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신호에 걸려 차를 멈춘 에반은 옆 차선을 보았다. 충분히 건너갈 수 있는 신호였다. 일부러 속도를 늦춰 신호에 멈춘 자신과 같이 옆 차선의 차는 지나갈 수 있었음에도 멈췄다.
파파라치가 따라다니는 건 알고 있었다. 평소 자신이 몰고 다니는 차도 아니고, 이 차는 오늘 나온 새 차였다. 시우와 같이 타기엔 스포츠카보다는 SUV가 좋을 것 같아서 일부러 구매한 것이다. 그런데도 따라붙었다고? 지긋지긋한 그들의 행태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출발하지 않았다.
“초짜네.”
같이 출발하지 않는 차를 확인하고서야 천천히 브레이크에서 액셀로 발을 옮겼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적어도 상도를 가지고 있는 파파라치일지 아니면 오늘만 사는 놈인지 예상할 수 없었다.
슬슬 속력을 내며 따라붙는 차를 백미러로 확인한 에반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차를 따돌리는 건 어렵지 않다. 파파라치 따돌리는 걸 한두 해 해 온 것도 아니고. 이제 슬슬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았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옹이. 안녕.”
뭐든 처음이 어렵다.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세 번 되는 건 참으로 쉬웠다. 술 취한 그를 데려다주고, 같이 브이로그까지 찍고 났더니 한층 가까워졌다. 언제든 그와 통화를 하고, 약속을 잡고, 시우의 집을 제집처럼 편하게 드나들었다.
‘Journey’ 첫 방송이 나가고 시우의 삶은 많이 바뀌었다. 아예 시우를 띄우기로 마음먹은 듯 편집 팀은 그의 분량을 파격적으로 많이 넣었다.
둘이 겹치는 장면들은 최소한의 편집으로 나가고 있었다. 본방에 싣지 못한다면 에피소드에라도 넣었다.
“뭐야? 나보다 옹이가 먼저야?”
슬리퍼를 끌고 나와 틱틱거리는 그 말에 에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 앞으로 다가온 그에게 종이 백을 넘겨주고는 커튼 앞으로 걸어갔다.
“커튼 좀 걷을까?”
“아! 아니야. 그냥 둬. 금방 가야 한다며. 과일이라도 먹을래? 대신 자두는 없어.”
웃음기 가득한 그 목소리를 듣는데 입 안이 썼다. 멤버들과 다 같이 본방을 보고 술 한잔을 했던 그날 이후 시우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벌써 몇 주째. 그는 이 집 안에만 있었다.
“아니. 너 보러 온 건데. 커튼 걷자. 어둡잖아.”
에반은 발아래에서 야옹거리며 장난치는 옹이를 안아 들면서 일부러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시끄러워서 그래. 시끄러워서. 소속사에 말해도 저 앞에 몰려 있는 사람들 어쩔 수 없다더라. 소란 피우는 거면 경찰에 신고해서 내쫓으면 되는데. 저렇게 죽치고 있는 건 어떻게 못 한대요. 아니 내가 무슨 슈퍼스타라고 이 난리야?”
시우의 솔직한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처음엔 억지로 그를 끌어올리면 다 될 줄 알았다. 자신이 어떠한 손을 쓰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방송에 노출되면서 시우의 인지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우는 자신의 예상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인기 같은 것은 초월한 사람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굴었다.
오히려 이 난리가 귀찮고 싫다고 했다. 그쯤에서 에반은 모든 걸 내려놨다. 그와 자신의 속도가 다르다면 시우에게 맞출 생각이다. 그렇게라도 그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친구라는 이름으로 언제든 원할 때마다 이렇게 이 집을 드나들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엉망진창으로 뒤집힌 제 속마음. 목을 죄는 것 같은 초조함을 숨기는 건 일도 아니었다.
“너 슈퍼스타 맞아. 이제는 나한테까지 전화해서 네 안부 묻던데?”
“싫다, 싫어. 조용히 살고 싶어요. 나 좀 내버려 두세요. 그런데 내 거는? 이거 다 옹이 거네.”
종이 백 가득 든 고양이 간식을 꺼내고 실망한 듯 풀 죽은 목소리에 에반은 소리 내어 웃었다. 이 모습이 시우였다.
“저녁 먹으러 나가자. 나 지금 가서 스케줄 하고 데리러 올게.”
“뭐? 과일 먹을 시간도 없어? 그럼 유자차 보온병에 넣어 줄까? 이럴 거면 왜 왔대? 옹이 츄르 주러 온 거야?”
냉장고를 뒤지던 시우는 손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한 손에는 옹이를 들고 언제 가까이 온 것인지 제 뒤에 서 있는 에반을 보고 주춤거리며 옆으로 물러섰다.
얘는 왜 소리를 안 내고 다녀.
“츄르는 핑계. 너 보러 왔지.”
낯 뜨거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에반을 본 시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유자차가 든 병을 꺼냈다. 그냥 우정이다. 친구로 그의 옆에 있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모든 것이 편해졌다.
그가 보고 싶은 것도,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것도, 이렇게 같이 있고 싶은 것도 모두 우정이라는 이름에 집어넣었다. 그랬더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심장이 쿵쾅거려도 그를 보며 웃을 수 있었다.
“너 연애하면 장난 아니겠다. 누군지 몰라도 아마 하루에도 수십 번 심장이 나대서 미쳐 버릴 거야.”
작은 보온병도 꺼내고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느라 분주한 시우와 다르게 아일랜드 식탁에 기댄 에반은 고요하기만 했다.
“연애하면 좋겠어?”
커다란 머그잔에 유자차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리고 긴 티스푼으로 젓던 시우의 손이 멈췄다.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뭐냐. 네가 연애하는데 내 허락이 왜 필요해? 꼭 나더러 허락해 달라는 것처럼 들리네. 과일 먹을 시간 진짜 없어? 냉장고에 망고 있는데.”
뜨거운 물에 잘 녹은 유자차를 조심스럽게 보온병에 옮겨 담았다. 진욱 형에게 일부러 망고를 사 달라고 했다. 열대 과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어느 순간부터 늘 냉장고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에반이 좋아하는 과일이니까.
“네가 하지 말라면 안 하지. 잘 있는 거 봤고, 옹이 선물도 줬고. 갈게. 늦어도 7시까지는 연락할 테니까 저녁 나가서 먹자.”
보온병 뚜껑을 꼭 닫은 시우의 손에서 보온병이 빠져나갔다. 그냥 보온병만 가져가지. 자신의 손등을 덮었던, 열감 있는 손길이 남긴 아쉬움에 얼른 다른 손으로 제 손등을 감쌌다.
“안 나가는 거 알면서 그래.”
“그러니까 나오라고. 조용한 곳으로 예약해 뒀어. 곱게 저녁만 드시게 하고 집에 돌려보내 드릴게요. 시우 씨.”
보온병을 살짝 흔들며 하는 그의 말에 시우는 웃어 버렸다. 그가 어색하고 불편한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저 능글맞음을, 저 미소를 미워할 수 없다. 말을 하지 않아도 대놓고 표현하지 않지만, 그가 어떤 기분으로 어떤 생각으로 왔는지 안다.
옹이를 핑계로 정말 자신을 보러 온 것이다. 갑자기 잠수 타 버린 자신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대중의 관심이 저에게 쏠리자 선택한 것이 자발적 감금이었다. 그럴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자신은 그랬다. 제 선택은 숨는 것이었다.
12월 말.
입영 날짜가 나오고 난 이후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다녀오면 지금의 이 관심은 사그라들 것이 분명했다.
‘Journey’ 멤버에게 연락이 오고, 다들 자신의 안부를 묻지만, 이렇게 무심히 찾아오는 사람은 에반이 유일했다. 오늘은 옹이 간식이었지만 그는 빈손으로 오는 일이 없었다.
과일. 유명한 음식점에서 일부러 포장해 온 음식. 사흘 전엔 게임기까지 사 주고 갔다. 왜 이리 저에게 관심이 많냐고 묻지 않았다. 왜 이리 잘해 주냐고도 묻지 않았다. 그냥 그가 주는 걸 고맙다는 말과 함께 받았다.
“대답.”
정말 시간이 없는지 곧장 현관으로 가는 그를 따라가자니 웃음기 가득한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알겠어.”
어떻게 그걸 거절하겠어. 다른 것도 아니고 네가 하는 말인데.
“코코. 예쁘게 하고 있어. 데이트하자.”
문이 닫히기 전 손을 흔들며 하는 그의 말이 가슴에 박혔다. 농담인 걸 아는데, 그의 말버릇이 그렇다는 것도 아는데.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볼에 열이 올라 두 손으로 볼을 꾹꾹 눌렀다.
나를 길들여 줘…….
가령 오후 4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그러나 만일, 네가 무턱대고 아무 때나 찾아오면
난 언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니까…….
『어린 왕자』 -생텍쥐페리
약속. 저녁 7시 전에 연락을 준다는 약속.
시우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11시 27분. 『어린 왕자』의 여우가 된 기분이다. 여우는 한 시간 전부터 행복해졌지만, 저는 벌써 행복했다.
시우는 무겁게 드리운 커튼 앞으로 다가갔다. 지금까지 이렇게 찾아왔지만, 같이 나가자고 말한 건 처음이다. 커튼을 옆으로 밀자 햇살이 밀려 들어왔다. 넓은 길에 차들이 빠르게 지나다녔고, 길을 오가는 사람이 보였다.
계절이 변했다. 사람들의 옷이 두꺼워져 있었고, 나뭇가지엔 나뭇잎이 몇 개만 아슬하게 달려 있다. 민간인으로 자유롭게 다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느낄 새도 없이 사라져 버린 가을을 아쉬워하기보다 남은 한 달을 즐겨야 할 것 같았다.
인기라는 것은 시우에겐 참으로 두려운 것이었다. 잠시 짧게 미친 듯이 타오르다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자 탐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던 시우는 요란스럽게 울리는 휴대전화 액정에 뜬 사람의 이름을 확인했다.
타이밍 한번 귀신이네.
“그때 약속한 거 지금 쓰자.”
기획사 대표 태훈 형의 전화에 시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네?”
“입대 전에 CF 하나만 찍고 가.”
“네.”
어떤 것인지, 누구와 하는지, 금액이 어떻게 되는지 그런 건 묻지 않았다. 약속이니까. 제멋대로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카락부터 잘라야겠다. 손으로 머리를 쓱쓱 쓸어 넘긴 시우는 젖혔던 커튼을 다시 쳤다.
모처럼의 외출이니까. 아마 사진이 찍힐 것이다. 그러니까 절대 에반이 예쁘게 하고 데이트하자는 말을 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혼자 중얼거리며 시우는 진욱 형에게 연락을 넣었다.
숍부터 예약해 달라고. 머리를 하고 옷도 사 입어야겠다. 절대 이건 에반을 위한 것이 아니다. 기분 전환. 오랜만에 나가는 자신을 위한 것이라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