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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64화 (64/187)

64화

[2부]

“형.”

“……형.”

“시우 형.”

시우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언제 감았는지 모르겠지만, 눈을 감았었나 보다.

가을비가 세차게 내렸고, 에반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입술. 에반은 제게 어떤 말을 했다. 무척이나 중요한 말이었던 것 같은데…….

‘나의 페어.’

나의 페어. 딱 떠오르는 것은 그 말이었다.

“시우 형! 어서 일어나요.”

연이어 자신의 어깨를 건들고 말을 거는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재촉하는 말에 상체를 일으켜 앉은 시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난 너만 아니면 될 것 같아.’

방금까지 에반과 나누었던 말들이 뒤엉킨 채 머릿속을 떠다녔다.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이 서서히 내려가다 입술에 닿았다.

“형!”

옆에선 계속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파스텔 톤으로 꾸며진 방은 처음 보는 곳이다. 창에는 짙은 회색 암막 커튼이 드리워 있고, 자신이 덮고 있는 이불은 민트색이다. 창가 쪽에 있는 책상엔 노트북이 열려 있다.

반대편에는 화장대. 그 옆으로 가면 드레스 룸이 나올 것 같은 구조였다.

이곳은 방금까지 제가 있던 자신의 서재가 아닌 누군가의 침실이다.

“시우 형!”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시우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르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예찬?”

느리게 깜박이던 시우는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자신의 옆에는 여전히 예찬이 서 있었다.

에반이 아닌 예찬이 이 낯선 곳에 자신과 있다.

깨어나지 않는 꿈 같은 몽롱함에 시우는 두 손으로 자신의 눈을 비볐다.

“아유, 잠 좀 깨 봐요. 처음부터 내가 깨우러 왔어야 해. 괜히 찬이 형보고 대신 깨워 달래서는. 형, 빨리 준비하고 나와요. 알겠죠?”

눈앞에서 길고 단단한 손가락을 튕겨 딱딱 소리를 내며 시우의 관심을 끌었다.

시우는 자신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는 예찬을 응시했다.

제가 알던 모습과 다르다. 얼굴과 체격, 그런 것들은 그대로지만, 금발로 변한 머리카락 색과 파란 눈동자는 제가 아는 것이 아니다.

“어디 아파요?”

걱정스러운 표정과 목소리로 제 얼굴로 가까이 다가오는 예찬의 행동에 시우의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찰싹―.

손바닥이 따가웠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표정 대신 놀라고 당황한 표정을 한 예찬이 한 손으로 자신의 볼을 감싸고 있었다.

“아…….”

허공에 손을 멈춘 시우는 소처럼 커다란 눈을 껌벅거리고 있는 예찬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갑자기 다가와서 자신도 모르게 그의 뺨을 때린 것이다.

“미…… 미안.”

제대로 된 목소리로 흘린 말이 아니었다. 헛바람이 잔뜩 들어간 자조적인 목소리로 시우는 저도 모르게 웅얼거렸다.

“형! 왜 때려요. 싫으면 싫다고 말로 하지. 찬이 형! 시우 형이 나 때렸어!”

커다란 소리로 징징거리며 몸을 돌려 나가려는 예찬을 향해 허겁지겁 손을 뻗었다. 이내 듬직한 그의 손목이 잡혔다. 자신을 보는 그 파란 눈동자가 너무 낯설었다.

지금 무언가가 잘못된 것 같아.

“오늘 며칠이야?”

생각을 거치지 않고 한마디 툭 뱉었다.

“7월 2일이요.”

제 질문이 이상하지 않았는지 예찬은 곧바로 날짜를 말했다.

하지만 시우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가을이었다. 차가움이 가득 묻어나는 가을비가 내리던 밤.

“너 몇 살이야?”

“형, 무슨 꿈 꿨어? 나 강예찬 열아홉 살. 형은 김시우 스무 살. 뭐 또 말해 줘요?”

한 손으로 얼떨결에 맞은 볼을 감싸고 다른 손은 시우에게 잡힌 예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늘 늦게 자는 시우는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하는 편이었다. 오늘따라 영 잠에서 쉽게 깨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형. 꿈에서 잘 안 깨나 보다. 일단 일어나서 씻으면 깰 겁니다. 일어납시다.”

시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날짜가 변했다. 무엇보다 자신과 예찬의 나이가 변했다. 이 상황에서 예찬이 제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예찬은 시우를 침대에서 일으켜 세웠고, 방 한쪽에 있는 문 앞으로 데려갔다.

“에반은?”

“에반 형은 왜 찾아요?”

등을 툭 치는 예찬의 힘에 떠밀려 욕실로 들어간 시우는 등 뒤로 문이 닫히자 그대로 주저앉았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아직도 예찬의 볼을 때린 손바닥이 얼얼했다. 이건 꿈이 아니란 것인데. 굳이 제 볼을 때리거나 꼬집을 이유가 없다.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면.

분명 자신은 스물세 살이었고, 에반과 함께 있었다.

지금껏 반복된 회귀는 늘 자신의 지하 단칸방에서 열여덟 살의 김시우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곳은 위치도 다르고 나이도 달랐다.

그랬지만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회귀.

꿈이 아니면 회귀.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일단 옷을 벗고 샤워 부스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지자 몽롱하게 남아 있던 잠기운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거품이 잔뜩 인 샤워 볼로 몸을 문지르는 시우의 머리는 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빠르게 돌아갔다.

예찬과 자신의 나이 차는 한 살. 현재 그는 열아홉 살이고 자신은 스무 살이라고 했다.

그리고 오늘은 7월 2일.

찬이. 분명 예찬은 찬이 형이라고 말했다.

그는 누굴까? 지금 상황은 어떤 것일까? 다른 사람도 아닌 예찬이 여기 왜 있지? 이곳은 ‘Journey’ 촬영장도 아니다.

수많은 의문이 계속 이어졌다.

수없이 회귀했지만, 회귀 시점이 그리고 상황이 바뀐 건 처음이다.

샤워를 끝내고 거실로 나간 시우는 문 앞에서 멈췄다.

넓은 거실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찾을 수 있었다.

예찬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면서 짐을 정리하고 있다.

찬. 이 찬.

예찬과 대화 중인 사람을 확인한 순간 시우는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예찬의 짝사랑 상대인 이 찬. 이 찬이 왜 여기 있지? 예찬은 조금 전 찬이 형이라고 말했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상황에 시우는 한 손으로 머리를 마구 쓸어 넘겼다.

회귀도 익숙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도 이제는 익숙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미 타인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서 시우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시우. 뭘 그렇게 서 있어? 준비는 다 했어?”

멍하니 서 있던 시우는 제게 말을 거는 사람을 확인하고는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 사람 역시 아는 사람이다. 에반의 매니저 박명훈. 자신에게 그와 멀어지라고 경고했던 자.

“명훈 형.”

시우가 대답하기 전 누군가가 그를 불렀고, 그는 몸을 돌려 멀어졌다.

“이거 갖고 가도 돼요?”

“아서라, 그걸 왜 갖고 가? 잠시 촬영만 하고 올 건데. 너 혼자 여행 갈 때나 챙겨.”

명훈과 대화를 하는 사람까지 본 시우의 입에서 지금껏 참고 참았던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여전히 대화 중인 예찬과 찬. 둘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예찬이 뭐라고 한 것인지 찬은 장난스럽게 예찬의 어깨를 툭툭 쳤다.

명훈과 대화 중인 이는 유상준이었다.

활동명은 SJ. 그는 솔로로 활동하던 싱어송라이터였다.

내는 곡마다 히트했고, 다른 가수들과의 작업도 왕성히 했고, 한때 시우도 같이 작업하고 싶어 했다.

그런 그는 왜 여기 있으며 다들 너무나도 친해 보였다.

“시우 형. 아직 꿈속이야? 에반 형 만나서 그래요? 그래도 이번엔 일주일이나 떨어져 있었잖아요.”

계속해서 그 자리에 서 있던 시우는 제게 활기차게 말을 거는 예찬을 바라보았다. 그 한쪽 뺨이 유독 붉고 부어 보이는 건…….

“어. 좀 피곤하네.”

“어제도 혼자 늦게까지 연습실에 있더라니. 연습은 솔직히 내가 해야지.”

갑자기 그렇게 뺨을 맞았으면 화낼 만도 한데, 그의 밝은 성격은 그대로였다.

희희낙락거리면서 놀다가 사라지더니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그를 보며 시우는 천천히 제가 나온 방으로 돌아갔다.

방 한쪽에 있는 커다란 여행용 캐리어. 그리고 그 위에 올려진 백팩을 보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디로 가는 거지?

일단 이 방이 자신의 방인 것을 알았기에 시우는 백팩을 열었다.

검은색 지갑을 찾아 꺼냈지만, 쉽게 지갑을 열어 볼 수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지갑을 연 시우의 얼굴엔 미묘한 표정이 서렸다.

생년월일도 부모님과 함께 살던 주소지도 연락처도 모두 제가 아는 것이긴 했다. 그리고 백팩에는 여권도 있었다. 여권이라면 비행기를 탄다는 말이고, 그건 멀리 간다는 소리인데, 어떤 일로 가는 것일까?

생각에 빠져 있을 여유도 없이 노크도 없이 방으로 들어온 예찬에게 이끌려 시우는 그들과 함께 움직여야 했다.

밴에 오른 시우는 뒷좌석으로 가려다 이 찬에게 잡혔다.

“넌 앞자리.”

“시우 형. 오늘따라 이상해.”

뒷좌석으로 들어가 찬 옆에 앉으며 예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떨결에 앞 좌석에 앉은 시우는 긴 한숨을 쉬었다. 제가 모르는 시간이 너무 많다.

제일 늦게 나온 상준이 조수석에 앉는 것을 보고 비어 있는 옆자리를 응시했다.

남은 빈자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것 같으니까.

여러 명이 오랜 시간 같이 움직이면 미묘한 법칙이 있다.

은연중에 정해져서 고정되어 버리는 암묵적인 룰.

차를 타고 이동할 때 앉는 자리라든가 촬영 때 서는 자리 같은 것들. 그러니까 이들에겐 벌써 그런 것이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묵직해졌다.

어디로 가는지도 묻지 못했다. 또 이상하게 여길까 봐.

하지만 차는 시우의 예상대로 인천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동 시간은 대부분 각자 알아서 시간을 보내기에 시우는 얼른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잠시 후.

시우는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생각보다 복잡하다.

그 무엇도 시작되지 않은 상황이면 좋겠는데, 너무 많은 일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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