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82화 (82/187)

82화

어색한 침묵이 감돌기도 잠시.

“말해.”

“맥주 더 마실래.”

둘의 말이 또 겹쳤다.

“그래. 일단 맥주를 더 마시마.”

작게 소리 내어 웃은 시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고, 에반은 맥주를 한 잔 더 주문했다.

“우리 사이에 무슨 심각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이래. ‘루시퍼’도 내가 하기로 했잖아.”

“그건 당연히 네가 해야 하는 거였어.”

“와, 말하는 거 봐. 당연한 게 어딨어?”

시우는 손을 들어 에반의 허벅지를 툭 때렸다.

참 이상했다. 지금 에반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지만, 그가 무척 즐거운 것 같았다. 그리고 짙게 느껴지는 그의 향에 시우는 다른 손으로 제 코 아래를 문질렀다.

아무래도 병원을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베타인 제가 알파의 페로몬을 맡을 수 있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간혹 아주 가끔 뒤늦게 발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기에도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장난스럽게 예찬에게 안길 때도, 피곤해서 찬의 옆에 누워서 잘 때도 시우는 그들에게서 어떤 향도 느끼지 못했다.

어떤 향을 느끼지 못했다기보다 페로몬이라고 생각되는 그런 것을 맡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그런데 왜 에반의 것만 느껴지는 것일까?

거기다 계속 제 머릿속에서 맴도는 것은 ‘페어’라는 단어였다. 에반은 그날 더 많은 말을 했지만, 아무리 떠올려도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둘이 장난을 치는 사이 새 맥주가 나왔다. 시우는 하얀 거품이 인 맥주를 얼른 마셨다.

“딴 건 아니고, 내가 널 좋아한다고.”

맥주를 마시고 잔에서 입술을 떼려던 시우의 고개가 천천히 에반을 향했다.

그리고 방금 그가 한 말을 이해하기 위해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물론 친구로서 좋아한다거나, 같은 멤버로서 좋아한다는 말은 아니야.”

시우가 정의를 내리는 것에 도움을 주려는 듯 에반은 조금 더 말을 이었다.

분명 잔에서 입술을 떼려 했지만, 시우는 더 마시는 걸 선택했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 말을 해도 된다고 하니까 하는 말이야.”

막 나온 맥주를 다 비운 시우는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훔쳤다.

“그럼 나도 하고 싶은 말 할래.”

절대 맥주 두 잔에 취할 시우가 아니었다. 이런 말을 들었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지난번엔 한참을 망설였고, 혼자 고민했다. 그리고 끝은 허무 그 자체였다.

“나 해외 투어 콘서트 해 보고 싶어.”

무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고백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애써 꾹꾹 눌러 담고 있던 말이 에반의 입에서 제멋대로 흘러 나갔다. 그런데 자신의 고백에 대한 대답으로 돌아온 말은 일과 관련된 것이다.

“뮤직 어워드에도 초대받아서 가 보고도 싶어.”

에반은 지금 시우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너무 다른 대답을 해서. 게다가 시우는 놀라거나 당황한 것 같지도 않았다.

지금 시우는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취기가 올라온 것도 아니다.

“해 보고 싶은 게 진짜 많아.”

그렇게 말을 하는 시우는 에반에게로 조금 더 다가갔다.

에반은 그런 말을 한 이후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시선을 내린 시우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따스하다. 에반의 손은 항상 따스했다.

커다란 손에 자신의 손을 마주 대어 보았다.

형질, 그게 뭔데? 집안 차이, 그게 뭔데? 우리 사이를 막고 있는 게 뭘까?

내가 왜 그리 고민을 하고 망설였을까?

다 하면 안 돼? 어차피 또 돌아갈 거.

손가락을 느리게 움직이자 부피를 달리하는 손가락이 부드럽게 엮었다. 그때까지도 에반은 손의 힘을 빼고 시우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시우는 얽혀 있는 손가락을 보았다.

“하고 싶은 거 다 할래. 후회하고 싶진 않거든. ‘루시퍼’도 그래서 하는 거야.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 이런 기회가 내게 올지 모르니까. 다 잘할 수 있을진 나도 몰라. 그런데 에반.”

알고 있다. 자신은 이렇게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에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시우만 바라보고 있었다.

“너 진짜 무드 없는 거 알지?”

살짝 고개를 든 시우의 눈이 빛났다.

반면 에반의 미간은 살포시 찌푸려졌다.

“가자.”

“김시우.”

“가자. 명훈 형이 우리 찾겠다.”

“시우야.”

“어서 일어나. 늦게 가면 우리 혼나. 거기다 내일 아침에 우리 콘셉트 회의 있잖아.”

에반은 여전히 손에 힘을 주지 않고 있었지만, 시우는 제 손에 힘을 줘 깍지를 꼈다. 그러고는 살살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코코.”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듯 에반의 표정이 더 굳었다. 지금 그가 상당히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온전히 느껴졌다. 지난번에는 고통스러운 감정들만 넘어오더니 요즘은 이런 것들이 꽤 재밌었다.

무표정한 것 같은데도 에반은 참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반복된 회귀에 미쳐서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상황을 봤을 땐 에반이 느끼는 감정이 맞는 것 같았다.

“있잖아. 가끔 생각해. 진짜 가끔인데, 내가 오메가면 어떨까 이런 거. 페로몬으로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며. 일반적으로는 페로몬을 꼭꼭 숨기지만, 정말 깊은 사이에선 숨기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어. 만약 내가 오메가라면 알 수 있을까? 너 지금 당황스러운 것 같아. 내가 이상한 말을 해서 조금 짜증도 난 거 같고.”

굳어 있던 에반의 표정이 조금씩 풀렸다.

“이번엔 놀랐을 거야. 어떻게 얘가 내 마음을 알지? 이런 거.”

시우는 느껴지는 그대로 말해 보았다.

“에반. 넌 내 대답 알아.”

시우는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반복되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불안한지 알기에. 그리고 솔직히 모르겠다. 에반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 말을 들었기에 가슴이 시렸다.

시우와 에반이 함께한 시간. 연습생부터 지금까지 그들이 어떤 추억을 쌓았고 어떤 감정을 공유했는지 조금도 모른다.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데, 과연 무슨 감정이 둘 사이에 있었던 것일까?

더 미적거릴 시간이 없었기에 일어나며 손깍지를 풀려던 시우는 그럴 수 없었다.

방금까지 제가 하는 대로 얌전히 있던 에반의 손이 움직인 것이다. 제가 꽉 잡고 있었는데, 지금 힘을 줘 깍지를 풀지 않은 이는 에반이었다.

“시우, 넌 알아. 내 감정, 내 페로몬 전부.”

일어선 시우는 앉아 있는 에반을 내려다보았다. 은은한 불빛이 고개를 젖힌 에반의 얼굴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이 눈빛 본 적이 있다.

시우는 그의 시선을 피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둥에 가려진 자리. 그리고 그들과 가까운 자리는 모두 비어 있다.

그리고 에반의 옆에 있는 자신의 볼캡을 집기 위해 상체를 살짝 숙였다.

솔직히 볼캡은 핑계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에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충동이 일었다.

시우의 입술이 아주 짧은 시간 에반의 입술 위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몸을 바로 한 시우의 손엔 볼캡이 들려 있었다.

“에반, 난 알아도 몰라.”

시우는 솔직하게 말했다. 알아도 모르겠다. 이런 현상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니까. 확실하게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알아도 모르는 것이다.

후드를 벗고 볼캡을 쓰려던 시우의 몸이 휘청였다. 그리고 시우는 에반의 다리 위에 앉아 있었다.

지금 어떤 자세로 있는지 알아차린 시우가 파드득거리며 일어나려 했지만, 에반이 시우의 허리에 팔을 감는 것이 더 빨랐다. 그렇게 시우를 끌어안은 에반은 시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야.”

버둥거리는 시우가 에반의 팔을 풀어내려 했다. 그 작은 바스락거림이 에반의 심장을 더 빠르게 뛰게 했다. 이제 시우의 감정을 읽을 순 없다. 하지만 여전히 시우에게선 자두 향이 강하게 풍겼다.

내 오메가. 나의 페어.

“에반.”

누군가에게 보일까 봐 두려운 거겠지.

코코 넌 그랬으니까. 무척이나 조심성이 많았고 잘 숨으니까.

놔줘야 하는 것을 아는데, 쉽게 그럴 수 없었다. 처음엔 뿌리치려 하던 시우의 손이 이제 가볍게 에반의 팔뚝을 다독이듯 건드렸다.

“…….”

익숙한 벨 소리가 울렸다.

“네. 형.”

에반이 말릴 틈도 없이 시우는 울리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에반이랑 같이 있어요. 이제 가려고…….”

“어디야?”

화가 난 명훈의 목소리가 에반에게까지 들렸다. 에반과 시우가 같이 사라졌지만, 만만한 시우에게 화를 내는 명훈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아예 안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시우의 손에 들린 휴대전화를 낚아챈 에반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우는 명훈이 뭐라고 하는지 들을 수 없었다.

“내일 콘셉트 회의만 펑크 내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끊어요. 지금 들어갈 테니까.”

일방적으로 통화를 끝낸 에반은 그제야 시우를 놔주었다. 따스했던 몸이 금세 사라졌다. 앞에 선 시우는 후드를 벗고 볼캡을 깊게 눌러썼다.

“오늘 말 못 들은 걸로 해.”

제가 성급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에반은 모자 위로 시우의 머리를 만졌다.

“싫어.”

가끔 이런다. 시우는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짓을 제법 자주, 그리고 잘했다.

“김시우.”

“네 감정. 그리 가벼운 거 아니잖아.”

또다시 원점인가.

“에반, 나 네가 무슨 말 했는지 제대로 알아들었어. 네가 내 대답 제대로 못 들은 거야, 멍청아.”

시우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에반의 손을 치워 냈다.

멍청이. 누가 에반 머리 좋다고 했어? 멘사 회원이라고? 대대로 머리가 좋았다고? 사람 말귀를 이렇게나 못 알아듣는데 뭐가 똑똑한 거야. 조금 돌려 말했다고 삽질하고 있어.

“내가 다 한다고 했잖아. 해외 투어 콘서트도 하고 싶고, 뮤직 어워드도 가 보고 싶어. 그리고 너랑도 잘 지내고 싶다고 했잖아. 진짜 바보 멍청이야. 에반. 으…… 이런 애가 뭐가 좋다고 내가 이러고 있나 몰라.”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에반을 뒤로하고 앞서 걷는 시우의 귀와 두 볼은 그 어느 때보다 붉었지만, 깊게 눌러쓴 볼캡과 그 위로 뒤집어쓴 후드가 모든 것을 가려 주었다. 미친 듯이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 소리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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