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에반이가 어때서? 에반이가 예찬이보다 못한 게 뭐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시우의 시선은 제 옆에 서서 촬영 준비가 끝나 가는 정원을 바라보고 있는 에반의 얼굴에 닿았다.
그다음엔 에반과 예찬, 찬의 시선이 모두 시우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넷의 대화를 모두 담고 있던 카메라 감독님까지 한 발 다가오셨다.
마치 모두 시우의 뒷말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
갑작스러운 상황에 시우는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만졌다.
“나? 내가 예찬이보다 나아?”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에반이었다.
“…….”
시우는 볼을 만지며 애써 넷의 시선을 외면하려 했지만, 오히려 더 다가오는 카메라를 보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상준 형이 최고야. 상준 형!”
멀리서 제일 늦게 준비하고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오고 있는 상준에게로 향하며 시우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라도 벗어날 수 있어 다행이다.
* * *
“안녕하세요. 오늘은 우리가 뭘 하기로 했죠?”
자연스러운 상준의 진행으로 프로그램 촬영이 시작됐다. 큐시트를 든 상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쪽에 놓여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팀 나눠서 게임을 하기로 했는데, 일단 팀은 둘째 치고 벌칙이 있습니까?”
“벌칙. 물론 있고요. 벌칙 의상 입고 내일 출국장 포토 타임 가지면 됩니다. 벌칙 의상은 이미 준비되어 있답니다.”
상준은 찬의 질문에 대답하며 테이블을 가리켰다.
이미 그 위엔 다양한 망토가 준비되어 있었다. 슈퍼맨의 상징인 짧고 붉은 망토, 드라큘라가 입을 것 같은 검고 긴 망토. 그 옆에는 앙증맞은 천사 날개가 놓여 있었다.
“잠시만요. 슈퍼맨과 드라큘라는 이해하겠는데, 옆에 이건 뭐죠? 그리고 팀을 나누면 두 개면 될 텐데 왜 벌칙 의상이 세 개인 겁니까?”
“저도 참여하라는 제작진의 철저한…….”
“잠시만요!”
연이은 찬의 질문에 대답하던 상준의 말을 가로챈 것은 예찬이었다.
“그럼 상준 형은 덮어 놓고 무조건 벌칙을 받는 거예요? 사회도 보고 벌칙도 받고? 그럼 왜 사회 해요?”
“아니. 가만히 좀 있어 보세요. 다들 이렇게 말을 끊어 대면 제가 어떻게 설명합니까? 아직 설명을 안 했잖습니까. 일단 팀부터 나눠요. 그런데 팀은 어떻게 나눠요?”
중간에서 열심히 대답하던 상준은 앞에 있는 제작진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무슨 팀을 나눈다고 또 게임을 해요. 그냥 이렇게 해요. 이렇게.”
방금까지 시우의 옆에 서 있던 예찬이 갑자기 자리를 옮겼다. 시우를 지나치고 가운데 서 있던 상준을 지나더니 그의 옆에 서 있던 찬의 손목을 잡았다.
“에반 형은 저리 가요.”
그러고는 제일 끝에 서 있던 에반에게 턱짓으로 시우의 옆으로 가라는 제스처를 했다.
“뭐야? 이렇게 나눈다고? 이래도 돼요?”
예찬의 갑작스러운 행동이나 또 예찬이 저쪽으로 가랬다고 설렁설렁 걸어 예찬이 자리에 서는 둘을 보며 찬이 일단 예찬에게 잡힌 손목을 비틀며 말했다.
“…….”
“자, 그럼 팀은 이렇게 나눴고요. 첫 번째 게임 설명 갑니다.”
분명 앞에서 제작진이 준비한 게임이 있다고 설명했지만, 중간에서 그걸 잘라 버린 상준은 큐시트를 넘기며 진행을 해 버렸다. 그 모습에 시우는 한 손을 올려 제 하관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고, 애써 예찬의 손에서 손목을 빼내고 앞으로 가던 찬의 발걸음이 멈췄다.
“거기, 이 찬 씨. 카메라 가리니까 제자리로 들어오시고요. 첫 번째 게임은 ‘코끼리 립스틱’. 이거 다 아시죠? 아, 진짜 식상해. 좀 기발한 거 없어요?”
제작진을 향한 상준의 투덜거림에 모두 웃음이 터졌다.
“게임 방식은 간단합니다. 눈 가리고 코끼리 코 열 바퀴 도시고요. 자신의 팀원을 찾아가서 예쁘게 립스틱을 칠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립스틱을 바르신 분은 다시금 출발선으로 오셔서, 여기 유리 보이시죠? 여기에 입 맞추셔서 립스틱 자국을 남겨 주세요. 먼저 립스틱 자국을 남겨 주시는 분이 이기는 것이지만, 여기서 입술 모양 확인합니다. 정말 입술 같지 않은 흔적이 남으면 실격. 시간도 시간이지만 정확히 그려 오세요.”
곡 작업 하는 것 외에는 뭐든지 귀찮아하고 설렁설렁하는 상준의 성격답게 진행조차 그러했다. 어수선할 틈도 없었다.
“내가 해?”
시우는 당연히 자신이 눈을 가리고 도는 역할을 제가 하리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제자리에서 돌고 난 후 균형 잡는 것은 팀원 중 제가 가장 잘할 테니까.
“잠깐만. 에반이가 할 거지?”
둘의 대화에 끼어든 것은 찬이었다.
“네?”
“당연히 에반 형이 하겠죠. 이거 시우 형이 하면 반칙이야, 반칙. 발레 전공 한 사람한테 코끼리 코 시켜 봤자 뭐 다른 거 있냐고요.”
에반이나 시우에게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시우는 팔짱을 끼고 도착 지점에 삐딱하게 선 채, 출발선에 있는 에반과 예찬을 바라보았다. 둘 다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이쪽이 조금 내리막길인데 잘못하다 구르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여기 조금 내리막인데 괜찮을까요?”
“괜찮아. 넘어져 봤자 잔디밭이잖아. 좀 구른다고 닳을 것도 아니고.”
너무 깔끔한 찬의 대답에 걱정한 시우가 민망해지는 상황이었다.
“하나, 둘, 셋…….”
게임 시작과 동시에 예찬과 에반이 돌기 시작하자 절로 숫자를 세는 목소리가 커졌다.
열 바퀴를 먼저 돈 예찬이 비틀거리며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왼쪽. 야! 어디 가!”
다급한 찬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박장대소를 하는 상준의 목소리가 들어갔다.
앞으로 잘 가다 비틀거리더니 다시금 출발선으로 향하는 예찬의 옆에서 에반은 올곧게 시우가 아닌 촬영 팀 쪽으로 향했다.
“거기 아니야!”
촬영 팀 제일 앞에 서 있는 카메라 감독님의 어깨를 한번 짚은 에반이 방향을 틀어 이번엔 시우 쪽으로 향했다.
“빨리. 빨리.”
그냥 립스틱을 얼굴에 묻히고 재밌는 상황을 연출하고, 입술에서 많이 번지는 걸 확인하면 되었지만. 거기에 되돌아가는 타임 제한까지 걸리자 시우와 찬은 절로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코끼리 코만 돌아도 어지러울 텐데 눈까지 가려 놓으니 예찬도 에반도 헤매는 것이 더 심했다.
“여기! 여기.”
에반이 가까워지자 시우는 먼저 팔을 뻗어 에반의 팔뚝을 잡아끌었다. 카메라가 달린 립스틱을 잡은 에반의 손이 흔들렸다.
“아. 있어 봐. 내가…….”
그냥 네가 립스틱 들고 있어. 내가 움직이는 게.
그 말을 하려던 시우의 턱이 에반의 손에 잡혔다. 절로 고개가 젖혀진 시우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하기도 전에 립스틱이 다가왔다.
분명 에반은 눈을 가리고 있다. 출발 전 몇 번이나 검은색을 확인하며 앞이 보이지 않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온 에반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시우의 턱을 잡고 다른 손으로 빗나가지 않게 립스틱을 시우의 입술에 발랐다.
깊게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시우는 그 자리에 에반을 두고 출발선으로 뛰어가 찬보다 먼저 유리에 입술 자국을 남겼다.
“이거 게임 끝났는데요.”
찬은 예찬을 애타게 부르고 아예 네발로 기던 예찬이 찬과 극적 만남을 하고 있는 사이 게임이 끝나 버린 것이었다. 물론 급한 마음에 예찬은 찬의 입술이 아닌 볼에 립스틱을 대고 있었다.
시우가 입술 자국을 남겨 놓은 유리를 확인한 상준은 그대로 유리판을 카메라를 향해 들었다.
조금 번지긴 했지만, 정상적으로 남겨진 입술 자국과 말끔한 시우의 얼굴이 클로즈업됐다.
“뭐냐. 이건 뭐 연습을 해도 안 되겠다.”
깨끗이 게임에서 진 것을 인정한 찬은 너무나도 말끔한 시우의 얼굴을 보고 혀를 찼다. 그저 클렌징 티슈로 너무 붉게 발린 립스틱을 지워 내고 립글로스만 덧바른 시우와 다르게 찬은 전체 세안 후 다시 메이크업을 받아야만 했다.
해가 있는 동안 모든 촬영을 끝내야 했기에 충분한 휴식 시간을 가지지는 못했다.
“자, 이번 게임은요. 그런데 지금 이 게임을 친구 팀이 이기면 세 번째 게임 안 해도 되는 거잖아요. 투찬 팀, 그냥 집시다.”
상준은 아예 대놓고 예찬과 찬에게 제의를 했다. 예찬과 찬은 둘 다 이름에 찬이 들어갔기에 간단히 줄여 투찬이라고 많이 불리었고, 이번 팀 이름을 자연스럽게 투찬으로 정했던 것이다.
“그런 게 어딨어요! 우리가 이길 수도 있잖아요. 설마 나보고 저 팅커벨 날개 같은 거 달라는 건 아니죠?”
그냥 지라는 말에 예찬이 발끈했다.
“예찬이 넌 왜 네가 저 팅커벨 날개를 단다고 생각하는 거야?”
“우리가 졌다고 해 봐요. 거기다 만약에 상준 형도 벌칙을 받아요. 그럼 둘 다 나 저거 시킬 거잖아.”
시우의 질문에 예찬은 곧바로 대답했다.
멤버들이 모여서 촬영하는 프로그램이었기에 자연스러운 반말 같은 것도 허용되었다. 그랬기에 예찬은 평소와 다름없이 편하게 말했다.
“어유, 우리 자이언트 베이비가 많이 컸네. 이제 말 안 해도 척척 아는구나.”
찬이 씩 웃으며 손을 들어 예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이미 대충 정해진 것으로 하고요. 두 번째 게임은……. 와! 제작진 바꿉시다, 그냥. 그렇게 아이디어가 없어요? 뭐 신박한 거 그런 거 만들면 안 돼요?”
큐시트를 넘기며 확인한 상준의 말에 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음부터는 그냥 우리한테도 물어봐요. 이건 진짜 너무 심하다, 심해.”
“상준 형, 미쳤어요? 그럼 진짜 우리한테 짜라고 할 사람들이야. 그런 말 하면 안 돼요.”
이어지는 상준의 투덜거림을 자른 건 에반이었다. 오션의 스케줄과 모든 프로그램이 그의 손을 거치고 있었지만, 이 프로그램만큼은 달랐다. 그 역시 오션의 멤버로서 출연을 하기에 소속사에서 이것만큼은 터치하지 말아 달라고 제안한 것이다.
어차피 게임은 거기서 거기고 회귀할 때마다 진행한 프로그램이지만, 대부분 같은 것이 반복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에반도 이 프로그램은 손을 놓고 있었다. 그리고 나름 그들이 제안하는 게임들이 재밌기도 했다. 모두 알고 있다면 연출되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그는 그 안에서도 즐기는 것보다 연기를 해야 했다.
“그래서 게임이 뭔데요?”
“막대 과자 게임.”
시우의 질문에 허탈한 목소리로 상준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