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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Restart)-95화 (95/187)

95화

손바닥에 머물던 에반의 입술이 시우의 손목 안쪽에 닿았다. 달콤한 자두즙이 타고 흐른 흔적을 따라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다.

시우는 어둠이 가득 내린 에반의 눈동자에 매혹되었다. 촉촉하고 따스한 혀가 느껴질 때마다 자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결국 그의 손안에서 자두가 으깨지고 자두즙이 더 흥건히 시우의 손과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 할 말이 있어.”

움찔거리던 시우의 입술이 벌어지고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우의 손목에 머물러 있던 에반은 저도 모르게 이를 세워 여린 손목을 깨물었다. 에반의 뇌를 마비시켜 버릴 만큼이나 강한 자두 향의 본질이 달라졌다. 순수하게 달콤하고 새콤하기만 하던 향에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 무엇인지 놓치려야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

에반은 시우의 말을 재촉하지 않았다.

제가 회귀자임을 밝히고 난 후, 이 관계가 틀어질지도 모른다.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을지도 모른다. 지금 취한 사람은 에반이지 시우가 아니다. 혹시 취기에 휘말려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건 아닐까? 또는 내일 아침에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놓은 시우는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예전의 너…… 흐읍.”

‘예전의 너를 알아. 널 만난 건 두 번째거든.’

어렵사리 입을 뗀 시우의 말은 에반의 입술에 먹혀 버렸다. 시우가 쥐고 있던 자두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진실을 말하기 힘들어 아래로 내리깔고 있던 시우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늘 배려하던 에반이다. 시우가 따라올 수 있는 시간을 주었고, 폭발적인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했다.

거친 키스에 숨이 턱턱 막혀 오자 시우의 두 손은 허겁지겁 에반의 셔츠를 잡았다. 그를 밀어내려 바르작거리다 결국 고개를 돌려 황급히 숨을 들이쉬었지만, 이내 따라온 에반에게 아랫입술을 물리고 말았다.

“하아……. 에…… 에반.”

입술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입술을 벌리자 에반의 혀가 거침없이 시우의 입 안으로 침범했다. 달콤한 자두 맛이 남아 있는 입 안 여기저기를 건드리며 뜨거운 숨결을 불어 넣는 에반에게 완전히 점령당한 시우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잠옷 상의 안으로 파고든 에반의 손길에 진득한 소유욕이 따라붙었다. 매끄럽고 따스하며 부드러운 살결을 만지는 손은 집요했다. 등과 허리를 타고 다니던 손이 시우의 가슴에 닿았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짙은 박하 향이 폐에 가득 들어찼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박하 향에 절여진 것 같았고, 온몸에서 열기가 들끓었다. 에반의 손끝이 정점을 건드리는 순간 시우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잠…… 잠깐만.”

에반의 가슴을 밀어낸 시우는 가쁜 숨을 뱉어 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 있던 시우는 어느새 그 위에 누워 있었다.

“…….”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에반의 눈길에 시우의 온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어둠이 그 모든 것을 감췄다. 시선이 얽혔지만 둘 다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거침없이 쓸어 대던 에반의 손이 이번엔 천천히 움직였다.

커다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고스란히 몸으로 전해졌다. 온몸을 뒤흔드는 강한 전율에 시우는 눈을 질끈 감았고, 살짝 벌어져 있던 입술 사이에선 한숨과도 같은 신음이 흘렀다.

“나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디부터 어떻게…….”

그건 시우에게 하는 것인지 에반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시우만큼이나 강한 충동에 휘둘린 에반의 입술이 시우의 눈꺼풀에 내려앉았다.

“시우야. 코코…….”

시우의 눈꺼풀에 닿았던 입술은 몽글몽글한 코끝을 지나 볼에도 닿았다. 시우의 얼굴 여기저기를 맴도는 입술은 결코 입술을 찾지 않았다.

턱 끝에 닿은 에반의 입술이 옮겨 간 곳은 시우의 귓가였다. 무너지듯 시우의 위로 상체를 숙인 에반은 입술로 귓불을 물었다.

아일랜드 식탁에 누운 채 에반을 받아들이던 시우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 두 팔로 에반을 끌어안았다. 자신을 완전히 녹여 버릴 불덩이를 끌어안은 기분이었다. 자신의 안에 자리 잡은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 허무,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그 불길이 깡그리 태워 버릴 것 같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사물을 구별하는 것에 조금의 어려움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흐릿했다. 눈을 감았다 떠도 흐릿하고 그 끝들이 조금씩 뭉개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나의 페어.”

“……에……반?”

쾌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와중에도 정확히 들리는 단어를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우의 목소리는 아주 작고 느렸다. 방금 그 말이 무슨 뜻이냐 묻고 싶었다. 제게 깊은 고민을 가져다준 단어를 또 들을 줄은 몰랐다.

시우는 에반을 끌어안고 있던 두 팔을 풀고 그를 밀어내려 했다. 에반의 얼굴을 보고 싶다. 하지만 계속 자신의 목과 어깨를 물어 대는 입술과 제 몸을 더듬는 손길에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눈을 깜박이며 이 몽롱한 상황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모든 것이 뒤섞였다. 시우의 작은 움직임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 * *

차가운 물에 샤워하고 나온 에반은 자신의 침대에 잠들어 있는 시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까지 몰아붙일 생각은 아니었다.

시우에게는 조금이라고 설명하긴 했지만, 평소보다 과하게 술을 마시긴 했다. 그 달콤한 입술과 그 매끄러운 살결이 계속 저를 부추겼다.

떨리던 작은 몸과 제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꽤 긴 시간 차가운 물에 씻고 나온 것이 모두 무용지물인 것 같다.

술에 취한 채, 충동적으로 또 자두를 챙겨 오고 말았다.

늦었는데 그냥 숙소로 돌아가자는 대환의 말을 무시하고는 잠든 농장주를 깨워 저장고에서 자두 상자를 받아 온 것이다.

늦게 들어온 자신보다 자두를 더 반기는 것 같은 시우의 모습에 직전의 시우가 겹쳐 보였다. 솔직히 자두로 꼬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하게 자두만 쥐여 주면 시우는 눈을 흘기기는 했지만, 곧잘 받아먹었으니까.

끝까지 자두 판매하는 곳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가르쳐 줄 걸 그랬다. 침대에 걸터앉은 에반은 마른세수를 했다.

지금도 시우에게선 자두 향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제가 씌워 놓은 제 페로몬도 가득했다. 시우는 알 수 없겠지만, 알파나 오메가라면 치를 떨 만큼 강하게 씌워 버렸다.

처음 회귀했을 땐 가까이 가야만 조금 느낄 수 있던 시우의 페로몬을 이제는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그 안에 스며든 감정도 읽을 수 있게 됐다. 고른 숨소리만큼이나 시우의 페로몬은 안정적이고 편안한 느낌이 가득했다.

에반은 손을 들어 시우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 보았다. 동그랗고 단아한 이마가 잠깐 드러났지만, 이내 제가 넘겼던 머리카락이 다시금 사르륵 이마를 덮어 버렸다.

예민한 시우의 성격이라면 지금쯤 그가 받는 스트레스는 생각 이상일지도 모른다. 퍼포먼스의 시작과 끝을 시우가 맡은 것이다. 어제도 남들보다 더 오래 연습실에 남아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살짝 뒤척인 시우의 어깨에 찍힌 붉은 자국이 보였다.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이렇게까지 시우를 몰아붙일 생각은 아니었다.

저보다 자두를 반기는 모습 때문일까? 아니, 그런 것들은 다 핑계다. 말간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우의 눈만 보면 평온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가 자신의 페어임을 알리고 싶다. 하지만 페어라는 걸 알리던 순간 회귀했다.

사실 에반은 며칠 전부터 회귀가 마음에 걸렸다. 시우가 자두를 보고 보인 반응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과일에 그 어떤 사연이 엮인 사람일지라도 그런 반응을 보이진 않을 것 같았다. 자두를 보자마자 흔들리던 눈빛이나 마치 제가 뺏어 가기라도 할까 봐 허겁지겁 먹어 치우는 모습이 의구심을 품게 했다.

게다가 그때 제가 느낀 시우의 감정은 지독했다. 심연 가장 어두운 곳에 깔린 것은 짙은 외로움이었다. 외로움과 고독함. 그 두 감정은 제겐 끔찍하게도 익숙했다. 계속된 회귀의 결과로 모든 감정엔 무뎌졌지만, 그 둘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졌다.

혼자 같은 시간을 맴도는 외로움. 누구와도 함께 나눌 수 없는 시간. 그런데 시우도 그런 감정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행복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살아온, 겨우 스무 살의 아이가 알 수 있는 깊이가 아니었다.

……회귀자.

시우가 만약 자신과 같은 회귀자라면.

그럴 리가 없는데,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

에반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 같다.

시우가 허락해 준 것이니 괜찮겠지. 제게 미치라고 했다. 이미 미쳐 있지만, 더 열정적으로 미쳐 줄 수도 있지.

아직 술기운이 다 날아가지 않았는지 충동이 들끓었다.

잠든 시우를 깨우고 싶으면서도 그가 편히 자길 원한다.

시우를 제 침대에 데려온 것도 충동적으로 행한 일이었다. 시우의 방으로 가서 자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이불을 젖힌 에반은 잠든 그의 옆에 몸을 눕혔다.

제 무게에 침대가 움직이자 절로 시우의 몸이 제게로 향했다.

조심스럽던 에반의 행동이 조금 더 과감해졌다. 등을 보이고 모로 누워 자는 시우에게 팔베개를 했다. 그러고는 작은 몸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따스한 온기가 품 안 가득 들어왔다. 뭐가 불편했던지 작게 한숨을 쉬며 몸을 뒤척이는 시우의 행동에 에반은 잠시 숨을 멈췄다. 등을 보이고 있던 시우가 몸을 홱 틀더니 에반을 마주하고는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죽부인이라도 끌어안듯 한 팔은 에반의 가슴에, 한쪽 다리는 에반의 다리 위에 떡하니 올려놓은 시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다시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한 사람에게는 숙면의 밤이, 다른 사람에게는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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