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스타트(Restart)-88화 (88/187)

88화

“어떻게 한 번 더 가?”

에반은 촬영 감독의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글쎄요.”

집중해서 영상을 보던 에반은 짧게 숨을 끊어 쉬고는 대답했다. 벌써 이 장면만 열 번째 촬영이다. 멤버들뿐 아니라 백댄서들까지 동시에 안무하는 부분이라 한 명이라도 동작이 어긋나서는 안 되었다.

눈에 거슬리는 장면은 없지만, 조금만 더 하면 완벽한 군무가 될 것 같은 욕심이 에반의 발목을 잡았다.

촬영 감독 역시 조금의 부족함을 느꼈기에 에반에게 그런 질문을 한 것이다. 편집을 해 봐야 알겠지만, 뮤직비디오에서는 10초 남짓한 분량이 될 것이다. 그리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만한 분량도 아니었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에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촬영장 한쪽에 있는 의자에 기대앉아 쉬는 시우가 눈에 들어왔다.

땀에 젖은 머리를 차가운 헤어드라이어 바람으로 말리는 스태프 옆으로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붙어 있었다. 완전히 몸을 늘어뜨리고 앉은 시우의 눈은 곱게 감겨 있었다.

커다란 선풍기 하나를 차지한 예찬은 재킷을 벗어 놓고는 셔츠를 펄럭이며 얼음이 든 물 잔을 들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반복한 격한 안무에 다들 지쳤다. 상준 역시 옆에서 모니터링은 하고 있지만, 그의 옆에도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붙어 흐르는 땀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고 있었다.

“지금 찍은 것들로 잘 살려 보죠. 마지막 컷 하나 더 남았잖아요.”

에반의 말에 동의한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에반은 쉬고 있는 시우에게로 향했다.

아이돌. 연예인. 이런 것들은 에반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제 마음을 솔직하게 들여다보자면 이딴 것들 다 때려치우고 시우와 단둘이 유유자적 즐거운 시간만 보내고 싶었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둘이 말이다.

하지만 시우가 원하는 일이었다. 해외 투어 콘서트도 뮤직 어워드 참가도. 그러려면 아이돌이라는 이 직업을 계속해야 했다.

차라리 휴식기였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이리 바쁘지 않았을 테니까. 2집 발매일이 코앞인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만큼 정신이 없었다.

지금 당장 시우를 끌어안고 뒹굴거리고 싶다. 붉은 입술이나 물고 빨면서 말이다. 그러는 김에 다른 곳도 좀 물고 빨고. 그런 생각을 하며 시우에게 다가가던 에반의 표정이 굳었다. 방금까지 편하게 쉬는 것 같던 시우가 눈을 번쩍 뜬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딘가로 향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방금 제가 본 것이 맞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시우가 날 피한다고? 왜? 누군가가 급하게 부른 것처럼 그렇게 시우가 가 버렸기에 에반은 그쪽을 잠시 응시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시우를 부른 것 같지는 않았다. 급히 자리를 옮긴 시우가 간 곳은 찬의 옆이었다. 살짝 고개를 갸웃한 에반은 발을 옮겨 그리 향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예찬이 있는 선풍기 앞으로 갔다.

에반의 입에서 실소가 흘렀다.

선풍기 앞으로 가려니 이번엔 또 쪼르르 상준에게로 간다.

이것 봐라. 김시우, 또 무슨 앙큼한 생각을 하는 거지?

마지막 촬영에 들어갈 때까지 시우와 에반은 술래잡기 아닌 술래잡기를 했고, 결국 이 술래잡기는 촬영이 끝나고 같이 저녁을 먹을 때까지 이어졌다.

뮤직비디오 촬영 후, 단체 회식이 잡혀 있었다. 아직 마무리를 한 건 아니지만, 그동안 수고한 멤버들과 스태프들을 위한 자리였다.

꽤 유명한 한우 전문점에 도착한 멤버들은 자연스럽게 한쪽에 있는 룸으로 향했다. 촬영이 끝나고 다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긴 했지만, 헤어나 메이크업은 그대로 하고 있었기에 최대한 노출을 피하려는 것이었다.

차 안에서는 편하게 있었지만, 이동하는 그들은 모두 벙거지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빠르게 매니저가 안내하는 룸으로 들어간 시우는 창가 구석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이동하는 시우의 손은 방금 같은 차로 움직인 찬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에반은 안 돼. 우리는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해.

에반과 자신의 사이를 들키지 않을 방법은 단 하나였다.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 어차피 둘은 붙어 있는 것보다 떨어져 있는 것이 익숙한 사이였기에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촬영장에서도 에반의 기척이 느껴지기만 해도 자리를 피했다. 이리저리 피했더니 에반도 눈치를 챈 듯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방금 차로 이동할 때도 찬이 차에 오르자마자 얼른 그를 뒤따랐고 자연스럽게 에반과 다른 차를 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바로 옆자리에 찬을 앉게 하면…….

난 바보인가?

시우는 자신의 앞에 앉는 에반을 보는 순간 자신을 덮쳐 오는 자괴감에 고개를 숙였다. 옆자리를 사수하면 뭣 하나? 앞자리가 있었는데.

옆에 앉는 사람이야 대충 잡고 끌고 오면 되지만, 앞자리까지는 제가 정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앞에 앉은 에반보고 다른 자리로 가라고 할 수도 없고, 제가 자리를 옮길 수도 없었다.

바보 멍청이는 에반이 아니고 나였구나. 김시우, 왜 사니. 어쩜 내 두뇌는 이리도 일차원적일까? 하긴 공부를 그렇게 해도 의대 갈 성적은 안 되긴 했지.

똑똑-.

테이블만 내려다보며 무식한 제 머리를 한탄하고 있던 시우의 귓가에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멤버들에 이어 스태프들도 다 왔는지 제법 큰 음식점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로 가득 찼다.

똑똑-.

고개를 들지 않자 또 같은 음이 들렸다. 그리고 그 음은 정확히 자신의 앞에서 나고 있었다.

“한우! 등심! 한우! 등심!”

“난 채끝살.”

“아무거나 먹어. 뭘 또 가려.”

멤버들이 메뉴를 고르는 소리에 또다시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섞였다.

계속 무시할 수도 없었기에 시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한 에반의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등심요! 등심!”

한결같이 등심을 외치는 예찬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살치살이 더 부드럽다니까.”

“주는 대로 먹으라고. 배고프다.”

상준은 이미 차려져 있는 밑반찬 중 당근을 하나 집어 먹으면서 얼른 아무것이나 주문하라고 성화였다.

“시우는 뭐 먹을래?”

에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메뉴판을 건넸기에 시우는 얼떨결에 그걸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방금까지 제 생각을 말하던 멤버들의 시선이 모두 시우에게로 쏠렸다.

“……나?”

메뉴판을 펼치긴 했지만, 갑자기 제게 선택권이 주어지자 쉽게 결정을 할 수 없었다.

“그래, 너. 뭐 먹을래?”

에반이 다시 한번 더 물었다.

“돼지.”

……아. 시우는 정말 뇌를 거치지 않고 솔직하게 돼지를 말하고는 혀끝을 깨물었다. 미안하다. 난 비싼 소고기도 좋지만, 기름 좔좔 흐르는 오겹살파야.

“아니. 뭘 고민해! 여기 모둠 있네, 모둠. 이거 먹으면 되겠다.”

아주 짧은 침묵을 깬 건 정신을 차린 시우의 외침이었다.

“여기 모둠으로 10인분 주세요!”

시우가 결정을 내리자마자 번쩍 손을 들고 주문을 하는 예찬의 큰 목소리 아래로 에반의 작은 중얼거림이 깔렸다.

“돼지는…… 없는데.”

식사 시간이 이렇게 불편한 적이 있었나? 지금까지 멤버들과 에반과 다 함께 숱하게 밥을 먹긴 했지만, 그건 대부분 배달 음식이었다. 그리고 스케줄에 쫓기느라 그리 많은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었다.

지글지글 불판 위에 소고기가 구워지는 사이 앨범 이야기와 더불어 오늘 촬영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미성년자인 예찬을 제외하고 넷의 앞엔 술잔도 놓였다. 소주를 마시는 셋과 다르게 에반은 굳이 맥주까지 주문해 소맥을 시우에게 건넸다.

속이 탄다, 속이 타.

이 눈치 없는 놈아. 내가 비밀로 하고 싶다고 말했잖아.

그날 차 안에서 분명히 말했다.

‘우리…… 이거 비밀로 하자.’

차마 에반을 보기 민망하여 창밖을 보며 그리 말했을 때, 에반도 분명히 대답했다. ‘그래’라고. 그런데 이런 식으로 티를 내면 남들이 알아채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고기는 제가 잘 굽는다며 예찬이 집게를 들고 열심히 고기를 구웠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그런데 노릇하게 고기가 잘 구워져 이제 먹으면 되겠다 싶을 때면, 에반의 집게가 움직였다.

그리고 잘 익은 고기 몇 점이 시우의 앞접시에 놓였다.

옆자리도 아니고 앞자리에서 왜 굳이? 이런 짓을 하시나요? 처음엔 술 마시느라 고기 먹느라 이야기하느라 그리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던 멤버들이 문득문득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단번에 소맥 한 잔을 또 비워 낸 시우는 따끈따끈한 고기가 제 접시에 톡, 하고 떨어지자 앞에 있는 에반을 노려보았다.

“어서 먹어.”

“안 먹어.”

“토시살 줄까?”

“아니.”

“된장에 밥 먹을래?”

“어.”

어머님이 한국분이셔서 그렇긴 하지만 에반의 한국어 실력은 완벽했다. 이국적인 외모로 소고기 부위를 정확히 말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식사가 끝나 가는 무렵에 된장에 밥을 권하는 걸 보니 그냥 헛웃음이 났다.

시우는 옆에 있는 맥주병을 집었다.

에효. 뭘 말하리. 술이나 더 마시자.

맥주를 적당히 따르고 이번엔 소주병을 들었다. 소맥은 황금 비율이지. 금세 만들어진 소맥 잔을 든 시우의 두 눈이 별안간 동그래졌다.

그는 발을 옆으로 슬쩍 옮겼다. 그런데 또 무언가가 제 발을 건드렸다. 이거 뭐지? 이번엔 반대쪽으로 옮겼다. 하지만 이내 누군가 또 제 발을 건드리자 시우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만 마셔.”

역시나 시선이 마주친 사람은 에반이다. 방금까지 주위에 멤버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테이블엔 에반과 시우뿐이었다.

예찬은 감독님이 있는 테이블에 있고, 찬은 매니저들이 앉은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상준은 보이지 않았다.

“코코, 너 취한 것 같아. 이제 그만 마시자.”

커다란 에반의 손이 다가오고 방금까지 들고 있던 소맥 잔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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