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세 스푼 같은 한 스푼을 넣는 걸 본 시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모른 척하자. 모른 척하자. 그러면 저 잘난 이마에 딱밤을 놓을 수 있다.
“우와. 맛있는 냄새.”
그럴듯한 냄새가 집 안으로 퍼지자 옹이를 안은 예찬이 둘의 뒤를 기웃거렸다.
“자! 떡볶이에 라면 들어가야 한다는 사람, 손.”
에반을 제외한 시우와 예찬이 손을 들었기에 자연스럽게 떡볶이에 라면을 넣은 시우의 시선에 어묵탕이 들어왔다. 어묵탕은 기본적으로 좀 뽀얀 색이 아니던가? 과하게 들어간 간장 때문에 갈색으로 보이는 국물을 애써 외면했다.
“아…….”
삶을 달걀을 까던 시우는 옆에서 들린 낮은 소리에 슬쩍 고개를 틀었다.
이 낯설지 않은 상황. 이 낯설지 않은 기운.
살짝 고개를 젖힌 에반이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그의 도마 위에는 매운 고추가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에반.”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 시우는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우리 이거 익숙한 상황인 것 같은데? 우리 최근에 이런 일이 있었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시우는 얼른 손을 씻고 물기를 닦았다. 그러고는 두 손을 위로 뻗어 에반의 양 볼을 감싸 자신에게로 당겼다.
“에반이 울어?”
“뭐?”
헛바람 소리와 함께 에반의 입에서 허탈한 말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자신의 볼을 감싼, 촉촉함이 남아 있는 작은 손이 누구 것인지 모를 리 없었다. 그냥 이 상황이 너무 웃기기도 하고 한편으로 긴장되었다.
시우가 먼저 자신에게 손대는 일이 좀처럼 없었기에 더 놀라고 당황했다.
급히 눈을 뜨는 순간 눈가에 고인 눈물이 흘렀다. 시우의 얼굴을 보고 싶지만, 눈이 매워 이내 금방 감아야 했다.
“우리 에반이 울보네.”
“이건 고추…….”
고추 때문이라고 말하려던 에반은 벙긋거리던 입술을 다물었다. 작은 손이 제 얼굴에서 곰실곰실 움직이더니 눈물을 닦은 것이다. 다음으로 손수건 같은 것으로 제 눈을 톡톡 두드려 주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둘이 뭐 해?”
어정쩡하게 상체를 숙인 채, 시우의 손에 얼굴을 맡기고 있는 에반을 보던 예찬의 시선이 시우에게로 옮겨졌다. 고추 썰다가 눈물 나는 거 흔한 일 아니야? 그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손수건으로 눈가를 톡톡 두드려 주는 건데? 다 양보해서 그럴 수 있는데, 왜 한 손은 그 얼굴 만지고 있어?
에반이 시우를 좋아하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이다.
그제야 둘이 슬쩍 떨어졌다. 이내 살짝 머리를 흔들고 눈을 뜬 에반의 시선이 예찬을 향했다. 이 눈빛 한번 받아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예찬은 오늘도 그에게 눈빛으로 욕을 얻어먹었다.
그리고 갑자기 뜨거운 떡볶이 떡을 포크로 집어 제 입에 디밀어 넣은 시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우걱거리며 씹어야 했다. 평소였다면 뜨겁다고 난리 치며 뱉었겠지만, 저를 죽일 것 같은 에반의 눈빛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에반이 썬 매운 고추가 어묵탕으로 들어가자, 시우는 얼른 씻어 놓은 쑥갓을 그 위에 올렸다. 떡볶이 떡과 라면이 붇기 전에 얼른 먹어야 한다며 서두른 예찬 덕분에 셋은 금세 식탁에 앉았다.
“이거 보세요. 비주얼부터가!”
아무래도 이런 것에 더 익숙한 예찬이 카메라를 들어 떡볶이와 어묵탕 근접 촬영을 했다.
“먹어 보고 어느 것이 더 맛있는지 말해 줘.”
시우는 얼른 음식들을 작은 접시에 덜어 예찬의 앞에 놓았다. 이제 내기의 결과가 나올 시간이다. 어차피 자신의 승리겠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형. 언제부터 어묵탕이 검은색이었다고.”
솔직히 검은색까지는 아니었지만, 예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먹어 보고 말고 할 게 어디 있는가? 더군다나 갑자기 시우가 입에 집어넣어 강제로 먹은 떡볶이 떡은 뜨거웠지만 맛있었다.
“그래도 말해.”
“뭐 둘이 내기라도 했어요?”
단호한 에반의 말에 예찬은 둘의 눈치를 보며 어묵탕의 어묵을 숟가락으로 떴다. 색은 이렇지만, 맛은 좋을지도 모르잖아. 거기다 쑥갓이며 매운 고추에 들어가야 할 것들은 다 들어가 있었다.
“우리가 무슨 내기를 해.”
“아. 근데 이건 처음부터 게임이 되지 않는 거 아녔어요? 인간적으로 떡볶이가 맛있죠. 시우 형 음식 다 맛있었는데. ‘Journey’ 촬영 때도 시우 형이 맛있는 거 많이 해 줬잖아요. 스파게티도 맛있었고.”
그래도 눈치가 있는 예찬은 어묵탕이 맛이 없다는 말보다는 시우의 음식이 맛있다고 말했다.
“떡볶이가 조금, 아주 조금 더 맛있다는 거지?”
방송 눈칫밥이 얼만데. 시우는 예찬의 말 속에 숨은 뜻을 파악하고는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애교까지 조금 섞어 말했다.
“아니. 형은 그걸 또 꼭 말로 들어야 합니까?”
그러는 순간에도 예찬의 수저는 떡볶이에 집중되어 있었다.
“여러분. 예찬의 대답은 더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 벌칙 건을 예찬에게 넘길게요. 솔직히 제가 딱밤 해 봐야 재밌을 것 같지도 않고요. 에반이랑 전 이미 체급이 다르잖아요. 비슷한 체급끼리 붙어야죠.”
시우는 생글거리며 카메라를 보고 말했다.
“뭐? 코코.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우리가 이런 사이였어?”
“뭐야? 진짜 내기였어요? 딱밤? 내가 에반 형을? 에이, 내가 어떻게 에반 형에게 딱밤을 먹여요.”
놀란 듯 구시렁거리는 에반에 이어 예찬이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왜 젓가락을 놓고 손을 푸는 거지?
“이게 제가 선출이라서 진짜 이래도 될까요?”
“선출?”
아예 의자에서 일어나 손목까지 돌리는 예찬을 보며 에반은 혀를 찼다. 오히려 그에게 벌칙을 넘긴 시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저 연습생 되기 전까지 교내 배구 선수였잖아요. 우리 배구부 코치님 저 그만둔다고 했을 때 집에까지 찾아오고 그랬는데. 어쨌거나 에반 형, 괜찮겠어요?”
허세 부리는 예찬에게 맞선다는 의미인지 드르륵, 일부러 의자 끄는 소리를 내며 일어난 에반을 보자니 아차 싶었다. 20대 초반의 일반적인 남자들도 이런 내기가 걸리면 불이 붙기 마련인데, 이들은 알파였다. 지금 알파들 기 싸움 붙인 거야?
“아니! 잠깐만. 그냥 내가 할게. 이거 에반이랑 내가 내기한 거고. 그러니까 내가! 내가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급히 그들을 따라 일어났지만, 시우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처음 시우의 말마따나 체급이 다른 두 남자가 마주 보고 섰는데, 고래 사이에 낀 새우 같은 꼴이었다.
예찬과 에반의 팔뚝을 잡았지만 이미 그들은 시우를 보고 있지 않았다.
“딱밤 맞고. 아무 소리 내지 않으면 네가 맞기 어때?”
“형! 저 배구부 선출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참으면 너도 딱밤 내기.”
이 일이 왜 이렇게 커질까요? 내기가 더 커졌다. 그럼 진짜 안 봐준다는 예찬이나 얼마든지 덤비라는 에반을 보며 시우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시우 형. 냉정하게 판독해야 하니까 카메라 줌인 딱 해서 들고 있어요. 소리 내는지 안 내는지는 돌려 보고 확인하자고요.”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찍겠다는 생각으로 시우는 전체적인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멀리 둔 카메라를 들고 왔다. 아무래도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찍는 것보다 비슷한 눈높이나 위에서 찍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아예 식탁 의자에 올라갔다.
“형. 가요.”
아예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쓸어 넘긴 에반이나 손을 풀고 딱밤을 때릴 거리를 가늠하는 둘의 표정은 엄숙할 정도로 심각했다.
“딱!”
“헙.”
거짓말 조금 보태서 수박 깨지는 소리가 난 것 같은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시우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방금 소리 누구지?”
“나.”
“빨리 돌려 봐요.”
셋은 나란히 머리를 붙이고는 카메라를 돌려 봤다. 그들이 들은 탄성은 시우의 것이 맞았다. 그리고 에반의 턱이 단단하게 굳으며 어금니를 질끈 깨무는 것을 확인한 예찬이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가렸다.
“이리 와.”
벌겋게 부어오른 이마를 한 에반이 한쪽 입꼬리만 슬쩍 올렸다.
“아니. 이걸 어떻게 참아요? 잠시만 에반 형. 진정해 봐요. 우리 이성적으로 생각하자고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이니까 그냥 이마 대라.”
“여러분, 하데스가 강림했어요. 시우 형,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다급한 예찬의 외침은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잠시 후.
시우는 양옆에 앉은 잘생긴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어디 가서 외모로 빠지지 않는 두 남자의 이마가 벌겋게 부어 있었다. 예찬의 눈꼬리엔 아직 눈물 자국이 달려 있었다.
“이제 제대로 맛을 볼까요? 요즘 ASMR이 유행이잖아요. 그래서 저희도 도전해 보겠습니다. 두 분 잘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최대한 작게 속삭이듯 말한 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는 둘을 보고 이어 진행하려 했다.
“에반 형. 우리 데시벨 내기는 어때요?”
“여기 측정기 없잖아.”
또 무슨 내기야. 그냥 시청자들 즐겁게 해 주면 되지.
“시우 형, 어플 깔면 되거든요? 어때요? 내기 콜?”
예찬의 도발에 시우는 식탁 아래로 손을 뻗어 에반의 팔뚝을 살짝 잡았다. 그러지 마. 예찬이 성격이야 원래 그렇다 치지만, 매번 거기 휘말리는 에반도 문제가 있었다.
“내기 조건은?”
시우의 노력이 무색하게 에반의 한쪽 입꼬리가 또 올라갔다. 와, 또 하데스. 에반의 말에 중얼거리는 예찬을 보며 시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에반의 별명 중에 하데스도 있나? 워낙 유명한 것이 3초맨이라 하데스라는 별명을 들어 본 적 없었다.
“시우 형 업고 스쿼드 하기.”
“콜.”
둘 사이에 낀 시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아무리 봐도 오늘 브이로그는 망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