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시간에 맞춰 1번 룸으로 들어간 시우는 분주하게 준비 중인 스태프들을 보고는 멋쩍어 한쪽으로 비켜섰다. 예찬은 3인용 긴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고, 상준은 1인용 소파에서 태블릿을 하고 있었다.
“마이 브로, 살아 돌아왔구나. 인마, 에반이랑 잘 해결하고 온 거지? 둘이 그만 좀 싸워라.”
갑자기 뒤에서 시우를 끌어안으면서 하는 찬의 말에 시우는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거기다 할 말을 다 했는지, 그는 시우의 엉덩이를 가볍게 툭 때리고는 어슬렁거리며 소파로 가 예찬의 허벅지를 베고 드러누웠다.
“배고파.”
“그러게 아까 햄버거 다 먹으라고 했죠? 촬영 끝나고 룸서비스 많이 시켜요.”
“많이 시키면, 그거 누가 다 먹어?”
“내가. 아! 형. 좀 가만히 있어요.”
“넌 내가 왔는데 휴대전화만 보냐?”
졸지에 생판 처음 보는 사람에게 끌어안기고 엉덩이까지 가볍게 만져진 시우는 허탈감에 고개를 숙였다.
예찬은 찬이 제 허벅지를 베고 눕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고, 찬은 편히 누운 채 예찬이 휴대전화 보는 걸 장난스레 방해했다.
그래. 연습생부터 지금까지 한솥밥 먹고 한 이불 덮고 지낸 사이니 이런 건 흔한 장난이었다.
“다 왔어? 에반이는? 다 왔네. 다들 집중. 영국에 온 소감 이런 거, 오늘 자유 시간 뭐 했는지 말하고. 내일 화보 촬영 팀 나누는 게임 해. 이번 화보는 팬 참여형이니까. 이건 콘셉트 투표한 결과. 두 명, 세 명으로 팀 나누고. 이건 투표에서 제일 많은 표를 받은 콘셉트 두 개. 이것도 알아서 나누고. 이것만 하면 되니까 금방 할 수 있지?”
소파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여전히 시우는 한쪽에 서 있었고, 제일 늦게 들어온 에반은 2인용 소파에 앉았다.
“시우. 어서 들어가서 앉아.”
“아. 네.”
어색함에 시우는 괜히 손으로 제 귓바퀴를 꾹 눌러 잡았지만,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상식적으로 지금 제가 앉아야 하는 곳은 에반의 옆자리가 맞긴 했다. 하지만 예찬과 찬에게 연이어 들은 말에 의하면, 에반과 굉장히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짧은 시간 시우의 머릿속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기분 정말 최근에 자주 느끼는구나.
‘Journey’ 첫 촬영 하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참 난감했었다. 그렇다고 바닥에 앉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어물거리던 시우는 에반에게로 향했다.
“좀 쉬었어?”
시우는 에반이 살짝 옆으로 움직여 제가 앉을 자리를 더 넓게 만들어 주며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넌?”
“간단히 짐 풀었지. 저녁 나가서 먹는 건 안 될 거고.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별로 생각 없는데. 아까 티타임 때 비스킷이랑 이것저것 먹어서.”
촬영 장비 세팅이 다 되지 않았기에 시우는 편안히 에반과 대화를 나눴다. 여차하면 다들 말하는 대로 화해했다고 하면 되겠지.
그래도 방송인데, 시우는 대화하며 손을 들어 제 머리를 툭툭 털며 만졌다. 곱슬거리는 머리를 만지다 가까이 다가온 스태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빗과 립글로스를 보고서야 당황이 스몄던 표정을 바로 했다. 늘 같이 일하는 스태프일 텐데, 멤버들과 친해지는 것도 일이지만, 스태프들 얼굴과 이름을 익혀야 하는 숙제도 생겨났다.
“그래도 뭘 먹긴 해야지. 스테이크 어때?”
“미디엄 레어.”
스태프가 머리를 만지고 있어 에반을 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샐러드 소스는?”
“네가 알아서 해.”
“맥주?”
“나 달달한 화이트 와인.”
에반은 휴대전화를 들고는 시우와 이야기하는 내용을 메모했다. 룸서비스도 괜찮긴 하지만, 그런 것으로 시우 배를 채울 순 없는 법. 근처에 스테이크로 유명한 레스토랑이 있었기에 촬영 시간 끝날 때쯤 맞춰서 룸으로 배달을 시킬 생각이었다.
직접 가지러 가진 못하겠지만 대신 가져다줄 사람은 많으니까.
“소주가 아니고?”
메모하던 에반은 시우를 놀리며 작게 웃었다.
“야! 내가 아무리 소맥을 좋아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소맥은 안 먹는다! 나도 와인 마실 줄 안다고.”
“알아.”
에반에게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립글로스를 바르고 있는지라 시우는 쏘아붙이는 것 대신 그를 흘겨보았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옆에 있는 허벅지를 툭 때렸다.
“내 방으로 주문할게.”
평소와 같은 대화였다. 가끔 미묘해지면 대화가 끊기긴 했지만, 회귀 후 에반과는 큰 변화가 없었다. 에반까지 생소했다면 적응하기 더 어려웠겠지.
끝났는지 스태프가 멀어지자, 시우는 에반을 보았다. 좀 늦는다 했더니 그사이 이미 촬영 준비를 끝내고 온 것 같았다.
“우리 게임은 뭐 해요?”
“다들 피곤할 테니까 간단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팀은 물건 고르기. 콘셉트는 번호표 뽑기.”
“물건? 우리 걸로 해요?”
“아니. 알아서 준비했으니까 고르기만 하면 되지. 오늘은 상준이가 진행하고, 다 준비됐지?”
스태프와 찬의 대화를 들은 시우는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촬영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상준의 진행하에 주로 예찬과 찬이 떠들었다.
하긴 원래 에반은 말을 많이 하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왜 계속해서 ‘Journey’ 촬영이 생각날까?
빅벤에 다녀왔다며 신나게 말하는 걸 들으며, 시우는 소파 위로 다리를 올려 양반다리를 했다.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절로 시우의 한쪽 다리가 에반의 허벅지 위에 걸쳐졌다.
시간이 지나면 하나씩 해결될 일이지만 마음이 묵직했다.
“저는 그냥 작업하면서 쉬었고요. 저희가 지금 영국까지 온 이유가 두 가지잖아요. 콘셉트 투표 결과는 어떻게 나왔어요?”
감독님의 손짓에 상준은 자연스럽게 게임 진행으로 넘어갔다.
“봐. 나 이거 나올 줄 알았어. 남자 친구 모멘트.”
콘셉트를 정리한 패널을 받아 든 찬은 카메라를 향해 패널을 보여 주며 설명했다. 팬들이 원하는 건 다 비슷했고, 투표 결과도 그들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번 남자 친구, 2번 농구. 이거는 농구든 축구든 뭐든 밖에서 하는 운동 말하는 거죠?”
찬은 패널을 설명하고는 감독님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스케이트보드!”
이내 야외 운동이면 뭐든 된다는 감독의 말에 대번 예찬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야, 나 그거 못 타.”
“찬이 형은 이참에 나한테 배워요. 전에 타 보고 싶다고 했잖아.”
“싫어. 완전 싫어. 난 움직이는 게 제일 싫어. 날도 더운데 밖에서!”
이 팀의 티키타카는 찬과 예찬의 몫인 것 같았다. 둘은 티격태격했고, 옆에서 상준은 자신 역시 싫다며 조용히 의견을 말했다.
스케이트보드도 제법 많이 탔다. 온갖 취미를 다 가지다 보니 적은 금액으로 하기엔 참 좋은 취미이자 운동이었다.
“잠깐만! 우리 중에 스케이트보드 타는 사람이 예찬이뿐이야?”
“아니. 나!”
방송 시작하고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던 시우는 작게 손을 들며 말했다. 나대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뒤로 물러나 있어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스케이트보드를 탈 줄 안다고?”
대놓고 아주 잘하는 것도 없지만, 못하는 것도 없습니다만.
예찬도 아니고 에반이 놀라며 시우를 바라보았다.
“조금. 잘 타는 건 아니고, 그냥 넘어지지 않는 정도.”
“나 탈 때 왜 한마디도 안 했어요? 그럼. 같이 타러 다녔지. 외롭게 혼자 다녔잖아요!”
과거의 나를 욕해. 그럼.
시우는 미소로 답하며 앞으로 같이 타자는 말로 상황을 수습할 수밖에 없었다.
멤버의 개인 물건이 아닌 제작진이 준비한 물건을 고르는 것으로 팀을 나누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준과 에반이 남자 친구를 촬영하고, 찬과 예찬, 시우가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것을 촬영하는 것으로 결정 났다.
어수선한 촬영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우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그나마 에반과 예찬은 대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지만, 상준이나 찬이 제게 말을 걸 때면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리게 되는 것이다.
“에반. 저녁 어떻게 할 거야?”
“시우랑 같이 먹으려고요.”
상준의 질문에 대답하던 에반은 기지개를 켜는 시우의 등을 가볍게 툭툭 두드려 주었다. 중간중간 쉬었다고 하지만, 지금 누구보다 피곤한 건 시우일 것이다.
제 생각이 짧았다. 장시간 비행기를 탄 그를 배려해서 쉬게 했어야 했는데.
가족들을 보여 주고 싶었다.
가족들에게 그를 인사시키고 싶었다. 제 사람이라고. 그렇게나 애타게 찾았던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러쉬도 록시도 처음 보자마자 시우를 반기는 모습에 기분이 참으로 묘했다. 다들 알아보는데 왜 넌 날 알아보지 못할까?
시우와 에반이 촬영 방을 나올 때까지도 둘은 어떤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남아 있는 친한 스태프들과 멤버들의 머릿속만 혼란할 뿐이었다. 바로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으르렁거리며 싸우던 둘의 모습은 하루아침에 바뀌어 있었다.
“지친다.”
터벅거리며 걷는 시우의 혼잣말에도 이내 에반의 대답이 들려왔다.
“힘들어?”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아서…….”
“그럼. 씻고 내 방으로 올래?”
에반의 말에 시우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룸서비스든 뭐든 그걸 기다리는 시간에 지금부터 해야 하는 일을 하나라도 줄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제 방으로 돌아와 따뜻한 물에 샤워를 끝낸 시우는 짐을 뒤적여 편안한 실내복을 찾아 입었다. 그러고는 에반의 룸 앞에서 벨을 눌렀다. 한 번 더 눌렀지만, 응답이 없었기에 그가 준 룸 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
시우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욕실 문을 열고 나오는 에반과 눈이 마주쳤다.
방금 씻고 나온 에반은 하의만 챙겨 입은 채, 머리를 수건으로 털고 있었다. 그때도 그랬는데, 정말 생각도 없이 라이브로 이런 장면이 나간 적이 있다. 그때와 다른 거라면 지금의 에반은 상의를 아예 걸치지도 않았다는 것과 손가락을 다치지 않았다는 점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