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코코.”
“응?”
허벅지는 고양이에게, 발은 개에게 내준 시우는 자신의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에반을 올려다보았다.
개와 고양이. 그리고 한 명의 사람에게 둘러싸인 시우의 손은 어느새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을 쓰다듬고 있었다. 관리가 잘된 고양이의 털이 주는 촉감은 언제 느껴도 좋은 것이었다.
“나도 너 좋아해.”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짓던 에반의 말에 시우는 눈을 끔벅거렸다.
“러쉬랑 록시가 널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도 널 좋아한다고.”
이거 지금 무슨 상황이야?
눈을 뜬 지 아직 24시간이 안 됐는데,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마…… 나도 널 좋아할걸?”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시우의 입에서 얼빠진 대답이 나갔다.
발은 러쉬에게 내주고 다리는 고양이 록시에게 내준 시우는 에반이 짐을 정리하는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색한 말을 주고받았더니 또 어색한 침묵이 그 자리를 채웠다. 자연스럽게 시우의 손은 계속해서 록시를 쓰다듬었고, 이내 골골송이 흘러나왔다.
“좋아?”
록시를 쓰다듬으며 물었더니, 작은 소리로 ‘냐옹’이라 대답해 주는 것에 시우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하지만 이내 컹, 하고 러쉬가 짓자 행동이 딱 굳었다.
묵직한 러쉬의 발이 들리더니 이번에는 시우의 양발을 모두 덮었다.
그러고는 턱을 시우의 무릎에 얹었다. 마치 자신도 쓰다듬어 달라는 듯한 행동에 시우는 어정쩡하게 손을 들어 러쉬의 머리에 내려놓았다.
록시를 만지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더 뜨겁고 단단한 느낌.
천천히 쓰다듬자 러쉬의 눈이 살포시 감겼다. 그리고 입술이 실룩거리는 것이 마치 웃는 것 같았다.
“냐옹.”
이번엔 록시에게서 불만이 나왔다. 지금까지 눈을 감고 골골송을 부르던 녀석이 움직인 것이었다. 이내 하얗고 작은 발이 허공을 갈랐다.
“…….”
한 번도 아니고 순식간에 여러 대의 솜 주먹이 러쉬의 얼굴을 강타했다.
문제는 그렇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러쉬는 꿈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무던한 행동에 더 화가 나는지 록시는 아예 두 발을 들고 러쉬의 얼굴을 공격했다.
“……록시. 전혀 타격감이 없을 것 같아.”
진심을 담아 말하며 시우는 흥분한 록시를 다독였다. 그러고는 두 손을 들어 한 손은 러쉬의 머리에, 다른 손은 록시의 등에 내려놓았다.
여기까지 와서 하는 일이 지금 동물들 투정 받아 주는 것인가?
두 손을 움직여 둘을 쓰다듬어 주자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다. 시우의 입에서 절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빠각―.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에 시우는 고개를 들었다.
바닥에 앉아 짐을 정리하던 에반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시선이 마주치고도 움직이지 않는 에반을 향해 작게 물었다. 대답 대신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다시 짐을 정리하는 것에 열중했다.
에반이 시선을 떼는 순간 러쉬를 쓰다듬던 시우의 손끝이 움찔했다.
마치 에반의 머리도 쓰다듬어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 와 보는 영국에서, 다른 곳도 아닌 에반의 방에서 이렇게 그의 가족들이 키우는 동물들과 함께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이 상황이 회귀인지,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앞으로 내 미래는? 하는 그런 고민은 모두 사라졌다. 질이 완전히 다른 두 동물의 털을 쓰다듬으며 바람에 흔들리는 정원수들을 보고 있자니 찾아오는 건 평온함이었다.
“그런데 러쉬는 굉장히 크네.”
이렇게 큰 종은 처음 보았다.
“코카시안 오브차카라는 종인데, 음, 아마 너보다 몸무게도 많이 나갈걸?”
“얘가 얼마나 무거운데?”
“70킬로 넘지 않을까? 어느 정도 크고 난 뒤에는 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 어릴 때부터 록시와 함께 자라서 가끔 러쉬가 제 덩치는 생각도 못 하고 덤벼들 때가 있어서 조심해야 해.”
짐 정리를 끝낸 에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러쉬의 등을 툭툭 쳤다. 그게 둘만의 신호인지 지금껏 눈을 감고 손길을 즐기던 러쉬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피곤하면 조금 더 쉴래?”
시우는 머리를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비스킷 하나를 통째로 입에 넣었다.
“천천히 산책한다 생각하고 다니면 될 거야.”
에반과 나란히 걷다 보니 시우는 타임 슬립이라도 한 것 같았다. 긴 복도에 서 있는 갑옷이라든지 커다란 유화 그림이 그런 느낌을 물씬 가져왔다. 둘의 발걸음 소리는 길게 깔린 카펫이 모두 숨겼다.
“여기서 화보 촬영 해도 되겠다. 중세 유럽 소품 같은 건 굳이 구할 필요도 없겠네.”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던 시우는 혼자 중얼거렸다. 막 찍어도 화보겠네.
“마음에 들어?”
“내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이 그림 멋있다.”
앞을 보는 것이 아닌 양옆의 벽에 걸린 그림들을 보며 걷던 시우는 발걸음을 멈췄다. 자연스럽게 에반의 발걸음도 멈췄고, 둘은 그림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에반.”
이름을 불렀을 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시우는 그가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 잘할 수 있겠지?”
“…….”
“앞으로 우리 할 일 많잖아. 더 바빠질 거고. 각자 개인 활동도 하게 되고. 그렇잖아.”
한적하게 야외 피크닉을 즐기는 모습을 담은 유화를 보며 시우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에게 하는 말이자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조금 있으면 제가 원하든 원치 않든 에반의 부모님과 티타임을 가지고, 이내 멤버들과 합류할 것이다.
그렇다면 둘이서 이렇게 조용히 이야기할 시간이 없을 것이기에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꺼냈다.
시우는 그림을 향해 서 있었지만, 에반은 그를 보고 서 있었다.
“그래서?”
“그냥 잘 지내자고. 우린 많이 다르지만, 나이도 같고.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자신의 집에도 초대해 주고, 자신에게 다정한 에반과의 불화설은 끝내고 싶었다. 잠시나마 팬들이 추측성으로 쓴 글과 만들어 놓은 동영상을 보면서 계속해서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실제로 둘의 사이가 그만큼 안 좋았을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과거의 둘의 관계를 모르기에 함부로 말할 순 없지만, 지금이라면 에반은 어떤 말도 들어줄 것 같았다.
“내가 널 많이 좋아…….”
내가 널 많이 좋아하니까, 우리 친구로서 끝까지 서로를 응원하면서 잘 지내보자는 말을 다 끝맺을 수 없었다. 무방비하게 서 있던 시우는 옆에서 갑자기 묵직하게 툭 치는 힘에 비틀거린 것이었다.
“러쉬!”
분명 넘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단한 것에 부딪히며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지금 자신을 받쳐 준 것이 에반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대의 몸을 통해서 목소리를 듣는 건 참으로 이상했다. 그의 목소리는 더 낮게 들렸고, 발음은 살짝 퍼져 웅웅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괜찮아? 쟤가 힘 조절도 부족해서.”
에반의 품에 안겨 그의 가슴 쪽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시우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의 것인지 제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짙은 향에 푹 절여지는 기분이었다.
이 기분은…… 좋은데 부끄럽고 벗어나기 싫은 감정과 놓아주기 싫은 감정이 뒤섞였다.
그리고 힘 조절이 부족하다는 말은 에반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지금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 때문에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고, 그의 손에 잡힌 손목이 저릿했다. 아마도 넘어지려는 시우를 급하게 잡다 보니 그런 것 같았다.
“러쉬! 시우는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고. 너보다 약하잖아.”
러쉬를 혼내는 에반의 말을 들으며 시우는 그에게 잡힌 아픈 손목을 살짝 움직였다.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한 행동이지만, 그의 손은 손목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
차마 아프다는 말을 못 한 시우는 다른 손으로 에반의 팔뚝을 때렸다. 놔. 놓아 보라고. 이거 지금 너희 집 복도 한가운데서 우리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너는 장난으로 건드렸겠지만, 시우는 다칠 수 있어.”
여전히 에반은 냉정한 목소리로 훈육을 했고, 귀를 푹 늘어뜨린 러쉬는 낑낑거리며 제 잘못을 인정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러쉬가 아니라 지금 네가 잡은 손목이 더 아프다고!
시우는 그에게 기대고 있던 머리를 바로 하고 에반을 올려다보았다.
“에반.”
“미안해. 러쉬가…….”
“손.”
“응?”
지금껏 러쉬를 보고 있던 에반이 고개를 돌려 시우를 내려다보았다. 불필요할 정도로 둘 사이가 가까웠다. 서로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도련님. 티타임 준비되었습니다.”
“…….”
그런 힘이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지만, 시우는 있는 힘껏 에반을 밀쳐 냈다. 그리고 상대가 시우였기에 방어조차 못 한 에반은 벽에 부딪혔다.
“……준비되시면 내려오십시오.”
헛기침 소리에 이어 정중한 목소리로 말을 끝낸 집사가 뒤돌아 가는 걸 보며 시우는 한 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이제 다시 시작인데, 정말 잘하고 싶은데, 첫 단추부터 묘하게 꼬이는 기분이었다.
“괜찮아?”
그놈의 괜찮아는 몇 번이나 말하는 거야?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변명이든 해명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저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너 때문인 것 같아.
“오해는 풀면 되겠지.”
눈을 가린 시우는 제게 말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넘어질 뻔했고 잡아 주는 과정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
놀란 감정이 가라앉자 그제야 손목이 아픈 시우는 제 손목을 다른 손으로 감싸 슬쩍 만져 보았다. 멍들진 않겠지.
“부모님 기다리시겠다. 내려가자.”
손목에 큰 이상이 없는 것도 확인한 시우는 집사가 사라진 방향으로 향했다. 어쩌면 에반과 단둘만 있는 것이 제일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