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보글보글 거품이 올라오다가 한순간 끓어 넘치는 물처럼 화르륵 올라왔던 감정이 사그라들었다. 점차 안정을 찾아 가는 자신과 반대로 에반의 얼굴은 한없이 어두워졌다.
시우의 볼을 감싼 에반의 엄지가 눈물로 젖은 볼을 쓸었다. 그렇게 시우의 젖은 얼굴을 닦아 주는 에반의 얼굴에 물기가 어렸다.
그의 얼굴을 만지는 것 대신 시우는 자신의 볼을 만지고 있는 에반의 손을 제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온기 가득한 에반의 손에 볼을 비비며 손끝으로 에반의 손가락을 두드렸다.
“왜?”
아직 목이 멘 시우의 입에선 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그저 입술만 뻐끔거렸다.
그 질문에 에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눈을 감을 뿐이었다.
에반이 눈을 감자 굵은 눈물이 방울져 그의 볼을 타고 흘렀다.
시우는 눈을 감은 에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널 좋아해도 될까? 사랑해도 될까? 내가 회귀해 버리면 넌 어떤 삶을 살까? 그런 네 기억 속에서 난 독일까? 약일까?
속이 울렁거렸다. 결국 다 욕심이다.
다 내려놓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심지어 저는 이제 내려놓는 것을 잘하게 된 줄 알았다.
그런데 욕심이 넘쳐 나는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톱스타라는 자리와 에반 둘 다 갖고 싶다. 그런 제 선택이 어쩌면 에반을 망가뜨릴지도 모른다. 열애설로 무너져 내리는 연예인들이 부지기수였다.
열애설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정상의 위치에 있는 존재에게 그런 스캔들은 최악에 가까웠다. 이제 스무 살. 활짝 날개를 펼쳐야 할 에반의 발목을 제가 잡은 것 같다.
“뭐가 그렇게 힘들고 아파?”
다시금 눈을 뜬 에반은 낮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난 괜찮아.”
“아니. 넌 괜찮지 않아.”
괜찮다는 시우의 말에 에반은 단호하게 말했다.
자두를 샀다. 시우가 좋아하던 그 자두 농장을 기어코 찾아내 사고 말았다.
참으로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지금의 시우는 자두를 싫어할지도 모른다.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라는 질문에 시우는 ‘수박’이라고 적었다.
그냥 주고 싶었다. 가을날 도토리를 주워 먹는 다람쥐처럼 시우는 자두를 참으로 맛있게 먹었으니까. 가끔 한 알을 통째로 입에 넣어 통통하게 나온 볼이 참으로 귀여웠다.
자신에게 뻗은 작은 손 위에 자두를 내려놓을 때의 기분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우가 보인 반응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자두를 보자마자 시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싫어하는 것 같아 다시 자두를 가져오려 했지만, 자두를 움켜쥔 시우의 손이 움직이는 것이 더 빨랐다.
그리고 시우는 울었다.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운전 중인 대환은 지금 뒷좌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몰랐다. 차라리 소리를 내고 불만을 토로했으면 좋겠다.
맑은 눈물만 뚝뚝 흘리는 시우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조여들었다.
날카로운 송곳이 심장을 수없이 찔러 댔다. 온몸이 저릿하고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은 먹먹함이 밀려들었다. 그 순간 에반은 깨달았다. 지금 제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시우의 것이라는 것을. 회귀한 이후 처음 느껴 보는 감정 동화였다.
회귀 전엔 이렇게까지 강하게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숨 쉬듯 자연스럽게 시우의 감정을 읽었고, 오히려 제가 아닌 시우가 제 감정에 휩쓸렸다. 격하게 자신을 집어삼키는 그 수렁 같은 감정에 에반은 아찔해졌다.
뭐가 이렇게 아픈 것일까? 왜 고통스러워하지?
불안했다. 어쩌면 시우는 정말 저를 증오할지도 모른다. 미친 듯이 싫어할지도 모른다.
제가 아는 시우의 성격이라면…….
분란을 만들지 않기 위해 지금껏 제가 그에게 강요했던 그런 감정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넘쳐 나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시우에게 밀어붙였다. 수시로 시우의 입술을 탐했다. 그에게 닿고 싶어 안달 났다. 어찌 보면 철없는 제 행동을 시우는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그 모든 것이 위장이라면?
분명 시우는 괜찮지 않다. 어떤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언제 울었냐는 듯 말간 얼굴로 괜찮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뱉어 내는 모습에 속이 끓었다. 에반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깊게 연결되었던 감정 동화는 끝나 있었다.
물러설 수 없다. 겨우 끼워 놓은 반지가 시우의 손에서 사라지는 것이 싫다. 이렇게 오로지 자신만 봐 주는 눈을 잃을 수 없다. 지금도 미친 듯이 자신을 자극하는 자두 향을 계속 느끼고 싶다.
에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코코.”
“자두 맛있네.”
씨를 뱉어낸 시우는 자두가 더 없냐고 물어왔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에반은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쩌면 제가 해야 하는 일이 시우가 원하는 이별일지도 모르니까.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가느다란 실의 끝을 잡고 있었다. 언제든 시우가 끊어 버리면 힘없이 떨어져 버릴 그런 끈이었다.
“자두 괜찮았어? 원하면 더 사올게.”
하고 싶은 말 대신 평범한 질문을 했다.
“응. 자두가 맛있긴 한데…… 더는 안 먹어도 될 것 같아.”
그 말을 끝으로 시우는 여전히 자신의 볼을 감싸고 있던 에반의 손을 치워 냈다.
“싫다는 게 아니라……. 자두가 음, 좀 그래. 참 좋은데, 슬픈 기억이 있어서. 그래서 그랬어. 많이 놀랐지?”
조용한 공간엔 대환이 틀어 놓은 라디오 소리만 들렸다. 몸을 바로 하고 앉은 시우는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가 아픈 곳을 건드렸어?”
“조금 슬프긴 하지만 행복한 기억이야.”
에반은 손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혼란스럽다. 수없이 회귀하면서도 이렇게 어려운 건 처음이었다. 다시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또 노력하고 도전하면 될 줄 알았다. 한데 그 모든 생각은 제 자만이었다.
회귀 전의 시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제 감정에 빠져 더 서두르고 말았다. 성급함이 모든 것을 망쳐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제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에반의 시선이 둘의 손에 있는 반지에 닿았다.
우정으로 덮었다. 비록 왼손 약지는 아닐지라도 자신과 공유한 어떤 것이 그의 손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차올랐다.
매장에서 계속해서 망설이던 시우가 겹쳐 보였다.
“반지…….”
에반이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시우의 오른손이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만졌다. 손끝으로 매끈한 면을 쓰다듬다 엄지와 검지로 천천히 반지를 돌렸다.
“예쁘다. 그지?”
‘원한다면 빼도 돼.’
입 밖으로 뱉고 싶지 않은 말이었지만, 시우가 원한다면 그 반지를 빼도 된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반지를 만지다 자신을 보고 해사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그 말을 삼켰다.
“그래, 반지 예쁘다. 빼지 마. 그럼 나 서운할 것 같아.”
“에바나.”
“응.”
잠시 머뭇거리던 에반은 시우에게로 손을 뻗었고, 이내 시우의 손을 감싸 잡았다. 이렇게 닿아 있는데도 불안하다.
“혹시라도 네 감정이 변하면 언제든지 말해 줘. 내가…… 누군가와 만나는 건 처음이라 잘 몰라. 어떻게 해야 상대가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잘해 준다는 게 어떤 건지도 잘 모르고. 네가 많이 답답할지도 몰라. 그리고 난 진짜 숨기고 싶어.”
혹시라도 알려져서 네 앞길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 세상은 네가 아는 것보다 아름답지 않고 순수함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거든. 같은 그룹 멤버로서 우정을 나누며 친한 모습은 모두가 환영하지만.
둘의 사이가 깊어진다면 세상이 그들을 보는 시각은 금세 달라질 것이다. 더군다나 에반은 알파고 자신은 베타이지 않은가? 하긴 오메가라고 해도……. 시우는 최대한 에반에게 잘 설명하고 싶었다.
모든 것에 솔직하고 감정을 숨기지 않는 에반의 순수함이 좋았다. 촬영장에서 아슬하게 입술이 닿았던 사건도 에반이니 가능했겠지. 자신처럼 이것저것 다 따지고 생각하다 보면 남는 것은 후회뿐일 것이다.
그래서 잠깐 그의 템포에 맞췄다. 지금 에반은 빨랐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코코, 깊게 생각하지 마.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마. 너만 생각해.”
“뭐래. 그럼 너도 생각하지 마?”
“그래. 나도 생각하지 마. 우리 2집은 잘될 거야. 올겨울엔 네가 원하는 뮤직 어워드를 골라서 갈 수도 있을 거야. 늦어도 내년 여름부터는 해외 투어도 시작할 거고.”
“무슨 자만이래. 우리 곡이 좋은 건 솔직히 인정하지만, 뚜껑은 열어 봐야 아는 거라고.”
시우는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에반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그의 말이 맞는다. 오션은 그럴 것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네가 하고 싶다고 했으니 그렇게 만들 거야.”
오만한 에반의 말에 시우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원한다면 톱스타로도 만들어 준다고 했지. 에반의 성격은 다 같나 보다
갑작스러운 시우의 웃음에 대환이 백미러로 흘깃 뒤를 살폈다. 백미러로 대환과 시선이 마주친 시우는 별것 아니라는 뜻을 담아 손을 살짝 흔들었다.
문득 자신에게 세상을 주겠다고 말하던 에반이 떠올랐다.
“그래, 그러자. 뮤직 어워드도 가고 해외 투어도 하고 너도 사랑하고. 아!”
웃음을 멈추고 대답하던 시우는 갑작스럽게 에반이 손을 꽉 잡자 작게 소리를 냈다. 꼭 잡힌 손이 아팠다.
“키스하고 싶어.”
아픈 손을 놓아 달라는 뜻으로 에반의 손등을 가볍게 때리던 시우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미쳤나 봐.”
그렇게 중얼거리는 시우는 곁눈질로 슬쩍 앞에 있는 대환을 훔쳐보았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는 그는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냥 공개 연애 하자.”
투덜거리는 것 같은 에반의 말에 시우는 윙크를 했다. 그러곤 매고 있던 안전벨트를 풀고 에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공개 연애는 반대지만 이런 건 되잖아. 시우의 입술이 에반의 입술에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공개 연애는 싫어. 그래도 키스는 좋아.”
“김시우. 나 미치게 하고 싶어?”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처음엔 스치듯 지나치는 뽀뽀로 만족했지만, 이젠 이런 뽀뽀는 간지럽기만 했다.
“응. 네가 내게 미쳤으면 좋겠어. 내가 네게 미친 만큼.”
에반의 손이 시우를 향했다. 품에 안으려는 순간 차가 커브를 돌았고, 시우는 비틀거리다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곧이어 차 안엔 시우의 맑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 웃음소리는 입 안으로 나직이 욕설을 중얼거리는 에반의 목소리를 완전히 덮었다.
“둘이 뭐가 그렇게 재밌어? 나도 좀 알자.”
시우는 아예 배를 잡고 웃어젖혔다. 때마침 차가 신호에 멈추자 대환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비밀입니다.”
겨우 웃음을 수습한 시우는 에반의 눈치를 보며 그리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