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팬들이 본 그들의 관계성은 그리 좋지 못했다.
서로를 무시하고 신경 쓰지 않거나 무심하게 있는 것들. 또는 시우가 봐도 고개를 갸웃할 정도의 미묘한 불편함이 감지되는 영상들이 즐비했다.
둘은 마주 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장면도 없었다.
장난을 주고받는 것도 없어 보였다. 정말 사무적으로 일만 하는 관계의 사람들 같았다.
한참 영상을 보던 시우는 보고 있던 화면을 껐다.
영상에 담기는 모습은 충분히 곡해될 수 있다. 편집의 이유일 수도 있고, 그룹 활동을 하다 보면 당연히 다툼이 있고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방송할 때도 많았다.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자신이 모르는 에반과 시우가 같이 활동하는 영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생생하게 감정이 살아 날뛰는 상황이 겹쳤다. 시우의 손끝이 아랫입술에 닿았다. 그리고 말랑하게 뭉개지는 자신의 입술 감각을 느꼈다.
“하…….”
이제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만지작거리던 휴대전화를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덮고 있던 담요를 머리끝까지 끌어 올려 썼다.
어차피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또 회귀하게 될 삶. 인기는 확실하게 보장된 오션 멤버로서의 기회가 제게 주어진 것이다.
나도 그럼 갓 아이돌로 살아 보자. 세상 사는 거 뭐 있어? 돈도 많이 벌고 인기도 얻고. 또 살아 보자. 두고두고 우려먹을 추억이나 만들자고. 어설픈 사랑놀이도 해 보긴 했잖아.
잠이나 자자.
한동안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다. 그러니 이럴 때 충분히 쉬어야 했다.
* * *
에반은 멍하니 서 있었다. 허공에 어설프게 떠 있던 두 팔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방금까지 자신의 품에 있던 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전해 주던 온기가, 불안한 듯 여리게 떨리던 몸이. 그리고 맞닿았던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모두 허상처럼 여겨졌다.
비가 오는 늦은 밤.
시우의 집. 그의 서재에 있었다.
둘은 마주 보고 있었고…….
생각을 멈춘 에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국에 있는 부모님 댁의 자신의 방.
회귀할 때면 에반은 항상 영국에 있는 부모님 댁의 제 방으로 돌아왔다.
“빌어먹을.”
몰려오는 허탈감에 거칠게 욕을 내뱉은 에반은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인형을 걷어찼다. 일곱 번째 생일에 받은 커다란 곰 인형은 늘 그렇게 그 자리에 있었다.
인형이 옆으로 쓰러지든 말든 에반은 큰 보폭으로 방을 서성거렸다.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설명할 타이밍이었다.
천천히 모든 것을 하나씩. 그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충분히 이해하도록 몇 시간이고 몇 번이고 말할 기회였다.
방을 서성이던 에반은 책상 위에서 휴대전화를 찾았다. 지금 자신이 쓰던 것보다 예전 모델임을 확인하자 입 안이 씁쓸해졌다.
모든 것이 회귀에 맞춰졌다.
패턴을 푼 휴대전화에서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날짜였다.
순간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는 이름의 아는 번호.
오션 총괄팀장 허재형.
“네.”
창가로 걸어간 에반은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정원을 관리 중인 정원사를 잠시 바라보던 그의 시선은 이내 시원하게 물을 뿜어내는 분수에 닿았다.
가을이었는데, 지금은 여름이다.
본가에서 키우는 강아지 러쉬가 정원사 아저씨를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는 모습을 보니 헛웃음만 나왔다.
진짜 돌아왔다고? 도대체 왜? 뭐가 문제여서?
회귀가 멈춘 것이 아니었나?
“애들 픽업하는 것도 카메라 붙을 거니까 준비하고. 알아서 공항으로 시간 맞춰 온다고? 그냥 나랑 움직이는 게 어때?”
“아뇨. 몇 시였죠? 맞춰서 공항으로 갈게요.”
길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대충 대답했다.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날짜를 확인했을 때, 자신은 스무 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아마도 오션으로 데뷔했을 것이다. 더 알아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더군다나 허재형이 전화하지 않았는가.
회귀.
그것이 아니라면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해야 한다.
이름도 학교도 이미 그의 과거에 대해서 알기에 지금 제가 할 일은 한국으로 가 그를 찾는 것이다.
통화를 끝낸 에반은 나갈 준비를 했고, 공항 대기실에서 재형을 만났다.
다시 시작이다. 결승점에 도달하기 직전이었지만,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갔다.
그가 자신의 페어인 것을 알았을 때부터 다짐했다. 혹시나 회귀하더라도 그를 다시 찾으면 된다고. 그리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오션 멤버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면서도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사람은 시우였다.
“일정 어떻게 돼요?”
초조하고 불안하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시우는 지금 대학생일 것이다.
대학생이 되고 첫 여름방학.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친구들과 여행을 갔을까? 어학 공부 중일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도 형식적으로 재형에게 물었다.
“도착하는 대로 애들은 호텔로 들어가서 좀 쉬고, 늦은 저녁에라도 짧게 촬영할까 했는데, 일정이 좀 꼬여서 오늘은 촬영이 힘들 것 같네.”
“촬영요?”
그의 대답에 에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영국에서 촬영한 기억이 없다. 무슨 촬영이지?
“CF부터 찍으려고 했는데, 장소 섭외가 꼬였다고. 화보부터 찍어야 할 것 같아.”
“네.
건성으로 대답하며 에반은 카메라를 흘깃 보았다. 지금은 정식 촬영이 아니다. 그냥 에피소드를 만들기 위해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에반은 슬쩍 몸을 돌려 카메라를 등지고 섰다. 재형과의 대화를 담고 있긴 하지만, 어차피 소속사에서 찍는 것이고 문제가 될 건 없었다.
피로감이 강하게 몰려들었다. 몇 시간이라도 혼자 조용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 촬영이 취소되었고, 내일부터라면 제게 시간이 주어진 셈이다. 적당히 멤버들을 만나는 모습을 찍고 빠지면 되겠지.
“한국 들어가는 것도 연기돼요?”
한시라도 빨리 한국으로 가고 싶었다. 시우를 만나고 싶다. 비록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까지 연기하면 골 때리지. 일정 안에서 어떻게든 다 해결해야지. 참, ‘루시퍼’ 진짜 네가 안 할 거야?”
“안 해요.”
루시퍼.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에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루시퍼’가 데뷔곡이었다. 뭐가 바뀐 건가? 나이를 생각했을 때, 데뷔 3년 차는 된 것 같은데. 머리가 지끈거려 손을 올려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진짜 시우가 ‘루시퍼’를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 가능할 것 같으면서도 참 묘하단 말이야. 너도 알잖아. 그 딱! 처음 봤을 때, 그 강렬함이 시우는 아쉬워서 말이야. 차라리 예찬이가 어때?”
관자놀이를 누르던 에반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다른 곳을 보고 있던 그는 어느새 재형을 바라보았다. 방금 누구라고?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시우? 예찬? 갑자기 그들의 이름이 왜 나오는 것일까?
“예찬?”
“걔가 요즘 운동해서 몸도 더 키웠잖아. 상의 벗기고 날개 달아 주면, 확 끌릴걸?”
재형은 태블릿을 보면서 대답했다. 태블릿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비슷한 이미지를 찾는지 날개를 단 제스처를 하고 찍은 사진 여러 개가 떠 있었다.
“참, 너 시우랑 갈 곳 있다며. 둘이 갈 거면 지금 바로 갔다가 저녁 전에 호텔로 들어와. 에피 촬영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저녁은 먹지 말고.”
“시우?”
같은 사람의 이름이 또 나왔다. 일정하게 뛰고 있던 에반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점차 빨리 뛰기 시작했다.
“네가 비밀로 해 달래서 시우한테는 말 안 했어. 말해 봤자 시우는 싫다고 할 게 뻔하고. 어쨌거나 둘이 사이좋게 좀 지내라. 둘 다 왜 그러냐, 진짜.”
시우. 에반이 아는 시우는 단 한 명이다. 그런데 시우라니? 왜 시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지? 거기다 사이가 안 좋아? 타인이 이렇게 말할 정도로?
과거가 변했다. 열여덟이 아닌 스무 살이라는 나이의 변화가 있었지만, 부모님 댁 자신의 방이었기에 회귀의 내용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 이제 와서 마음 바뀌었어? 하긴 너희 둘이 있어 봐야 싸우기밖에 더하겠냐. 싫으면 지금 말하고.”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재형의 시선에도 에반은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휴대전화를 꺼낸 그는 재빨리 연락처를 확인했다.
[코코]
김시우라는 이름 대신 적혀 있는 건 자신도 아는 별명이다.
“코코.”
자신이 제어할 수 있는 상황이라 생각했다. 오션 활동을 하면서 시우를 찾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뒤섞였다.
팔짱을 끼고 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던 에반의 손이 멈췄다.
연락처를 확인하던 중 익숙하지 않은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예찬, 찬. 알고 있는 이름이지만 이들은 오션 멤버가 아니다.
“오늘 누구누구 들어오죠?”
묘한 기시감에 에반은 재형을 바라보았다.
“장난하냐? 시우, 찬이, 예찬이, 상준이, 스태프까지 하면 40명쯤 되겠네.”
그때부터였다, 에반의 심장이 제멋대로 날뛴 것은.
잃어버린 마지막 조각을 찾은 것 같다.
재형과의 대화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 확실해졌다. 오션의 멤버가 바뀌었다.
회귀한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시우의 이름이 나오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흐트러졌다.
“그런데 시우랑 뭐 하려고?”
“모르겠어요.”
에반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지금 시우를 만나면 뭘 해야 할까? 어떤 말을 할까? 그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지?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을 시우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