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77화 (77/187)

77화

아름다운 호수.

따가운 햇볕과 다르게 선선한 바람.

관리가 잘된 잔디밭.

피크닉 하기 가장 이상적인 공간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으아! 에반…… 에반 형!”

말 그대로 돼지 멱따는 소리 같은 예찬의 비명과 사람들의 신나는 웃음소리만 없다면 더없이 평화롭고 고즈넉했을 분위기였다.

시우는 나무 그늘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은 록시의 부드러운 털을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영국에서의 촬영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화보 촬영도 성공적으로 마쳤고, CF 역시 큰 문제 없이 끝났다. 그리고 지금 오션 멤버와 스태프들은 에반의 집에 와 있었다.

지나가는 말로 멤버들과 다시 오고 싶다고 말했다. 고성 특유의 풍경을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관광지가 아닌 개인 사유지로 이렇게나 관리가 잘된 곳을 볼 경우가 몇이나 될까. 멤버, 스태프는 물론 팬클럽 ‘니모’들에게도 좋은 기억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해서 의견을 내긴 했지만, 진짜 이렇게 촬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코코. ‘Ocean Story’ 진짜 우리 집에서 촬영하고 싶어?’

‘응?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집안이나 너와 부모님의 사적인 공간이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호수 있는 정원 뒤쪽이 야외 촬영 하기 좋아 보이더라고. 이런 풍경 니모에게도 보여 주면 좋을 것 같고. 물론 그냥 이건 내 생각이니까.’

‘알겠어.’

에반과의 대화는 그것이 끝이었다.

그리고 출국 전날. 모두 이곳에 모인 것이다.

없는 프로그램을 새로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오션 자체 채널인 ‘Ocean Story’ 촬영을 이곳에서 하는 것뿐이었다. 오션 채널엔 수시로 찍어 대는 에피소드나 이들이 하는 라이브도 올라갔지만, ‘Ocean Story’라는 자체 예능 프로그램도 있었다.

지금 찍는 방영분이 언제 나갈지 모르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자체 예능은 꾸준히 촬영하고 있었다. 해외에서도 국내에서도 공백기에도 촬영은 계속되는 것이다. 오션 팀이 꾸려지고 연습생일 때부터 그들이 친해지는 과정이나 그런 모습들이 많았다.

오션은 데뷔 전부터 아이돌이었고, 팬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그들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여 기획한 프로젝트 그룹이었다. 지금껏 시우가 몸담았던 그런 아이돌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시우는 시간이 날 때면 오션의 영상과 자료를 찾거나 멤버나 소속사와 나눈 대화들이 담겨 있는 휴대전화를 훑어보았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단 하나였다. 예전의 내가 이것을 알았다면, 그 팀들도 그렇게 ‘망돌’로 남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에반 형! 형!”

그렇게 순하고 착하고 심심하면 배 까뒤집고 만져 달라고 애교를 부리던 러쉬는 지금 이곳에 없었다. 갑자기 몰려온 사람들을 보고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결국 에반의 손에 이끌려 감금을 당했는데.

언제 또 뛰어나온 거야? 더군다나 지금 러쉬의 목표는 예찬이었다.

예찬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상황에 처한 것이지만, 멀리서 보는 시우에겐 다르게 비쳤다.

혈기왕성한 러쉬는 자신과 제일 잘 놀아 줄 것 같은 사람으로 예찬을 선택한 것이다. 아마도 러쉬가 작정하고 달려들었다면 이미 큰 사건이 터졌을 테고, 그 전에 에반이 상황을 정리했을 것이다.

예찬을 뒤쫓는 러쉬는 절대 예찬을 앞지르거나 그에게 입질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피해 도망가는 그를 쫓아다닐 뿐이다. 마치 그것이 놀이인 것처럼.

“예찬아!”

보다 못한 시우가 먼저 그를 불렀다.

“흐어어엉. 시우 형. 에반 형…… 형한테…….”

뛰어다니느라 숨이 가쁜 예찬은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했다.

처음엔 재밌어서 지켜봤지만, 예찬이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니 좀 안쓰러워 보였다. 며칠 전, 내려 달라는 자신을 내려 주지 않고 고집을 피운 것에 대한 복수는 이만하면 된 것 같다.

“러쉬!”

그리 큰 소리도 아니었다. 촬영 준비에 소란스러운 공간에서 쉽게 묻혀 버릴 만한 소리였다.

예찬을 미친 듯이 따라다니던 러쉬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귀를 쫑긋거렸다. 러쉬 역시 뛰어다니느라 힘든지 숨을 헐떡이는 것이 보였다.

러쉬와 시선이 마주쳤기에 시우는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가볍게 손짓을 했다.

그러면서 생수병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재밌게 놀았어?”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러쉬는 순식간에 달려와 시우의 옆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헥헥거리는 러쉬의 시선이 금세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예찬에게 닿았다. 그리고 큰 소리로 컹컹거리며 대답했다.

정말 재밌었다는 것 같아 절로 시우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그만 따라다녀. 예찬이 힘들대. 우리 곧 촬영도 해야 하는데, 벌써 힘 빼면 안 되잖아.”

헐떡거리는 러쉬의 목을 쓸어 주며 방금 딴 생수병을 입가에 대어 주자 500mL 생수병 한 통이 금세 사라졌다. 그 와중에도 꼬리가 쉴 새 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아하니 아직 더 놀고 싶은 것 같았다.

“헉…… 허…… 형. 왜…… 얘가…… 형…… 형 말을 들어?”

러쉬가 얌전해진 것을 본 예찬이 숨을 고르며 그에게로 다가가 러쉬의 눈치를 한번 보고는 옆에 있는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시우가 먹다 남겨 놓은 레모네이드 잔에 꽂힌 빨대를 빼 버렸다. 그러고는 잔에 입술을 대고 벌컥벌컥 마셨다.

“러쉬는 너랑 놀고 싶은 거야. 네가 소리 지르면서 도망가니 더 재밌어서 쫓아가는 거고.”

“후. 시원하네……. 아니, 그럼…… 아까 말려 주든가. 아! 진짜 힘들어.”

상의를 펄럭거리며 예찬은 의자에 푹 기대앉았다.

“너도 내가 내려 달라고 할 때, 안 내려 줬잖아.”

시우는 테이블에 있던 부채를 들어 혀를 길게 빼물고 있는 러쉬에게 부쳐 주었다.

“아이…… 그건…….”

“러쉬. 물어.”

“으악! 형!”

언제 온 것인지 에반이 레모네이드가 가득 찬 잔을 건네 오기에 그걸 받은 시우는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에반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얌전히 앉아 있던 러쉬가 일어나서는 크게 짖은 것이다. 거기다 방금까지 나 죽는다며 늘어져 있던 예찬이 벌떡 일어나는 모든 것이 너무 재밌었다.

마음 편안한 사람들과 이런 시간을 보내는 건 언제든 즐거웠다. 에반과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두기로 했다. 그리고 예찬은.

강예찬. 우리 자이언트 베이비. 그룹의 막내이자 분위기 메이커인 그는 자신이 알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러쉬는 안 물어. 에반이 넌 예찬이한테 왜 그래? 아까도 말려 줄 수 있었으면서.”

“둘이 잘 놀았잖아.”

어딜 봐서 그게 잘 놀았어. 시우는 막 건네받은 레모네이드에 꽂힌 빨대를 물었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태어나서 지금껏 먹은 레모네이드 중에 여기서 먹는 것이 제일 맛있는 것 같았다.

“논 게 아니라 진짜 무서웠다고요.”

이제 숨이 돌아왔는지 예찬이 투덜거리자, 에반이 장난스럽게 그의 팔뚝을 툭 쳤다.

“겁쟁이.”

“아니거든요.”

“러쉬가 쫓아온다고 도망갔으면 이미 끝난 거야.”

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시우는 다시금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자신이 쓰다듬어 주는 걸 즐기고 있는 러쉬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렇게 제게 우호적이면서 얌전히 있으니 다행인 것이지, 만약 러쉬가 제게 달려든다고 생각하자 오한이 밀려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에반 형은 나 싫어해.”

정말 친한 사이에서만 할 수 있는 농담에 시우는 슬쩍 눈썹만 움직였다.

“아닌데, 좋아하는데.”

시우의 손에 들려 있던 레모네이드 잔이 자연스럽게 에반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에반은 방금까지 시우가 쓰던 빨대를 이용해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아닌데요. 싫어하는 것 같은데요.”

예찬은 지지 않고 대답하며 다시 자리에 앉아 잔에 남아 있던 얼음을 아그작거리며 씹었다.

“좋아한다니까.”

“싫어하는 게 분명해요.”

“알겠어. 둘 다 날 좋아한다고? 그렇게 결론 내리자.”

둘의 말싸움에 끼어든 시우는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러쉬의 얼굴을 잡고는 마구 문지르며 장난을 쳤다.

“아니야. 우리 자이언트 베이비는 나 좋아해.”

“헉.”

갑자기 끼어든 찬의 말에 예찬이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러쉬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던 시우는 슬쩍 고개를 틀어 예찬을 보았다. 방금까지 에반과 말장난을 하던 예찬의 귀가 붉었다.

“뭐야? 어이, 예찬이. 너 나 안 좋아해?”

시큰둥하게 말하는 찬이 의자에 앉아 있는 예찬의 팔뚝을 툭툭 때리자, 얼른 예찬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자리에 찬이 앉았다.

“좋아. 아니, 안 좋아……. 그게 아니고 좋아하…….”

“어허. 래퍼가 말 더듬는 거 봐라.”

이곳에서 예찬의 편은 없었다. 그가 말을 더듬자마자 냉큼 에반이 놀렸고. 당황한 것 같은 예찬만 허공에 아니라는 손짓을 해 댔다.

“우리 막내 놀리지 말아. 울 자이언트 베이비가 나 좋아하는 거 내가 알아. 내가 알면 됐지, 뭘 그래. 우리 막내는 형아만 믿고 따라오면 돼.”

싱긋 웃은 찬은 손으로 옆에 서 있는 예찬의 엉덩이를 팡팡 두드리면서 말했고, 얼굴까지 붉어진 예찬은 잔에 남은 얼음을 모두 입에 털어 넣고 요란하게도 씹어 댔다.

“그럼. 형은 예찬이 좋아하고?”

본인이 묻지 못하면 옆에서 대신 물어 줘야지.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예찬의 반응을 보아하니 순수하게 장난을 치기에는 조금 난감한 감정으로 찬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날. 루프톱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좋아하는 사람이 같은 아이돌이라서 어렵다고. 힘들어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래도 지금은 같은 그룹이잖아.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공간을 쓰고. 보고 싶든 보고 싶지 않든 얼굴을 맞대고 지내야 하는 사이잖아.

이런 농담에 진담을 흘릴 수 있는 그런 사이잖아.

마치 나와 에반처럼 말이야.

“당연하지. 내가 우리 막내 얼마나 좋아하는데. 에반이 같은 애 한 트럭 갖고 와 봐라. 내가 울 예찬이랑 바꾸나.”

찬은 자연스럽게 시우의 다리 위를 차지하고 있는 록시에게 손을 뻗었고, 사람 손 타는 것을 좋아하는지 록시는 찬에게 쉽게 안겼다.

“에반이가 뭐 어때서요?”

그냥 그렇게 끝날 수 있는 대화였는데, 록시를 넘겨주던 시우의 입에서 한마디가 흘러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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