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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51화 (51/187)

51화

“이게 뭐야.”

시우는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진 자두 한 알을 물끄러미 보았다. 큰 트러블 없이 초밥도 맛있게 먹었고, 이제 자두 파는 곳을 알려 달라고 했을 뿐인데.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고 나갔다 온 에반이 시우의 손 위에 자두 한 알을 올려 준 것이다.

“자두.”

“아니. 자두를 줄 게 아니고, 자두 파는 곳을 알려 줘야지.”

“내가 줄게. 먹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해도 돼.”

빙긋 웃으며 말하는 에반을 보며 시우는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자두 먹고 싶을 때마다 연락하라니! 그럼 한겨울 새벽 2시, 막 이럴 때 연락해도 된다는 건가? 지금이야 끝물로 자두가 남아 있겠지만, 계절이 바뀌면 먹고 싶어도 못 먹는 과일이었다.

“왜 한 알이야.”

“더 먹고 싶어?”

“당연한 거 아냐?”

입술을 삐죽이며 시우는 자두 끝을 조금 베어 물었다. 알고 있는 그 맛. 상상하는 그 맛. 이미 아는 그 맛이 입 안 가득 퍼지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작은 자두는 입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물티슈로 손을 닦으며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해 달라고 해 봤자 말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알려 줘도 이제 끝물인 자두를 더 구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 뻔했다.

분명 초밥을 자신이 사려고 했건만, 시우가 계산대로 갔을 땐 이미 계산되었다는 말만 들었다. 그래서 이번엔 자신의 차로 움직였으니 에반을 그의 집으로 데려다주려 했다.

“아껴 먹지 말고 다 먹고 꼭 말해.”

주차장으로 나온 시우는 에반이 내미는 작은 상자를 받아 들었다. 상처 나지 않게 깔끔히 포장까지 한, 자두가 든 작은 상자. 에반의 뒤로 자신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그의 매니저가 있었다.

“그냥 판매처만 말해 주면 되는데.”

“나 스케줄 때문에 먼저 가 봐야 해. 같이 가지 못해서 미안.”

미안하다고 말하며 자신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 가는 에반의 넓은 등을 보던 시우는 고개를 숙였다. 그가 안겨 주고 간 자두가 눈에 들어왔다.

조수석에 상자를 두고 운전석에 앉은 시우의 손이 다시 자두 상자로 향했다.

반질거리는 작은 자두 한 알을 꺼내 통째로 입에 넣었다. 볼이 볼록해졌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운전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시우는 여섯 개의 자두를 더 먹었다.

* * *

“아. 진짜 부끄럽다.”

오늘 코멘터리 촬영은 짧을 것이라 했다. 본방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방송 사이트에 풀릴 것으로 사전 인터뷰를 했던 내용과 각자 집결지까지 오는 내용에 관한 것이라 했다.

왜 시작이 자신일까?

진짜 숍에 갔었어야 해. 이걸 이런 식으로 풀 줄은 몰랐다.

“시우, 너무 귀엽잖아.”

눈썹을 덮은 차분한 바가지 머리를 하고 하늘색 셔츠를 입은 시우의 동그란 눈은 하얀 백설기에 까만 콩을 박아 놓은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김시우입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차분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모니터 속 시우를 보던 예찬이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졸지에 예찬에게 안기는 꼴이 됐지만, 시우는 굳이 그 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숍에 갔었어야 해요.”

차마 제 모습이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걸 더 보지 못한 시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왜 이런 걸 굳이 사이트에 푸냐고.

“아냐, 진짜 귀여워. 이제 코코의 시대가 펼쳐질 겁니다. 진짜 우리 시우가 이번 촬영에 얼마나 큰일을 했는데!”

현수까지 옆에서 말을 거들자 시우의 귀가 붉어졌다. 그리 길지 않은 사전 인터뷰가 끝나자 시우는 한숨을 돌리고 앞에 놓인 주스를 빨대로 마셨다.

다른 멤버들의 사전 인터뷰를 보며 앞에 있는 과자도 하나 집어 먹었다.

“헉.”

그러기 무섭게 시우가 공항을 쫄래쫄래 걸어 다니는 장면이 보였다.

“맞아. 시우 형. 이날 착장 진짜 귀여웠어요. 저 항공 점퍼는 어디서 샀어요?”

“시우, 진짜 키에 비해서 다리 엄청 길고 이뻐. 그래서 늘 스키니에 오버사이즈 상의인가? 그런데 그게 또 찰떡같이 잘 어울리잖아.”

다들 화면을 보면서 한마디씩 했지만, 시우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을 찍은 것은 죄다 편집될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 방송될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시우 혼자 여행 다니는 게 취미였어?”

“네. 그냥 조용히 혼자 다니면 생각할 시간도 많고 해서.”

현수의 말에 대답하는 찰나 에반의 화면으로 넘어갔다. 자신이 나올 때면 바짝 긴장했지만, 다른 멤버로 화면이 바뀌면 절로 시우의 몸에서 긴장이 풀렸다.

“크. 역시 에반이네. 아주 그냥 걸어 다니는 화보 아니겠습니까?”

루카의 주접에 다들 웃음이 터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에반은 무채색의 옷을 즐겨 입었다. 블랙진에 블랙 재킷에 검은색 볼캡에 검은 마스크를 쓴 그가 멀리서 걸어오는 걸 찍은 것뿐인데, 사람 많은 공항을 런웨이로 만들어 버렸다.

“에반. 시우 좀 본받아. 시우 사운드는 꽉 차 있는데, 넌 왜 무조건 직진이야? 직진남이야?”

오죽했으면 편집 팀에서 에반이 티켓팅을 하고 비행기까지 가는 길을 빨리 감기로 연출하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움직였습니다.]라는 멘트가 아래 걸려 있었다.

“어! 뭐야. 이래서 둘이 같이 온 거야? 좌석도 바로 일등석, 그것도 옆자리였어? 이거 어떻게 된 거예요? 우리 다 각자 알아서 오는 거 아녔어?”

“그때 이거…….”

에반과 시우가 만나는 장면이 나오자마자 예찬이 크게 소리쳤다. 그러다 보니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하려던 에반의 목소리가 한 오디오에 맞물렸다.

“아! 예찬이랑 에반. 둘 다 아마추어도 아니고 오디오 물리잖아.”

마침 자신이 표를 바꿨다는 말을 하려던 시우는 입술을 벙긋거리다 그냥 꾹 다물었다.

그러니까 정말 그건 예상치 못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자세한 상황을 모르니, 둘만 일등석을 탔다고 루이와 안까지 한마디씩 거들었다.

분명 시우도 배정받은 건 이코노미석이었다. 회귀 전 남은 돈 다 쓰자는 심정으로 일등석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인데.

“에반 형. 만나자마자 팬밍아웃 했고요.”

“진짜 에반이가 성덕이다, 성덕.”

“그럼요. 제가 코코맘 1기입니다.”

다들 보이는 화면에 대해 한마디씩 하느라 수시로 오디오가 물렸지만, 나중엔 다들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루이랑 안은 미국에서 바로 넘어온 거였어? 대박.”

“그때 진짜 비행 길어서 힘들었는데, 만나자마자 에반 형 페로몬. 아, 진짜!”

“자! 이렇게 봤고요! 보고 나니 기분들이 어떠세요?”

촬영 때도 그랬던 것처럼 코멘터리 진행을 맡은 현수는 소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했다.

약 40분 분량의 영상이 끝나자 또 다들 각자 할 말을 쏟아 내느라 난리였다.

“확실합니다. 이것보다 본방이 더 재밌을 겁니다.”

“시우는 여행 내도록 행운의 아이콘이었죠.”

“전 첫 방송에 우리 만나는 것부터 나올 줄 알았는데, 본방은 모인 숙소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안이 촬영 중인 연출진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마이크를 착용하지 않은 연출진의 설명을 듣느라 다들 그쪽에 집중했다.

“총 10부작이라서 본방에서는 메인 스토리가 진행되고, 사이트에 비하인드 스토리도 같이 풀린다는 거죠?”

“비하인드는 어떤 거 풀려요?”

적극적으로 촬영에 임하는 멤버들과 다르게 시우는 조금 뒤에 빠져 있었다. 오디오가 맞물릴 것 같아 끼어들 틈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순간 어깨가 묵직해져 시우는 옆을 바라보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 자신의 옆에 예찬과 안이 앉아 있었는데, 예찬 대신 에반이 있었다.

“왜?”

갑자기 나타나서 팔을 두르는 행동에 시우는 무슨 일인가 싶어 작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냥.”

“본방에 못 나가는 게 뭐가 있지? 뭐가 있을까요?”

비하인드에 들어가는 장면이 궁금한지 안은 계속해서 제작진에게 질문했다.

“있어! 에반 형이랑 시우 형 뽀뽀한 거.”

예찬이 갑자기 웃으며 말하자 다들 박장대소했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쏠리자 시우는 얼른 어깨를 털어 그의 손을 떼어 냈다.

“아니야. 그건 본방에 당당히 나갈 수 있을 거예요.”

그건 정말 게임 중에 일어난 작은 해프닝이었다. 제대로 닿은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스치고 지나간 것인데, 이렇게 대놓고 말하니 정말 뽀뽀한 것 같았다.

“이거 확실하게 해 주셔야 합니다. 본방입니까? 비하인드입니까? 설마 편집실 저장인가요?”

현수는 정말 심각하고 중요한 이야기라는 것처럼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키야! 역시 대단하네! 여러분 본방입니다. 본방에서 보실 수 있답니다.”

게임 속 장면이니 당연히 자르지 않고 나가야 할 부분이었다. 이렇게 장난스럽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재밌는 장면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장면이 나가야 시우와 에반이 손을 잡고 다닌 이유가 설명되는 것이다.

“그게 무슨 뽀뽀야?”

다들 희희낙락하는 와중에 에반이 불퉁하게 한마디 툭 내뱉었다.

“뽀뽀가 아니면 뭐야?”

“아니. 잠시만, 이렇게 난리 쳐도 제작진이 이거 통편집하면 우리 이러는 거 아무 소용 없어요.”

갑자기 불붙은 상황에 시우는 버릇대로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오디오가 제멋대로 맞물리는 상황에 루카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시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자, 형에게만 살짝 말해 봐. 닿았어? 안 닿았어? 부끄러우면 귓속말로 할까?”

“그런 질문이 어디 있어요. 그건 게임하다가 그렇게 된 거잖아요! 이거 편집 안 되고 나가면 시청자분들 오해하셔요.”

하필 둘이 나란히 앉아 있을 때 이런 주제가 나와 더 민망했다.

“그러니까 나한테만 말해 달라고.”

“닿았어.”

“안 닿았어.”

계속해서 루카가 묻고 예찬이 장난치는 상황이라 시우는 눈 꼭 감고 외쳤다. 안 닿았다고. 하지만 맞춘 것처럼 닿았다고 말한 에반과 사운드가 물렸다.

“뭐야? 뭐랬어? 에반 형도 같이 말했죠.”

잠시 뽀뽀 사건으로 난장판이 됐지만, 분위기가 정리되자 다들 코멘터리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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