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현수는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에반의 앞에 술잔을 놓았다.
만나서 지금까지 둘은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에반은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고, 현수 역시 가는 곳을 밝히지 않았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바의 룸에 있는 지금도 둘 사이에 맴도는 것은 침묵이었다.
“거래 조건이 뭐야?”
술잔을 든 현수는 창가에 기대서 밖을 내려다보았다. 아름다운 불빛이 가득한 밤이 펼쳐졌다. 잔잔히 흐르는 강 위로 유람선이 지나가는 것에 시선을 뒀다. 유유히 움직이는 유람선을 따라 현수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없어. 그냥 한창 인기 얻기 시작한 신인 확실하게 띄워 주기라고 해야 하나?”
대답하지 않을 줄 알았던 에반의 말에 그의 눈썹이 슬쩍 움직였다.
“몇 달 연인인 척하다가 결별 선언 코스네. 뭘 덮으려고? 너까지 끌어들인 거면 큰 건일 것 같은데.”
에반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유리잔만 빙글빙글 돌렸다. 유리잔 안에 든 얼음이 달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시우 때문에 그래?”
이어지는 현수의 질문에 그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시우. 그래. 시우.
내 사람. 내가 살아 있는 이유.
어쩌면 지긋지긋한 회귀가 멈춘 이유.
“코코한테 전화 좀 해 봐요.”
“안 받더라. 나만 해 본 게 아니고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예찬이야. 한데 예찬이에게도 별말 하지 않았대. 솔직히 네가 시우한테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너 정말 시우 좋아해? 특별한 감정 있는 거냐고.”
술잔을 다 비운 현수는 테이블로 다가가 다시 술잔을 채웠다. 그리고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가 시선을 밖에 두었다.
“특별한 감정? 좋아해? 글쎄. 그런 단어로 설명되는 건가?”
비꼬는 듯한 에반의 말투에 현수는 혀를 찼다.
시우와 에반의 사이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에서 에반이 절대적인 약자로 보였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유죄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랑?”
떠드는 사람은 현수였고, 듣는 이는 에반이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하자 에반이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엄청나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은 듯 큰 소리로 웃었다.
“에반.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이건 아닌 거 같아. 알파와 베타가 사귈 순 있어. 그런데 오래가는 걸 본 적이 없어. 형질이 그냥 있는 게 아니야. 무시하기엔 영향력이 너무 크다고. 유리는 아니야? 그럼 어떤 스타일 좋아해. 내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얼마든지 소개시켜 줄게. 그리고 너도 알잖아. 네 소문. 오메가에게 아예 반응을 안 한다며. 솔직히 다들 쉬쉬하면서 모른 척하는 거 그거잖아. 혹시 문제 있어?”
은밀한 이야기를 하는 듯 현수의 말은 끝으로 향할수록 작아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제라고 말할 때 그의 표정은 뭐랄까 미묘했다.
“형.”
시원하게 웃던 에반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무표정. 어떤 감정도 담지 않은 굳은 표정을 마주한 현수는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소파에 편하게 기대앉아 긴 다리를 꼰 에반의 시선이 창 너머 어두운 밤하늘에 닿았다. 화려한 야경에 별빛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하늘엔 반달만 걸려 있었다.
현수는 그에게 어떤 대답을 재촉하기보다 술을 홀짝거리고 마시며 빠르게 움직이는 차들을 보는 것에 열중했다.
“내 거야. 시우.”
“야. 무슨 사람을…….”
“내 거라고.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사람. 어릴 때부터 찾아 왔던 사람. 나 아니면 안 되는 사람. 아니, 앞에 말한 것은 모두 반대야. 코코는 내가 없어도 되지만, 난 없으면 안 되는데. 모를 땐 어찌어찌 살아갔을지 몰라도 알아 버린 지금은…….”
낮고 작은 목소리였지만 귀에 정확히 들렸다. 하지만 결국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넋두리인지라 허탈한 웃음이 현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미친 소리로 들리려나.”
“그냥 시우한테 가서 솔직하게 네 감정 말하고. 차이고 깨끗하게 마음 정리 하든 아니면 뭐 알콩달콩 연애해. 말린다고 될 일도 아닌 거 같고. 혼자 이러고 있지 말고. 너 시우한테 그런 네 감정 말해 본 적도 없지?”
현수의 질문에 에반은 앞에 든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그가 다시 잔을 채워 주기도 전에 혼자 몇 번이나 잔을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했다. 그러고는 입을 닫고 밤하늘에 시선을 뒀다. 둘은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았다.
“시우 페로몬이 얼마나 달콤한지 알아요?”
이번에 침묵을 깬 사람은 에반이었다.
“뭔 헛소리야. 시우 오메가 아닌 거 세상이 다 아는데.”
“누가 그래요?”
“야. 걔 조금 있으면 군대 간대. 지금 당장 검색해 봐. 김시우 베타인 거 자기 입으로 말한 동영상…….”
“개소리.”
에반은 단호한 목소리로 현수의 말을 끊어 버렸다. 밤하늘을 보던 그의 눈은 편안하게 감겨 있었다.
“그리고 오메가에게 반응하지 않는 거 인정.”
오늘따라 이상하게 행동하는 에반을 보는 현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창가에 기대 있던 몸을 움직여 그의 맞은편에 앉아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형도 익숙하긴 하겠다. 히트 사이클인 오메가들이 겁도 없이 덮치는 거. 그것 때문에 매니저들이 환장하지. 우리도 미쳐 버리겠고 말이야. 팬 사인회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상태로 오는 건지. 알파나 오메가가 페로몬에 미쳐 버리는 짐승 같은 놈들이긴 해도 말이야. 아! 이 말을 하려던 건 아니고.”
눈을 감은 채, 현수에게도 익숙한 일을 에반은 말했다.
스스로를 팬이라고 칭하면서 최악의 일을 벌이는 이들이 있었다. 집으로 찾아오고, 공항으로 찾아오고, 사생활에 거침없이 침입하는 이들은 상상하지도 못한 일을 저지르곤 했다. 히트 사이클에 페로몬을 미친 듯이 뿌리면서 달려드는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알파로 태어났고, 2차 발현에서 골든 알파로 판정받았죠.”
그렇게 에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에반의 삶에 어려움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세계적인 그룹을 운영하는 귀족가의 둘째 아들의 위치는 그랬다. 위로 알파 형이 있었기에 과한 기대감이 그의 어깨를 누르는 일도 없었다.
그저 건강하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 되었다. 물론 집안에서는 그도 가업을 잇길 원했지만, 그것 역시 에반이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미래의 선택지 중 하나였다.
그런 그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2차 발현이 끝난 이후였다. 그 전까지는 그 누구도 몰랐던 일이 그에게 일어난 것이었다. 그는 페로몬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오메가의 페로몬을 맡지 못했다. 알파의 페로몬은 인지했지만, 이상하게 오메가의 페로몬을 느낄 수 없었다.
어떤 노력을 해도 그건 불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에반에게 오메가는 베타와 다름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 히트 사이클인 오메가와 좁은 공간에 있어도 그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알파에게 축복일까 저주일까.
처음 살았던 삶에서 그의 청소년기 대부분의 문제는 이 형질과 관련된 것이었다. 병원에 다니고 검사를 하고. 그에게 생긴 이상에 관한 답을 찾아내는 것에 몰두했다.
두 번째 삶에서도 그랬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에반은 자신에게 있는 문제를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말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몰랐다.
“형 페로몬은 커피 향이죠.”
에반은 현수에게 페로몬을 맡지 못하는 이야기는 털어놓았지만, 회귀에 관한 것은 말하지 못했다.
“커피지, 커피. 덕분에 나중에 연예인 그만두면 카페나 할까 봐.”
현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술을 더 마시는 것보다 차가운 물을 들이켜는 걸 선택했다. 지금이 아니면 두 번 다시 에반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귀를 기울여야 했으며, 지금 그가 꺼내 놓는 이야기들은 결코 가벼울 것 같지 않았다.
“아!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어쨌거나 답은 찾았죠. 뭐가 문제인지 알았으니까. 그런데 고칠 방법이 없더라고요.”
현수는 물을 선택했지만, 천천히 눈을 뜨고 몸을 바로 세운 에반이 선택한 것은 술이었다.
“한번 맞혀 봐요. 시간 줄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네 눈에 내가 페로몬 전문 의사인 것 같아? 오메가 페로몬만 맡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방금 알았는데. 내 주위에 골든 알파는 네가 처음이라고. 다들 네가 골든이 아닐까 생각만 했지. 네가 네 입으로 밝힌 게 없었잖아. 그런데 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포크로 사과를 찍던 현수의 행동과 말이 동시에 멈췄다. 그리고 현수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마주 앉아 있던 에반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왜? 뭐 생각난 거 있어요?”
취기가 도는지 평소보다 조금 더 커진, 어둠이 내려앉은 에반의 초록빛 눈동자가 빛을 받아 묘한 색으로 반짝였다. 마치 재밌는 장난을 치는 것 같은 짓궂은 어린아이의 표정이었다.
“너 아까 시우 페로몬 이딴 헛소리 했잖아.”
순간적으로 현수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그것이었다. 분명 베타인 시우에게 말도 안 되는 페로몬 이야기를 꺼낸 건 에반이었다. 그리고 그는 방금 오메가의 페로몬을 맡지 못한다고 말했다.
“알파야?”
왜 시우를 오메가라고만 생각했지? 그가 알파일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왜 아무도 그에게 알파냐고 묻지 않았지? 다들 오메가냐고만 물었고. 하지만 시우는 항상 자신이 베타라고 밝혔다.
에반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곧이어 그는 무려 박수까지 쳤다.
“아쉽다. 조금만 더 머리를 굴리지 그랬어요.”
“뭐야. 진짜 알파였어? 시우도 골든 알파다, 뭐 그런 말 할 건 아니지.”
집어 들었던 포크가 떨어지면서 유리 접시와 부딪쳐 날카로운 소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제법 요란한 그 소리는 그것보다 훨씬 큰 현수의 목소리에 묻혔다.
환하게 웃는 에반의 입술이 달싹였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움직이는 입 모양을 따라 읽던 현수는 눈만 깜박거렸다.
“히든 오메가.”
방금 에반은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