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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53화 (53/187)

53화

방송 끝나자마자 현수가 오고 2차로 자리를 옮겼지만, 그때까지도 에반은 오지 않았다. 밤 12시가 가까워질 때까지도 그는 오지 않았다. 내일 오전부터 있는 스케줄 때문에 안과 루이는 매니저에게 혼나며 끌려갔고, 예찬과 루카는 뭐가 그리 심각한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둘 다 취해서 했던 말을 또 하는 것 같은데, 어쨌거나 둘은 참으로 진지했다.

“시우. 술 좀 마셨어? 뭐 별로 취한 거 같지도 않네.”

현수의 말에 시우는 미소를 띤 채 그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소맥 폭탄 아니면 잘 안 취한다고요. 거기다 계속 시끌벅적하게 떠들었고, 장어로 든든하게 배까지 채웠으니 알딸딸한 것이 적당히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기분 좋을 만큼 마셨어요. 형은 이제 시작인데 어떡해요. 에반이라도 빨리 오면 좋을 텐데.”

“걔 스케줄은 진짜 살인 스케줄. 어떻게 그러고 사나 몰라. 알파가 체력이 좋다고는 하지만 걘 늘 그 이상이야.”

과일 하나를 집어 먹고 그가 술잔을 비우자 시우는 다시 잔을 채워 줬다.

“뭐 너도 마셔.”

“전 좀 쉬었다가, 저 취하면 진짜 볼썽사나워요.”

“그래 봤자지. 여차하면 매니저 부르면 되고, 뭐가 문제야.”

“민폐라니까요.”

시우는 동그란 뻥튀기 하나를 집었다. 이거 딱 좋네. 입이 심심한데, 칼로리도 낮고.

“그래서 자두는 드셨습니까?”

현수의 말에 시우는 피식 웃었다. 다들 왜 자두 이야기만 하는지. 그게 라디오까지 타서 문제가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저 진짜 자두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조금 전에도 에반이 한 알을 줘서 먹었다는 말을 하기도 그렇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서 초밥도 잘 먹고?”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요?”

“니네가 하고 다니는 일에 비밀이 있는 줄 알아? SNS가 무서운 거야, 인마. 그러니까 에반이한테 네가 한 소리 해. 이 판국에 스캔들 나면 너만 죽어. 걘 이미지에 타격 1도 안 가니까.”

“그냥 좀 친한 건데. 제가 좀 안쓰러워 보였나 보죠.”

현실은 현실이다. 에반의 매니저 말대로 아닌 건 아니었다. 회귀 하나 믿고 덤비기엔 참으로 큰 것이다. 괜히 자두 한 알에 설렌 자신이 너무 우스웠다. 그게 뭐라고. 자두 그게 뭐라고.

“그나마 네가 베타고 걔가 알파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방송 나가면 좀 시끄럽긴 하겠다. 이 피디가 사람은 좋은데 참 그래. 돈 되고 이슈 되는 건 귀신같이 안단 말이야. 너 솔직히 오늘 네 거 다 잘릴 줄 알았지?”

씁쓸함이 밀려와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편집될 줄 알았던 자신의 인터뷰가 제일 먼저 나온다는 게 뭘 뜻하는지 알았다. 시우 다음으로 나온 것이 에반의 인터뷰였다. 일곱 명의 인터뷰가 끝나고 역시나 시우의 공항 모습이 먼저 나왔고, 또 에반과 엮였다. 진짜 기막힌 편집 실력이었다.

그만 마시려고 했는데, 작게 웅얼거리며 시우는 현수가 제안하는 잔을 거절하지 않고 마셨다.

“혹시 뭐 다른 생각 있는 거 아니면, 방송 좀 출연하고 그래. 가끔 너 보면 진짜 무슨 세상 다 초월한 애 같아서 하는 말이다. 회사에서 뭐라고 안 해?”

“형. 저 군대 가요.”

잔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 시우는 남 이야기 하듯 툭 뱉었다. 취한 것일까? 가슴에 꾹꾹 담아 놓은 말이 나와 버렸다. 모두 그렇게 말했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고.

기획사만 아는 그 이야기가 이렇게 허무하게 나올지 몰랐다.

“뭐?”

현수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자 루카와 예찬의 시선이 이곳으로 향했다

“쉿. 이거 아무도 몰라요. 회사랑 이야기된 거니까 그냥 모른 척해 주세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테이블 아래에 있는 현수의 한 손을 꾹 잡았다.

“미쳤어? 머리 총 맞았어? 아니면 회사가 돌았나?”

술잔을 비운 현수가 빠르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하긴 놀랄 만한 이야기이긴 하지. 스물세 살, 곧 스물네 살. 그리 많은 나이도 아닌데, 이제 막 인기를 얻을 것 같은 시기에 가는 군대니까.

“형. 이러면 나 형한테 괜히 말한 거 같잖아요. 비밀 지켜 주셔야 해요. 저 입대하는 날 발표하는 것으로 말 다 맞춰 놓은 거예요. 이거 혹시 그 전에 말 나가면 백 퍼 형님이 흘린 겁니다.”

자신이 한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기에 시우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진짜 네 머릿속에 들어가 보고 싶다. 왜 그러냐. 진짜.”

자신의 일인데 더 안타까워하며 연거푸 술을 마시는 현수를 보는 시우의 눈빛은 잔잔했다. 처음엔 충동적으로 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이렇게 심장 떨리는 순간이 많은데, 에반의 옆에서 친구라는 이름으로 오래 있을 자신이 없었다.

“왜 형이 가는 것처럼 그래. 군대 가는 게 원래 계획이었는데, ‘Journey’가 내 인생의 변수였어요.”

바삭바삭, 소리 나는 뻥튀기의 질감이 제법 마음에 들어 하나를 더 집어 들었다. 동그란 것을 보다가 손끝에 침을 살짝 묻혀 괜히 가운데 구멍을 뚫었다.

“아. 형 라디오 진짜. 그때 이상한 거 질문하고 그래서 더 그런 거라고요. 에코가 뭐야, 에코가. 사귀십니까? 예찬? 에반? 이런 질문이 문제라고요.”

현수와 계속해서 군대 이야기를 하는 건 위험했기에 시우는 얼른 다른 안건을 끌어왔다.

“그때 네가 우리 라디오 채팅창을 봤으면 그런 말 못 한다. 진짜 폭주였다고. 내가 라디오 하면서 그렇게 빨리 글이 올라가는 건 본 적이 없어요. 거기다 그런 질문으로 도배가 됐다고.”

또 흥분하려는 현수의 어깨를 장난으로 툭툭 쳤다. 거기다 섭외도 안 되는 너와 에반 때문이라는 말이 덧붙었다. 루카와의 진지한 이야기가 끝났는지 예찬이 옆으로 왔다. 그러고는 그 큰 덩치로 시우에게 기댔다.

“현수 형. 시우 형한테 뭐라 하면 에반 형한테 혼나요.”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자신을 끌어안고 비비적거리는 예찬이 커다란 레트리버 같아 시우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혼나긴 뭘 혼나. 내가 더 형인데.”

“야, 비켜.”

“어? 왔어?”

예찬은 자신의 다리를 툭 치는 행동에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와 함께 현수는 빙긋 웃으며 자신들에게 그늘을 만들고 서 있는 남자를 올려 보았다.

시우에게 꼭 붙어 있는 예찬이 떨어져 나감과 동시에 그 자리를 에반이 채웠다.

“손.”

“싫어.”

알딸딸한 술기운은 시우를 대범하게 만들었다.

“손 줘.”

“싫다고.”

“손 주세요.”

“싫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에반도 시우도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 있었다. 내가 술이 안 취해서 이런 것이라며 현수는 연달아 몇 잔을 비웠다.

“손 줄래, 아니면 입 벌릴래?”

“둘 다 싫은데?”

“하여튼 말 진짜 안 들어.”

그 말과 함께 시우의 눈앞에서 에반의 커다란 주먹이 펼쳐졌고, 잘 익은 자두 한 알이 나타났다.

“야! 자두로 꼬시지 말라고.”

“꼬시는 거 알긴 하네.”

“내가 자두에 넘어갈 거 같아?”

“그럼. 어떡하면 넘어올 건데?”

틱틱거리는 말과 다르게 시우의 작은 손이 냉큼 자두를 들고 갔다. 발그스름한 볼에 살짝 풀린 동공. 본인은 분명히 또박또박 말한다고 생각하겠지만, 흐릿한 발음에 에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만취했을 때가 나았을까? 이건 술 취한 것과 상관없었다. 그냥 시우면 되는 것이니까. 김시우면 되니까. 오직 코코만.

“사랑싸움은 딴 데 가서 하지. 숨겨야 한다든가 조심해야 한다든가 그런 건 아예 뇌에 탑재가 안 되어 있어?”

현수는 한숨을 쉬며 에반에게 새 잔을 내밀었다.

“그렇게 보여요?”

능글맞게 웃는 그 얼굴을 보며 현수는 잔 가득 술을 채워 줬다. 막 나타난 에반과 투덕거리던 시우는 몸을 뒤로 빼고 소파에 편히 기대앉았다. 그러곤 손에 들어온 자두를 야금야금 먹었다. 달달한 맛을 느끼는 시우의 눈꺼풀이 나른하게 깜박였다.

“그래 보였다니 다행인데, 내가 코코 많이 좋아하잖아요. 코코는?”

현수와 잔을 부딪치고 술을 마신 에반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뜨는 시우의 손에서 자두를 빼냈다. 즙이 가득한 자두를 반쯤 먹다 말았다. 옆에 있는 물티슈를 집어 젖은 시우의 손을 닦아 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

꾹 누르면 입력된 말이 튀어나오는 인형처럼 시우의 입에서 웅얼거림이 작게 피어났다. 그와 함께 작은 머리가 옆으로 톡 기울었다.

에반은 잠든 시우를 제 어깨에 기대 놓고는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만나면 하는 이야기는 비슷했다. 콘서트 준비, 앨범 준비, 방송국 피디 험담 및 이리저리 들리는 이야기들.

도롱거리며 잠든 시우의 머리가 꾸벅하며 흔들리자 에반은 아예 그의 어깨에 팔을 둘러 제 품으로 더 끌어안았다.

“너 신중하게 행동해라.”

바보가 아닌 이상 둘 사이의 그 미묘함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처음 그들의 만남부터 지켜본 이들이었다. 그 전에 이미 에반과 몇 년씩 알고 지냈다. 시우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에반에 대해서는 제법 안다고 생각했다.

“형. 선 넘지 마시죠.”

한마디 건네는 순간 경고가 들어왔다. 쯧, 이 모습이 에반이었다. 방금 시우에게 한 그런 행동은 그에게서 바랄 수 없는 그런 것들이었다.

홧김에 시우가 군대 간다는 말을 하려다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서 찬바람 쐬면서 담배나 한 대 피워야지. 어차피 눈 돌아간 알파에겐 어떤 말도 먹히지 않았다. 그걸 감내해야 하는 시우가 안쓰러웠다.

이들은 어떻든 언론은 진한 우정, 브로맨스로 열심히 덮을 것이다. 알파*알파, 알파*오메가가 아닌 이상 스캔들로 취급받지 않았다. 더군다나 알파의 대표 주자 에반과 베타? 그건 언론이 바라는 길이 아니었다. 우습게도 이 둘은 나서서 우리 사귀어요, 라고 대놓고 기자회견을 하기 전까진 주위에서 덮어 줄 것이었다.

문제는 에반은 대놓고 우리 사귀어요, 라고 기자회견을 할 놈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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