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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75화 (75/187)

75화

“에반 형. 맛있는 곳 있으면 우리한테도 말해 주지. 치사하게 둘이서만 먹어요? 둘이서만 맛있는 거 먹고! 완전 치사해. 그쵸?”

예찬은 앞에 있는 스테이크를 한 점 집어 입에 넣었다. 원래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을 읽는 것이 힘들었지만, 지금은 더 정신없었다. 하긴 팬들 사이에서도 불화설이 끊임없이 거론되는 에반 형과 시우 형이 같은 방에 있는 것을 봤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묻지도 않았잖아. ”

예찬과 시우가 나란히 앉은 것을 본 에반은 투덜거리듯 말했다.

저기요. 두 분의 관계는 예전과 같은 것 같네요.

갑자기 둘이서 떡볶이와 어묵탕을 놓고 티격태격하던 것이 떠오르자, 시우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와. 스테이크. 진짜 맛있다.”

“그거 코코 거야. 이거 먹어.”

예찬은 앞에 있는 새 포크로 스테이크를 한 점 먹다가 믿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에반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지금껏 잘 나가고 있던 라이브가 끝났다.

절대 예찬의 실수가 아닌 그가 고의로 끝낸 것이다.

“이거 샐러드도 먹어 봐. 다 맛있더라.”

라이브가 끝난 걸 모르는 시우는 이번에는 예찬에게 샐러드를 권했다.

“무슨 일 있죠?”

방송용 밝은 목소리가 아니다. 지금 예찬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고, 심각한 눈으로 에반과 시우를 응시했다.

방금까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들뜬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는 시우는 괜히 목뒤를 손으로 문지르며 의자에 몸을 기대앉았다.

에반과 예찬의 사이도 안 좋은 것인가? 찬과 예찬은 굉장히 편해 보였다.

찬이 자신을 대하는 것만 해도 그랬다. 쉽게 끌어안았고, 스킨십도 자연스럽다.

뭐가 문제지? 이 둘의 문제까지 끼어들기엔 너무 피로했다.

오늘 하루 아직 안 끝났니?

분명 에반과 미묘한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예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잠에서 깨듯 회귀가 일어났다.

이어 어디로 가는지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장시간 비행기를 탔다. 그나마 그동안 잠을 잤으니 망정이지, 이미 시우의 체력은 바닥을 기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강예찬. 무슨 짓이지?”

고개를 젖히고 몸을 이완시킨 채, 눈을 감으려던 시우의 시선이 에반에게 닿았다. 제법 많은 시간을 그와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목소리에 이런 어조는 처음이었다.

“갑자기 이상해서 그러잖아요. 아까 촬영할 때 분위기도 그렇고, 어젯밤만 해도 시우 형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아요?”

강압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에반의 목소리에 이어 이번엔 예찬이 대놓고 들이받았다.

“시우랑 내 일이야. 네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고.”

“형이 강압적으로 하니까 더 그러죠. 다른 멤버한테는 안 그러면서 시우 형한테만 까다롭게 굴고 닦달하고. 우리 중에 퍼포먼스 제일 잘하는 사람 시우 형이거든요? 그런데 형이 부족하다고 계속 말하니까 시우 형이 잠도 안 자고 밤새도록 연습하고.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요.”

순간 시우의 표정이 확 굳었다.

이들의 목소리가 거칠어지고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것과 동시에 공기가 묵직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말이 되지 않지만, 방금까지 자연스럽게 들이마시고 내뱉던 공기가 무거워졌다.

또한 제 감정이 아닌 다른 감정이 고스란히 넘어오기 시작했다.

예찬의 말 뒤로 남은 건 침묵이었다. 당장이라도 주먹다짐을 할 것 같은 상황.

조용히 혼자 쉴 때도 찾아와 저를 걱정하던 예찬이다. 그리고 예찬이 지금 화를 내는 것도 자신과 관련 있었다. 확실하게 얼마나 문제가 있는 사이인지 모르겠지만, 예찬이 자신을 대신해 에반에게 불만을 털어놓고 있는 것이다.

시우는 긴 한숨과 함께 몸을 바로 했다.

“둘 다 그만해. 예찬이 넌 형한테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가 부족해서 연습하는 거고, 당연히 완벽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거 맞아. 그리고 에반이 너는 좀 부드럽게 해라, 부드럽게. 둘 다 페로몬 거둬들이고. 베타인 나도 다 알겠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숨 쉬는 것이 편해졌다. 어이가 없다, 진짜.

오메가도 아니고 진짜 페로몬이 느껴진다고?

“형.”

“넌 어서 상준이 형 방에 가서 라이브나 다시 해. 그렇게 네 맘대로 꺼 버린 거 실수인 척하면서 제대로 사과부터 하고. 나랑 에반이는 그냥 편히 쉬고 싶다고 했다고 말해.”

좋은 게 좋은 것이고.

희희낙락 긍정적인 시우도 지금엔 예민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냥 방으로 돌아가서 자는 게 좋겠다. 앉아 있는 둘을 두고 먼저 일어섰다.

머뭇거리는 예찬과 다르게 에반의 손이 시우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손목을 비튼 시우는 쉽게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본 시우는 미련 없이 그 방을 떠났다. 그리고 제 방으로 들어가 침대로 뛰어들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회귀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건 참으로 오랜만이다. 초기 몇 번은 반복된 삶에 힘들어했지만, 계속되자 어느 정도 포기했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썼던 시우는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여행용 트렁크를 마구 뒤졌다.

그리고 자신이 예상한 작은 통을 발견하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혹시나 했다. 설마 설마 이것이 여기에도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이번에도 이렇게 데뷔를 하고 그렇게 원하고 원하던 톱 아이돌이 되었음에도 잠이 들지 못하는 밤이 이어졌나 보다.

[수면 유도제]

통을 열고 약을 꺼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입 안에 한 알을 머금고는 미니 냉장고를 열어 물을 마시고 알약을 삼켰다.

똑똑-.

“에반. 지금 밥 먹었다가는 체할 거야. 혼자 있고 싶으니까 찾아오지 마.”

다시 침대로 파고들었을 때, 더는 노크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시우는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휴대전화를 훑어보던 에반은 결국 그것을 던져 버리고 말았다.

호텔에 도착하고 멤버, 스태프들과 같이 있으면서 미묘한 흐름을 읽긴 했다. 재형이 말하는 것도 이상하고, 촬영 때도 유독 다른 멤버들이 저와 시우의 눈치를 보는 것 같은 모습도 보았다.

그리고 예찬이 제게 바락바락 대드는 순간 멍해졌다.

자신이 모르는 제가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날뛰는 페로몬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했다.

하얗게 질린 시우의 얼굴. 한껏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와 자신과 예찬을 차갑게 쳐다보던 시선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갑자기 시우가 나가 버린 룸엔 침묵만 남았다.

이내 우물거리며 ‘형, 죄송해요.’라는 말을 남기고 예찬마저 떠났다.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금껏 모든 상황은 제가 조절했다.

계속해서 반복된 데뷔도 활동도 하다못해 라이브 방송까지 간섭했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은 라이브지만, 오션의 라이브는 철저하게 계산된 방송이었다.

자유도가 높긴 했지만, 시작 전 기본적인 콘셉트를 잡았다.

모든 것이 손바닥 안에서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자신은 오션의 멤버였지만, 기획자였고, 투자자였다.

반복되는 미래. 이미 겪어 본 상황에 도움이 되는 것과 문제가 될 만한 것을 다 피한 그는 미다스의 손으로 불렸다.

예찬이 제게 왜 화를 냈는지 알고 있다. 겪어 본 것도 아니고 본 것도 아니지만, 예찬이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었을 것이다. 완벽주의자였으니까, 같은 멤버의 실수나 부족한 점에 자신은 너그럽지 못했다. 그런 제게 시우가 부족하게 보였다면, 그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을 퍼부었을 것이다.

거기다 2집 메인 곡이 ‘루시퍼’라면 더더욱 몰아붙일 때였다.

단 한 번도 에반은 멤버들과 친밀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 그저 그들은 같은 팀으로 같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사람. 딱 그 정도의 관계만 유지했었다. 제가 모르는 자신이 갑자기 개과천선해서 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시우의 방 앞까지 갔지만, 돌아온 건 냉담한 반응이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에반이 지금까지 한 것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지금 제게 정보를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많은 사람과 주고받은 메시지, 통화 리스트들을 훑었다.

그 리스트에서 시우를 찾는 건 너무 어려웠다. 한 달 동안 시우와 통화한 적이 없다.

단둘이 주고받은 메시지도 몇 개 되지 않았다.

모두 단답형이었지만, 그들의 갈등 상황은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마지막 메시지는 지난밤에 온 것이었다.

[내일 보네. 지난번 그렇게 화냈던 거 미안하다. 다시 볼 때는 얼굴 붉히지 말자.]

그리고 에반은 그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둘의 사이는 왜 이렇게 나빠졌으며, 이런 갈등 상황은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그럼 오늘 자신과 있었던 시우는 그 불편한 마음을 모두 감수하고 애써 태연하려 노력한 것일까?

엉킨 실타래처럼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리고 불현듯 파고든 것이 있었다.

시우의 감정을 읽지 못했다. 그와 있을 때, 실시간으로 모든 감정을 읽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감정 변화가 격하게 일어날 때는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방금 전 시우가 이 방을 나갈 때, 에반은 그의 감정을 알지 못했다.

화가 난 것인지, 슬픈 것인지, 불편한 것인지. 전혀 감지할 수 없었다.

에반은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제 손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시우의 페로몬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인가? 분명 공항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시우의 페로몬도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마치 그가 베타라도 된 것처럼 모든 것이 사라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막연하게나마 그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익히 아는 달달한 그 향이 코끝에서 맴도는 것 같았다.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던 에반은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 뒤엉켜 무엇 하나 제대로 정의되는 것이 없다.

시우는 분명 자신과 예찬에게 페로몬을 거두라 했다. 그렇다는 건 이제 자각했다는 건가?

하지만 시우는 베타다.

프로필에도 대놓고 베타라 적혀 있다.

그는 여전히 히든 오메가이다.

이제 시우가 오메가이든 베타이든 알파이든 상관없다.

그냥 그면 된다. 시우면. 김시우면. 아니.

오직 김시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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