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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94화 (94/187)

94화

몸을 뒤척이던 시우의 손이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있는 휴대전화로 향했다.

어둠이 가득한 곳에서 빛나는 휴대전화의 화면을 본 시우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새벽 1시 28분.

시각을 확인한 그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조금 전까지 어수선한 소음이 가득하던 숙소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불면증이 이어졌다.

가끔 이러다 미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면 조울증이라도.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멤버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었지만, 지금은 울고 싶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낮엔 이런 고민을 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혼자 남겨지면 시우의 머릿속엔 답이 없는 복잡한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내일 정오에 ‘루시퍼’ 뮤직비디오가 공개된다. 그리고 모레 오후의 첫 방송을 시작으로 2집 활동을 할 것이다. 데뷔 무대이든 2, 3집 발매 무대이든 그런 것들은 시우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그리고 직전의 삶에서 솔로로 활동할 때는 긴장이나 초조함 같은 것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껏 이렇게 힘든 적은 없었다.

오션은 항상 성공했다. 그러니 이번 앨범도 잘될 것이다. 문제는 자신이라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항상 불운을 몰고 다니던 저로 인해 그들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른다.

승승장구하던 오션이 이번에는 망할 수도 있다.

늦은 시각까지 연습실에서 땀 흘리며 연습하던 멤버들이 떠올랐다.

그저 누워서 시간만 보낼 뿐 잠들지 못할 것을 아는 시우는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엉망진창이다.

얼굴을 쓸어내린 시우의 오른손이 왼손 검지에 닿았다. 에반과 나눠 낀 반지. 그날 이후 시우는 단 한 순간도 이 반지를 빼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초조하고 불안하며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때면 반지를 만졌다. 매끄러운 링을 따라 손끝을 움직이기도 하고 천천히 돌리기도 했다.

되돌리고 싶다. 에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이렇게나 커질 줄은 몰랐다. 게다가 그것은 끊임없이 크기를 키웠다. 하루에도 수십 번 후회하면서도 에반과 시선이 마주칠 때면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금도 에반을 떠올리자마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반지를 돌리는 손길이 빨라졌다. 바짝 마르는 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에반은 어떤 것도 묻지 않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유닛 촬영을 했던 그날 밤. 자두를 먹으면서 왜 울었는지 그는 물어보지 않았다. 또한 시우 역시 왜 그가 눈물을 흘렸는지 묻지 않았다.

솔직히 제 감정을 수습하는 것도 힘들다. 이렇게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한 기분도 에반과 함께할 때면 안정을 찾았다. 그와 함께일 때면 시우의 기분은 안정감을 유지했다.

그 대가일까. 어둠과 함께 찾아오는 혼자만의 시간엔 숨 쉬는 것조차 버겁다. 시우는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누른 채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그만큼 천천히 내쉬었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린 시우의 시선이 침대 옆 테이블에 닿았다.

수면 유도제는 열 알도 남지 않았다. 다 먹고 난 후엔 또 처방을 받아야 할 텐데, 그때면 한창 활동할 시기라 엄청 바쁠 것이다. 잠잘 시간도 쪼개서 움직여야 할 만큼 하루는 빡빡하게 돌아갈 것이고.

무엇보다 다른 병원도 아니고 신경정신과를 갈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이 약은 어떻게 처방받은 것일까? 누구에게 물어볼 사람도 없다.

최대한 자제하며 아껴 먹었지만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적어도 오늘과 내일은 잠을 좀 자야 했다. 무대에서 쓰러지기 싫다면. 그리고 틈을 봐서 신경정신과에 들러 수면 유도제보다 수면제를 처방받아야 할 것 같았다.

시우가 망설이는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흘렀다.

머뭇거리던 손이 테이블에 닿았고 이내 서랍을 열었다.

하얀색 약통을 꺼내는 손이 조금 떨렸다. 아랫입술을 말아 문 시우는 약통을 움켜쥐고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간접 등 하나만 켜진 거실을 가로지른 시우는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냈다. 꼭 먹어야 할까? 계속 누워 있다 보면 평소처럼 새벽녘쯤엔 잠이 들어 한두 시간은 눈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망설임의 시간이 길어졌다.

얼핏 시우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고, 거실에 있는 LED 시계는 2시 1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약통에서 약을 꺼낸 시우는 차가운 물과 함께 하얀 알약을 삼켰다.

“후우…….”

긴 한숨이 또 시우의 입술을 타고 흘렀다.

왜 제게 이런 저주가 내린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껏 사랑할 수도 없다. 이제 예전의 에반과 지금의 에반이 겹쳐 보인다. 다른 사람인지 같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아는 것이 없다. 나는 누구와 키스를 한 것일까? 누구와 함께하는 것일까?

아일랜드 식탁을 두 손으로 짚은 시우는 가슴을 가득 채우는 답답함에 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옅은 빛에 의지해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혼자 좋아할 때가 더 좋았던 것 같다. 에반의 입술이 제 입술에 닿을 때마다 시우는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또 돌아가지 않기를.

회귀가 길어졌던 그 시간의 끝은 그와 입술이 닿는 순간이었다.

계속 생각이 커지자 시우는 얼른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 침대로 돌아가서 누워야 했다. 그리고 잠이 들길 기다려야지. 또다시 한숨을 길게 내뱉던 시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에반이다. 그의 향.

“아직 안 잤어?”

페로몬이 짙어지면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부엌으로 들어오는 그를 본 시우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에반의 페로몬과 함께 섞여 있는 익숙한 향에 천천히 눈을 떴다.

“자두.”

“역시 우리 코코는 나보다 자두를 더 좋아하는 게 확실하네.”

아일랜드 식탁 위로 작은 상자를 내려놓은 에반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술 마셨어?”

“조금. 늦었는데 왜 안 자고 있어? 나 기다렸어?”

연습실에서 곧장 숙소로 돌아온 멤버들과 다르게 에반은 또 일이 있다고 했다. 들어온 줄 알았는데.

“잠이 안 와서.”

에반이 다가오자 시우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방금까지 자신을 조종하던 무거운 감정들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와 함께 이번엔 욕심이 자라났다. 괜히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제 마음을 표현했다고 후회한 것이 불과 몇 분 전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게 닿고 싶다. 그의 품에 안겨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다.

날 이렇게 혼란스럽고 힘들게 하는 비밀들을.

에반의 앞에서 이상한 모습도 많이 보였다. 울다가 웃다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불현듯 스캔들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순간 물러났다. 카메라가 있는 곳에서는 어떻게든 에반과 멀어지려 했다.

“걱정 안 해도 돼. 충분히 열심히 했고, 좋은 결과 있을 거야.”

에반이 더 다가오자 시우는 얼른 손을 뻗어 자두 상자를 잡았다. 그리고 상자를 열고 자두를 꺼냈다.

“알고 있어. 우리 팀 최고잖아. 곡도 좋고, 퍼포먼스도 좋고. 다들 그렇게 노력하는데 좋은 결과 있어야지.”

시우는 에반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옆에 있는 키친 타월로 자두를 대충 닦았다.

그러고는 자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새콤달콤한 자두의 즙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수분이 가득한 자두즙이 손을 타고 흘렀지만 그런 건 생각하지도 못했다.

“빈말이라도 나 기다렸다고 해 주지.”

자두를 씹던 시우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일랜드 식탁 앞에 서서 자두를 먹는 시우의 뒤에 에반이 있었다.

시우의 등에 에반의 가슴이 닿았고 단단한 그의 두 팔이 시우의 허리를 감쌌다.

에반이 투정을 부리며 시우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 순간, 시우는 숨까지 멈췄다. 목에 닿는 뜨겁고 말랑한 것이 무엇인지 아니까. 자신을 진하게 덮어 버리는 향과 온기를 넘어 뜨거운 에반의 열기는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생각마저 날려 버렸다.

“나도 자두 먹고 싶어.”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면서 자두가 먹고 싶다고 말한 에반이 시우의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

“…….”

이상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아 시우는 얼른 입을 앙다물었다.

시우의 얇은 잠옷 위로 큰 손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는 에반의 숨결이 목선과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자두…… 먹고 싶다며.”

멈췄던 숨을 조심스럽게 내뱉은 시우는 제가 베어 문 자두를 바라보았다. 옆으로 손을 뻗어 자두를 쥔 손을 들어 그에게 보여 주려 했다.

“응. 먹고 싶어.”

“여기…… 앗!”

새 자두를 꺼내 줘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제가 먹던 자두를 내밀던 시우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방금까지 자신을 끌어안고 있던 에반의 손이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순식간에 아일랜드 식탁에 걸터앉은 시우의 앞엔 에반이 서 있었다.

“자두…….”

에반의 눈을 본 시우는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조금 전 먹은 자두의 단맛이 여전히 입 안에 남아 있었다. 뇌가 멈춰 버린 듯 시우는 자두라는 말을 또 맹하니 뱉고 말았다.

“그래. 먹고 싶다고.”

에반의 대답은 느렸다. 그의 향 사이에 술 냄새가 희미하게 스며 있었다. 그리고 시우는 다시금 자두를 쥔 손을 보였다.

내가 원하는 자두는 이 자두가 아닌데.

에반은 솔직한 마음을 전하지 않았다. 시우의 잇자국이 나 있는 자두를 보는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곧장 손을 뻗어 자두를 쥔 시우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제게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자두의 향.

으깨진 자두에서 나는 것인지 시우에게서 나는 것인지 헷갈렸다. 에반의 입술이 자두로 점차 가까워졌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자두가 아닌 자신을 보고 있는 시우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

할짝-.

침묵 속에서 에반이 무언가 핥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에반의 입술과 혀는 자두가 아닌 시우의 손바닥 도톰한 곳에 닿았다. 흘러내린 자두즙으로 젖은 손바닥에 열기를 품은 입술이 스며들었다.

모든 것이 멈춰 버린 것 같은 공간에서 움직이는 것은 에반의 입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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