 왔잖아.”
“어디서 샀는지나 말해 줘.”
“맛있었어?”
시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그 자두를 생각하면 입에 침이 고이니까.
“어떻게 여기까지 올 생각을 다 했어? 네가 연락 안 하면 촬영 끝나고 연락할 생각이긴 했는데.”
대기실 한쪽에 있는 옷을 바라보는 시우는 에반의 질문에 마땅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네 매니저가 제안했고, 그냥 왔어, 라고 말하며 괜히 화려한 촬영 의상을 만졌다.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해 주면 되잖아. 코코는 빈말도 못 하는구나. 내가 그 말 듣고 싶어 하는 거 알면서.”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에 시우는 고개를 돌렸다. 소파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에반과 눈이 마주쳤다. 화보 촬영을 위해 한껏 꾸민 그와 후줄근한 자신의 옷이 한눈에 들어오자 그와 자신의 차이를 보는 것 같았다.
“어제 일 고맙고, 자두도 고맙고, 콩나물해장국도 고맙…….”
“코코.”
시우는 운전하면서 계속 생각했던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자신은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이곳에 온 것이니까. 하지만 시우의 말은 에반의 한마디에 끊겼다.
“와 줘서 고마워.”
부드러운 그 목소리에, 따뜻한 눈빛에, 그 말과 함께 아래로 축 처져 있는 자신의 손끝을 살짝 잡는 그 손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